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사부주피(射不主皮) - 획일적으로 평가하지 말자

라라와복래 2015. 8. 16. 19:26

[논어 명언명구]

사부주피(射不主皮)

획일적으로 평가하지 말자

결과만 보지 말고 동기를 보자.

결과의 성취만큼 동기의 방향이 중요하다.

 

축구는 골키퍼 이외에 손을 쓰지 못하게 하고, 농구는 발로 공을 차지 못하게 한다. 탁구와 골프는 아주 조그만 공을 쓰고, 럭비는 땅에 튀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을 쓴다. 이처럼 스포츠는 몸과 도구의 사용에 일정한 제약을 준다. 선수들은 일정한 제약을 받아들이면서도 오랜 훈련을 통해 아름다운 명장면들을 연출해낸다.

‘공자’와 ‘스포츠’, 이 둘은 잘 어울리지 않은 조합으로 보인다. 공자는 책을 열심히 읽는 학자이지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는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는 음악 마니아일 뿐만 아니라 체육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 기회가 되면 즐기기도 했다.

공자는 체육과 예술 활동을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공자는 육상, 전차경주처럼 기록경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은 더 빠름을 추구하며 고대 아테네에서 올림피아 제전에서 열렸던 ‘올림픽’에서 즐겨 했었던 종목이다. 공자는 활쏘기, 말타기 등을 즐겼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 기량을 겨루었다. 도대체 학자 공자는 스포츠의 어떤 측면에 매료되었기에 활쏘기를 예찬했을까?

<논어> 팔일(八佾)편 16장

— 56번째 원문

활쏘기 의례에서는 화살이 과녁을 꿰뚫는 것으로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쏘는 사람의 힘이 똑같지 않을뿐더러

옛날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射 : 사(射)는 활, 활을 쏘다의 뜻이다.

主 : 주(主)는 주인, 임금, 위주로 하다, 주요한의 뜻이다.

皮 : 피(皮)는 가죽, 껍질의 뜻이다. 여기서 가죽으로 만든 과녁을 가리킨다. 오늘날 총 쏘는 훈련에 쓰이는 표적지에 해당된다. ‘과녁’은 가죽을 뚫는다는 ‘관혁(貫革)’의 음이 바꿔서 생긴 말이다. 과녁은 달리 정곡(正鵠)이라고 부르는데, 정과 곡은 재질이 다르다. ‘정(正)’은 천에다 과녁을 그리는 것이고, ‘곡(鵠)’은 가죽에 과녁을 그리는 것이다. 천에 그린 과녁은 연회를 한 뒤에 행하는 활쏘기 의식에서 쓰이고, 가죽에 그린 과녁은 인재 선발을 위한 의식을 치른 뒤에 하는 활쏘기 시합에서 쓰인다.

爲 : 위(爲)는 하다, 되다, 만들다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여기서 ‘때문이다’의 뜻으로 쓰인다.

科 : 과(科)는 과정, 등급의 뜻으로 스포츠의 체급을 가리킨다.

향사례(鄕射禮)의 아름다운 경쟁

공자는 많은 스포츠 중에서 왜 유독 활쏘기를 좋아했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공자가 활쏘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문화 전통이고, 둘째는 경쟁의 방식이다. 고대 사회에는 일정한 기간과 일자를 정해두고 구성원들끼리 술을 마시는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활을 쏘는 향사례(鄕射禮)의 행사를 거행했다. 향사례는 스포츠 형식을 빌어서 평소에 심신을 단련하여 유사시에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행사이다. 향음주례는 구성원이 함께 모여서 화합과 친목을 다지는 행사이다.

이러한 의례는 오늘날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거나 새로운 형식으로 지키는 경우가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비류왕 17년(AD 320년) 궁궐 서편에 사대(射臺)를 설치해 놓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사람을 모아서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활쏘기를 하며 친목을 다졌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전해져서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황학정(黃鶴亭)에서 정기적으로 활쏘기를 벌였다.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그려진 그림에서 당시에 성행했던 활쏘기 훈련 장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대학과 회사에서 치르는 신입생과 신입사원 환영회 등도 기존의 구성원과 새로운 구성원이 함께 어울리는 변형된 예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자는 어릴 적부터 공동체에서 거행되는 다양한 예식 중 향사례를 구경하거나 참여하면서 활쏘기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김홍도의 <활쏘기>. 고대 사회에서는 정기적인 활쏘기 의례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구성원들 간에 화합과 친목을 다졌다.

활쏘기는 기량을 겨루는 시합인 만큼 경쟁이 없을 수 없다. 공자는 사대(射臺)에 오르기 전 긴장된 자세에서부터 활을 쏘고 난 뒤에 승패가 나고 벌주를 마시는 과정을 세세하게 말한 적이 있다.

군자는 뺏고 빼앗기 위해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 (君子無所爭.)

하지만 반드시 활쏘기에서만큼 경쟁하구나! (必也射乎!)

차례가 되면 사우(射友)끼리 서로 인사를 하고

상대에게 먼저 오르기를 권하며 양보하다 사대에 오른다. (揖讓而升,)

활을 다 쏘고서 승패가 갈리면

사대에서 내려와 진 쪽이 벌주를 마신다. (下而飮.)

