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6) 유수원과 박제가의 국부론

라라와복래 2015. 9. 5. 21:27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유수원과 박제가의 국부론

가난한 나라 조선을 바꾸자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본다.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기획: 실학박물관

단원 김홍도의 논갈이(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은 왜 가난한가

조선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사회였기 때문에 논밭에서 일한 만큼, 땀 흘린 만큼 대가를 받는 것만이 정당한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업은 생산자가 생산한 상품을 유통의 과정을 거쳐서 소비자에게 파는 과정에 이윤을 붙이고 파는 구조여서 이들 상인이 얻는 이익은 모두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농부가 땀 흘린 만큼의 대가보다 훨씬 많은 이윤을 챙긴다고 본 것이다. 정당한 이윤이 아니라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공업과 유통이 발달하지 못해서 상품의 지역 편중성이 심해서 어느 곳에서는 썩어 넘쳐나는 물건임에도 어느 곳에서는 너무나 귀해서 구하기 힘든 상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권력자들은 권력과 돈을 움직여 유통되지 않은 상품을 가져다 생산지와 먼 곳에 팔거나, 많이 나오는 계절에 상품을 쌓아 두었다가 값이 비쌀 때 내다 파는 방식으로 부정한 이익만을 꾀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상인이나 부자가 이익을 챙기는 것은 사기이고 도둑심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조선은 초기부터 외국과의 무역을 차단했다. 중국과 일본 등과의 외교관계는 유지했지만 사신단이 오고가면서 극도의 제한된 일부의 통상만 이루어졌다. 국내 상공업의 미비와 국제무역의 부재는 더욱더 상품의 부재 혹은 편재 현상을 가져왔다. 생산품이 유통되지 않아서 도로나 교통, 수송 수단 또한 미비했고, 고대부터 존재했던 수레도 사용이 제한되거나 수레바퀴 등의 제작 기술 발전이 일어나지 않아 물자의 이동이 더욱 어려웠다. 따라서 운송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백성들이 거주하는 집에도 현재처럼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거나 작은 가구 정도만 두고 살았던 이유도 큰 가구를 제작하기 위한 나무 등의 원자재나 큰 완성품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공업을 천시하는 조선의 분위기 속에서 상공업자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양반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다. 돈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돈으로 족보를 사서 양반에 속해보려 했다. 그리고 양반이 되면 일을 하지 않았다. 혹시 여의치 않더라도 상공업자가 아닌 농민으로 남아 있으려 했다. 조선후기 대부분의 양반들은 놀고먹는 족속이라고, 나라의 큰 좀이라고 비난 받고 있었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양반입네 하고 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하는 자체를 신분과 결부시켜서 생각했다. 이런 현상이 조선후기까지 거듭되어 조선은 가난했다. 국가 재정은 열악했고, 군대는 유지가 힘들었다. 18세기가 된 후 서구에서는 근대 자본주의가 확산되고 산업혁명까지 일어나면서 조선과의 격차는 계속 벌어지게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에 침략당할 수도 있는 위험도 증가했다.

유수원과 박제가는 가장 혁신적인 개혁의 상업 진흥 방안을 내놓았다. 유수원과 박제가의 국부론의 출발점은 왜 조선이 가난한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유수원은 사농공상이라는 기본적인 직업에 신분제가 덧씌워진 생각을 바꿔 놓는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조선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직업인 사, 농, 공, 상의 사민에 대하여 직업으로서 적절히 분화하여 균형을 갖추고 그 전문성을 가져야만 나라가 부유해질 수 있다고 했다. 즉, 사, 농, 공, 상의 사민이 제각기 자신의 신분을 하나의 직업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나아가 사대부, 농민, 공인, 상인이란 직업을 전문적인 수준으로 만들어 각자의 생산을 담당해야 국가의 재정도 확보하고 군대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박제가는 놀고먹는 양반들에게 상업을 장려하여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서 놀고먹는 폐단을 없애자고 하면서 국제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786년 정조에게 정책 건의안을 제출하면서 “우리나라의 큰 병폐는 가난입니다. 조선 건국 이래 400년 동안 해로 통상을 위해 다른 나라로 배 한 척도 가지 않았습니다.”라고 지적했다.

