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다문궐의(多聞闕疑) - 많이 듣고 의심되면 비워 둔다

라라와복래 2015. 9. 5. 21:05

[논어 명언명구]

다문궐의(多聞闕疑)

많이 듣고 의심되면 비워 둔다

의심 없는 확증은 맹종을 낳는다.

의심을 거친 믿음은 진리에 이른다.

 

기자가 기사를 쓰다가 머뭇거리고 경찰이 수사를 하다가 주저하며 학자가 논문을 쓰다가 한참 글을 잇지 못할 때 공통점이 있다. 사실 관계가 확실하지 않으니 하던 일을 계속 진행할 수 없는 것이다. 확실성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부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서 주장을 펼치고 결정을 내린다면, 자신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억울한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

사실을 찾으려고 하면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더욱이 두 사람이 사실을 두고 다툴 때 제3자가 이를 판정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자는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기다리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 기다림은 시간 안에 판정을 못하는 무능의 표현이 아니라 엄중한 사실의 권위를 세우는 작업이다.

<논어> 위정(爲政)편 18장

— 34번째 원문

자장이 공자에게 관직 생활을 하는 자세를 배우고 있었다.

공자가 일러주었다.

“먼저 여러 소리를 들어보고서,

그중에 미심쩍은 것은 옆에 제쳐두고

그 나머지를 아주 조심스레 말하라.

그렇게 하면 잘못을 덜 하리라.

여러 가지를 찾아보고서,

그중에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옆에 제쳐두고

그 나머지를 매우 조심스레 실행하라.

그렇게 하면 뉘우치는 일을 덜 하리라.

말에서 잘못을 덜 하고 실행에서 뉘우치기를 덜 하면

안정된 관직 생활이 그 가운데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干 : 간(干)은 구하다, 찾다의 뜻이다.

祿 : 녹(祿)은 녹봉을 뜻하지만 오늘날 쓰이지 않는다. 월급, 연봉 등 급여의 뜻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좋다.

闕 : 궐(闕)은 보통 대궐, 문의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 빼다, 빠뜨리다의 타동사로 쓰인다.

愼 : 신(愼)은 삼가다, 이루다, 진실로의 뜻이다.

餘 : 여(餘)는 남다, 넉넉하다, 여유가 있다, 나머지의 뜻이다.

尤 : 우(尤)는 부사로 더욱, 특히의 뜻으로 쓰이고, 명사로 탓, 허물, 재앙의 뜻으로 쓰인다.

殆 : 태(殆)는 위태하다. 해치다의 뜻이다.

悔 : 회(悔)는 뉘우치다, 안타깝게, 뉘우침의 뜻이다.

寡 : 과(寡)는 적다는 뜻이다. 사극에서 왕이 스스로 ‘과인(寡人)’으로 부를 때 쓰이는데, 과인은 덕이 적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자신을 낮추는 뜻이다.

합리적 의심

믿음과 의심은 같은 하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사이가 나쁠 것 같다. 의심은 믿음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믿음은 일말의 의심이 일어나지 않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하나의 믿음 체계만이 가능하다면 믿음과 의심의 원수 관계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믿음 체계는 역사와 시대의 조건과 더불어 변화한다. 믿음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믿음은 자신의 전체 중 일부를 의심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의심으로 인해 믿음 체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새로운 믿음 체계가 싹이 틀 수 있는 가능성과 영토를 가지게 된다. 이때 믿음과 의심은 원수가 아니라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 체계가 확고하게 서 있을 때 믿음은 의심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만큼 자신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믿음 체계가 변화할 때 믿음은 의심을 단호하게 수용하는 만큼 새로운 틀을 갖출 수 있다. 따라서 의심은 불순한 동기와 결합되는 음모와 다르다. 의심은 믿음 체계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얼룩을 떼어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독단을 파헤치기 위해 근거를 요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합리적 의심’이라 부를 만하다.

합리적 의심은 형사소송법에서 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명백한 사실에 바탕을 둔 의심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경찰이 의심할 만한 징후가 있을 때 거리에서 사람의 신분증을 요구하고 자동차를 멈춰 트렁크를 열어 본다. 이 과정도 경찰의 합리적 의식(reasonable suspicion)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면 공자의 합리적 의심은 어떤 주장을 사실로 믿게 할 수 있는 물질적 증거만이 아니라 언어적 논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의심은 상대의 파멸을 의도하는 적대적 공격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합리적 의심이 남아 있는 한 믿음은 믿음일 수가 없고, 그 믿음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행위를 할 수가 없다.