이러한 아름다운 경쟁이야말로 군자다운 것이리라. (其爭也君子.) ―<논어> 팔일(八佾)편 7장

보통 시합을 하고 나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자신의 패배를 변명하는 경우가 많다. 컨디션이 나쁘다느니 자기 차례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느니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댄다. <중용(中庸)>을 보면 “활쏘기에서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失諸正鵠, 反求諸其身.)”고 쓰여 있다.

사대에 올라 활을 시위에 메기고서 먼저 몸의 중심을 잡고 이어서 호흡을 고르고 과녁까지 거리를 가늠한 뒤 활을 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활을 쏘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활을 쏘는 사람은 바람의 세기를 고려해서 활이 날아갈 방향을 정하는 등 변하는 상황에 맞게끔 대응을 해야 한다.

활쏘기의 승패는 활쏘기 전의 자기 관리, 활을 쏠 때의 정확한 판단에 따른 결과이다. 이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패배의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한다면 다음에는 지금보다 나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 이처럼 평소의 자기 관리에서부터 벌주에 이르는 활쏘기 시합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잘잘못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공정하고 아름다운 경쟁을 몸에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 황학정에서 활 쏘는 모습.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등만을 기억하는 사회

올림픽과 같은 세계 경기를 시청하다보면 아주 대조적인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결승전에서 패해 아쉽게 2등을 하게 될 때 어떤 선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며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라는 말을 하고, 어떤 선수는 아쉽지만 2등 자체도 훌륭한 결과라며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10년 전만 해도 2등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유형이 많았다. 이와 달리 유럽 지역의 선수들은 2위만이 아니라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면 패배의 고통보다 선전의 기쁨을 자연스럽게 표출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과정보다는 결과, 동기보다는 성적,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앞세우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심판이 볼 수 없는 위치에서 묘하게 반칙해서 골을 넣어서 시합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경우를 생각해보라. 결과의 영광만을 따진다면 승리를 만끽할 수 있겠지만 과정의 정당성을 생각하면 깨끗한 승리라고 할 수 없다. 이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기기만 해!”라며 결과만을 강조하는 환경에서 자란다면, 1등을 하지 못한 어떠한 결과는 제 노릇을 하지 못한 치욕일 뿐이다. 그러니 ‘영광스런 2등’, ‘자랑스런 3등’, ‘감동을 주는 꼴등’이라는 표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일 뿐이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여자 복싱에서 한 선수가 판정에 불만을 품고 3위의 메달을 받기를 거부했다. 그 선수는 시상식에 메달을 받은 뒤 메달을 시상대에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이 선수의 행동이 워낙 돌출적이고 특출해서 주목을 받았지만 과거에 이와 비슷한 언행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시상식에서 안도의 눈물이 아니라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들지 못하는 선수도 메달을 거부하는 선수에 뒤지지 않는다.

근래에 우리나라 선수들도 2등만이 아니라 순위에 들지 못해도 최선을 다한 뒤에 결과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다음에 선전을 다짐하는 유형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도 물론 1위라는 최상의 성적을 바란다. 하지만 1위만이 그간에 흘린 땀방울의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기량을 확인하고, 자신의 경기에 환호하던 관중의 응원을 맛보고, 멋진 무대에서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실력을 겨룬 것만 아니라 미래의 자신을 새롭게 만나려고 예비하는 것도 훌륭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동기와 개성의 존중

일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을 살기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일등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쉽지 않는 삶의 자명한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세상이 아직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예컨대 모든 학생이 과외를 그만두면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과외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아이가 과외를 그만두지 않으면 우리만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모두 끔찍한 학습 경쟁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서로를 믿지 못해서 일어난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지 못해서 생겨나기도 한다. 아울러 ‘자신의 아이가 언젠가 일등이 될 수 있다’는 무한한 신뢰는 지금의 관성적인 대응을 그만두지 못하게 만든다. 이처럼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가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성찰하지 않는 한, 공자가 말한 ‘아름다운 경쟁’이 어렵다.

아름다운 경쟁을 하려면 우리는 결국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문법이 적용되는 삶을 기획해야 한다. 공자의 말에서 모든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실마리를 캐낼 수 있다. “위력부동과(爲力不同科)”에서 ‘과’에 주목할 만하다. 이 ‘과(科)’는 원래 활 쏘는 사람의 힘을 가리킨다. 이 힘은 체력, 악력, 기력, 근력 등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오늘날의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과’는 가치관, 우선순위, 관심사, 행복, 동기, 개성 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꽃을 가꾸는 데에서 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음식을 요리하면서 최상의 희열을 느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끝나지 않은 실험의 결과를 끈덕지게 기다리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영어’, ‘수능’ 등의 성적처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서 이들을 한 줄로 세운다면, 그들 중에 어떤 이는 행복을 느끼겠지만 다른 이는 불행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공자가 힘의 차이에 따라 개인이 자신의 방식으로 제 기량을 키우는 차이를 인정했던 바탕에서 새로운 문법을 만드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이때 행복에 이르는 한 가지만의 길이 아니라 만 가지의 길이 열려 있는 세상이 시작될 수 있다. “사부주피(射不主皮)”는 만 가지의 행복을 부르는 노래의 가사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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