18세기 조선이 당면한 과제는 국부의 증진이었다. ‘산업생산력을 어떻게 높여야 하는가, 산업을 어떻게 재편하는가, 그것을 위해 국가와 국민은 어떤 정책과 어떤 마인드의 변화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가장 혁신적인 전략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유수원과 박제가이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저술했다. 유수원과 박제가가 추진하고자 제안했던 백성을 부유하게,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방안은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경제학은 … 인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사상과 통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시장의 모습. 조선시대는 상공업과 유통이 발달하지 못했다.

유수원과 박제가는 어떤 사람인가?

임진왜란 이후 상품유통경제가 발달하고 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이런 변화에 대한 두 가지 기조가 있었다. 상업 발달에 의한 사회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고 농업 중심으로 재편하자는 농업중심론의 개혁안과 상공업과 무역을 살리자는 상업진흥론이 있었다. 특히 상업 진흥에 의한 국부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유수원과 박제가가 대표적이다.

유수원(1694-1755)은 본관은 문화이고 호는 농암이다. 아버지는 유봉정이고 어머니는 김징의 딸이다.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아버지가 사망하여 서울에서 벼슬하던 친척의 집에서 자랐다. 1718년(숙종 44) 유수원이 25세 때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의 집안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숙종 말년부터 경종과 영조의 소론과 노론의 부침 속에서 벼슬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특히 신임사화 중 1722년 임인년의 노론 4대신을 처형했던 사건의 주모자로 작은 아버지인 유봉휘가 노론에 의해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30대 시절에 심한 병으로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농암’이란 호를 쓰게 되었다. 이후 더욱 연구와 저술에 심취하면서 『우서』라는 혁신적인 부국론을 담은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1737년(영조 13)에 이광좌, 박문수, 이종성 등이 참석한 인재를 천거하는 자리에서 이종성이 유수원은 국가의 제도연혁에 능통하다고 추천했고, 그가 저술한 『우서』도 영조에게 소개되었다. 1741년에는 조현명이 추천하여 유수원은 비변사의 문랑이 되었고, 그가 올린 관제 개편안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1755년 나주괘서사건과 사건 처리 후 시행된 과거시험에서 반란을 예고한 글이 나타나면서 소론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고, 유수원은 대역부도(大逆不道)라는 죄목으로 사형되었다.

『우서』는 중국 사마광의 『우서』처럼 문답체로 씌어져 있다. 그러나 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서론 6개 항목, 69개의 본론, 2개 항목의 결론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이 가난하게 된 원인에서부터 사민의 직업 분화 및 전문화, 국가 주도의 강력한 상업 정책 및 상공업 발전 등을 주장했다. 처형된 사람의 저서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박제가(1750-1805)는 본관이 밀양이고 호는 초정, 정유, 위항도인이다.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778년부터 모두 네 차례 중국에 다녀왔고, 규장각 검서관 등을 거쳤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유배를 갔다가 1805년 풀려난 뒤에 사망했다.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출신들이 주동이 되어 ‘백탑시파’가 결성되었고 이후 박지원, 정철조, 백동수, 이서구, 서상수, 유금 등이 모임을 계속했다. 이들의 작품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이들의 시집이 『한객건연집』이란 제목으로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박제가의 연행 경험은 『북학의』로 모아졌다. 『북학의』는 박제가가 첫 번째 북경을 다녀온 뒤 석 달 만에 저술했다가 이후 보완되었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즐겨하다가 ‘경제’라는 학문을 좋아하게 되었고 중국의 경험으로 그의 혁신적인 생각이 더욱 확대되어 『북학의』에 담겼다. 이 책에서는 당시 조선의 근본 문제가 가난이라고 보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으로 국제무역을 통한 소비의 확대로 국내 상업을 발전시키고 외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국부를 이루는 방안을 제시했다.

김홍도의 규장각도(부분). 정조는 검서관 제도를 통해 서얼 신분의 인재들을 등용했다. 이들은 연암 박지원의 제자들이었다.

부자에 대한 생각

조선후기에는 상업이 점차 발달하고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이들은 상품의 유통이나 판매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존에 이윤 추구 자체를 죄악시하던 인식도 점차 바뀌어 갔다.