공자는 자장으로부터 관직 생활을 하는 자세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 제일 먼저 합리적 의심을 강조했다. 공직은 한 번 결정이 내려지면 그에 따라 대민 업무가 시작된다. 특히 한 번의 정책적 결정으로 연관되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경우 합리적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일을 추진하면 엄청난 후과를 불러들이게 된다. 예컨대 연말정산, 공무원연금 등의 개정을 두고 면밀한 검토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계획을 발표했다가 후폭풍이 일어나 방침이 재론되기도 했다. ‘궐의(闕疑)’와 ‘궐태(闕殆)’의 합리적 의심을 한다면 하나의 정책이 논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명(正名)

합리적 의심이 철저하게 해명되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판단을 유보하는 문제를 결정하고 미루어 두었던 일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공자는 합리적 의심, 즉 궐의(闕疑)와 궐태(闕殆) 이후에 정명(正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명(正名)의 중요성을 밝히면서 공자는 제자 자로와 얼굴을 붉히는 설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논쟁의 발단은 위(衛)나라의 정국을 어떻게 수습하느냐라는 방법에 있었다. 위나라 영공(靈公)은 남자(南子)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 남자는 자유연애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했다. 태자 괴외(蒯聵)는 평소 이런 어머니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기회를 엿봐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다가 오히려 발각되자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났다.

영공이 죽자 위나라는 공자 영(郢)을 왕의 자리를 잇고자 했지만 그가 고사하여 영공의 손자 또는 괴외의 아들 출공 첩(輒)이 왕이 되었다. 괴외는 조국 위나라로 돌아와 왕위를 잇고자 했지만 이미 아들이 왕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왕의 자리를 둘러싼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춘추시대에는 위나라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위나라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자 학교에서도 누가 영공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옳은가를 두고 공자와 제자, 또 제자들끼리 날카로운 토론이 벌어졌다. 그 중 한 차례가 바로 공자와 자로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이다.

자로는 결과적으로 현재의 출공 첩이 정당하다고 보아 괴외의 위나라 진입 시도를 막아야 한다고 보았다. 공자는 현실적으로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가보다 원론적으로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일단 아버지와 자식이 왕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나아가 누가 왕이 되는 것이 합당한지 논의할 수 있는데 그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상대를 제거하려고 나서는 것도 문제이다.

이렇게 위나라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보니 서로 불만을 터뜨렸다. 공자가 위나라의 문제를 푸는 해법으로 ‘정명(正名)’을 제시하자 자로는 공자더러 “세상 물정에 어둡다(迂)”라고 평했다. 자로가 현실의 두 세력 중 한쪽의 편을 들자고 말하자 공자는 자로더러 “무식하다(野)”고 평했다.(<논어> ‘자로’편 3장)

<논어>의 ‘안연’편 11장을 보면 공자는 정명을 한층 더 구체화시켜서 표현했다.

군주(지도자)는 군주답게,

신하(전문가)는 신하답게,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굴어야 한다.

(君君臣臣父父子子)

군신부자(君臣父子)는 역할에 해당되는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면서 그 역할에 맞게 처신해야 하는 기준을 가리킨다. 군주라면 군주의 자리에 어울리는 공적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 된다. 바로 여기서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가 나온다. 군주가 군주 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면 신하가 군주더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간언하고, 그래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군주를 바꾸는 역성혁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명(正名)과 역성혁명을 하려면 한 점의 궐의(闕疑)와 궐태(闕殆)가 있어서는 안 된다. 사태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역성혁명을 부르짖는다면, 그것은 개인의 권력욕일 뿐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공통의 명분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위나라의 문제를 푸는 해법으로 ‘정명(正名)’을 제시하고, <논어> ‘안연’편 11장에서 정명을 한층 더 구체화시켜서 표현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가 바로 그것이다.

“끝까지 파헤쳐라!”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출근과 등교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보통 사고는 다리가 무너지면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고는 다리를 지을 때부터 일어난 것이다. 다리 건설은 교통량과 하중 등을 고려하여 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다리가 무너지지 않더라도 언젠가 다리가 무너지리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바로 이때 누군가가 “다문궐의(多聞闕疑)”와 “다문궐태(多聞闕殆)”를 했더라면 성수대교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게 지으면 다리가 견딜 수 있을까?”라며 작업을 중단하고 하중을 다시 계산해보고, 미심쩍으면 설계회사 관계자를 불러서 확인하는 절차를 겪으며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냈더라면 다른 방식으로 다리를 지을 것이다. 그러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공사 기간과 예산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안전을 우선시하는 사고를 한다면 성수대교의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며 “빨리빨리 하지 않고 뭐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문제의 가능성이 있다면 “잠시만요. 이것 한 번 더 따져보고 합시다!”라고 말하고, 그 “잠시만”이 존중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다문궐의(多聞闕疑)”와 “다문궐태(多聞闕殆)”의 합리적 의심을 인정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공자 이후에도 궐의(闕疑)와 궐태(闕殆)를 넘어설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했다. 묵자는 ‘삼표(三表)’를 거쳐야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삼표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실행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구체화되었다.(<묵자> ‘비명(非命)’ 상)

순자도 이론이 이론으로서 성립하려면 하나의 조건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어떤 이론을 가지려면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하고, 어떤 주장을 펼치려면 반드시 이치에 닿아야 한다(持之有故, 言之成理)”라는 테제를 제시했다.(<순자> ‘비십이자(非十二子)’편) 묵자와 순자의 주장은 공자가 제기했던 궐의(闕疑)와 궐태(闕殆)의 상황을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즉 공자가 합리적 의심을 중시하고 묵자와 순자가 객관적 기준을 강조했다.

한(漢) 제국이 등장하면서 공자는 여러 선생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 선생 중의 선생이 되었다. 공자의 말은 모두 믿고 받들어야 하는 경전처럼 되었다. 후한의 왕충(王充, 27-104)은 점점 학문의 권력화, 신비화의 대상이 되어 가는 공자와 그의 말을 의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왕충은 시대의 “모든 논의를 저울질하겠다”는 뜻의 <논형(論衡)>이란 책을 짓고 그 안에 “공자에게 묻는다”라는 ‘문공(問孔)’편을 썼다. 사실 왕충은 형식상 공자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자의 정신을 살리고자 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왕충(王充)

“세상의 유학자들은 스승을 믿고 옛것을 옳게 여기길 좋아한다. 성현이 한 말은 모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 오로지 배우고 익히려고 할 뿐 따지고 물을 줄 모른다. 성현이 붓을 움직여서 글을 지을 때 마음 씀씀이가 아무리 세세해도 아직 모두 사실과 들어맞는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급하게 쏟아낸 말이 어찌 모두 옳다고 하겠는가? 모두 옳지 않은데도 당시 사람들은 따질 줄 몰랐다. 옳다고 하더라도 뜻이 분명하지 않는데도 당시 사람들은 물을 줄 몰랐다. 생각해보면 성현의 말에는 위아래가 서로 어긋난 곳이 많고, 문장도 앞뒤가 서로 모순되는 곳이 많은데도 세상의 학자들은 그걸 모른다.”

“배우고 묻는 길은 재능에 있지 않다. 어려움은 스승과 거리를 두고서 도의를 사실대로 밝히고 시비를 논증하는 데에 있다. 묻고 따지는 길은 반드시 성인과 마주하거나 살았을 적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성현의 이야기를 풀이해서 사람을 가르칠 때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대로 일러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밝게 이해되지 않는 물음이 있으면 공자에게 따져 묻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도의를 다치게 하겠는가? 진실로 성현의 학업을 전할 지혜가 있다면 공자의 말을 비판하더라도 어찌 이치에 거슬리겠는가?”

왕충의 말은 공자의 “다문궐의(多聞闕疑)”와 “다문궐태(多聞闕殆)”를 가장 잘 풀이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의혹이 든다면, 그 대상이 경전일지라도 공자라고 할지라도 주눅 들지 않고 근거와 이유를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왕충은 의심이 가는 모든 것에 대해 끝까지 근거를 밝혀야 한다는 자세를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세를 다음으로 표현했다.

“바로 파악되지 않으면 마땅히 물어서 밝히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마땅히 따져서 끝까지 파헤쳐라!”

(不能輒形, 宜問以發之. 不能盡解, 宜難以極之.)

우리는 정답을 외우는 교육에 너무 익숙해서 정답이 왜 정답인지 묻는 자세를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사실 모든 앎은 물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이가 “이게 뭐야?”에서 시작해서 주위를 조금씩 알아 간다. 우리는 아이가 즐겨 던지던 “이게 뭐야?”라는 질문을 잊고 “지금 뭐해?”라며 질문을 생략하는 관행에 익숙해지고 있다. 공자와 왕충처럼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끝까지 파헤치는 정신을 가진다면, 성수대교의 붕괴 사건과 같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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