유수원은 일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 즉 부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하고 사리사욕을 챙기는 행위를 비롯하여, 당시 양반들이 생계를 꾸리면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비도덕적으로 이익과 부를 축적하는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에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노력을 들여서 부를 축적하고 사회에 대한 기여를 담당하는 이윤 추구는 옳다고 보았다. 이런 의식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정당하게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부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즉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고용되고 사역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고 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면 오히려 부자들의 횡포나 갑질을 그대로 용인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수원이 말하는 부자는 정당한 노력으로 부를 축적함과 동시에 사회적 기여를 담당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부자는 가난한 국가가 못하는 도로나 다리, 저수지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을 많이 가진 부자나 상인이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늘리기 위해 상품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원활히 하려고 이런 사회간접자본을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만든 저수지나 도리, 다리를 통해서 교역이 활발해지고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것이고 부자들은 또 다시 다리 등에 투자해서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국가에 대상인이나 수공업자로 등록된 사람인만큼 국가는 이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도 튼튼해질 것이라는 논리였다.

따라서 유수원이 말하는 부자는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 되, 요즘처럼 사회에 재산을 환원하는 것처럼 국가나 국민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고 기여해야만 부자라고 한 것이다. 사리사욕, 영리를 추구하는 것을 긍정한다는 측면에서 부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요즘의 개념으로 본다면 의무가 너무 과중한 부자, 이익 추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인 개념이 너무 과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유교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의 부자를 옹호하는 발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부자라면 기본예절이 있고, 상식적인 도를 지키며 명예를 중시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유수원이 그리고 있는 부자는 대자본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양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었는데, 자신의 직업을 대물림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서 자식의 교육도 같은 선상에서 말하고 있다. 즉 지방에 스스로 학교를 지어서 지역의 교육사업에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고, 도로나 저수지 같은 간접자본에서도 자신의 재산 확대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생활을 편의를 도모할 수 있게 하고, 지역의 가난한 자들을 자신의 사업에 고용을 하는 등의 교육을 시키는 방식으로 돕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런 유수원의 부자 개념은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말하는 도덕사회와 상당히 닮은 점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지만 남과의 공감을 잃지 않는 사회가 도덕사회이며, 이기심을 인정하지만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에 사회적 이익이 증진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기본적인 생각 위에 『국부론』을 전개한 것인데, 유수원도 조선의 부자에게도 이익 추구를 인정하되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국가와 백성 전체가 이득을 보는 구조 속에서의 부자를 말한 것이었다. 또 국가에서도 이익을 적극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강력한 국가권력으로 어염과 같은 자원을 국가가 운영하여 이익을 내서 재정에 충당하고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균등하게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착장(전남 신안군). 유수원이 말하는 부자는 가난한 국가를 대신하여 사회간접자본을 부담해야 하는 사람이다.

생산력을 증진하려면?

조선에서는 상업이 발달하면 생산량이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농부들이 힘들여 일하지만 그 이익이 적은 데 비해 상인들은 생산된 상품을 유통시켜서 소비자와 연결시켜주는 정도의 일을 하면서 그 이익은 터무니없이 많다고 본 것이다. 베짱이처럼 놀다가 잠깐씩 일하는데 농부들보다도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했다. 또 상업이 발달하면 이렇게 이익을 많이 보는 상업 쪽으로 종사자가 늘어나게 되어 상대적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농업이 축소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국가가 생산력을 늘리는 방법은 상인을 최소화하고 농민을 최대로 늘리는 것이었다. 국가는 사치를 금지하고 최대한 검약해서 생산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절약이 미덕이고 소비는 나쁜 것이었다.

상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주장한 유수원도 검약과 불필요한 소비를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관념에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이 바로 박제가이다. 박제가는 오늘날 우리가 들어도 놀랄 만한 혁신적인 주장을 폈다.

“중국이 사치로 망한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해 쇠퇴할 것이다. 물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지 않는 것을 검소함이라고 하지, 자기에게 없는 물건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을 일컫지는 않는다. 재물은 우물과 같다. 퍼 쓸수록 자꾸 가득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 그릇이 비뚤어지는 것을 개의하지 않으므로 교묘함을 일삼지 않아, 나라에 공장과 질그릇 굽는 곳, 대장간이 없어 기예도 사라졌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북경에서 본 사치품에 대해서 이제 중국이 망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필요 없는 물건을 만들어 비싼 값에 거래하는 것 자체가 중국이 망해 가는 징조로 본 것이다. 그러나 박제가는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이 검소라는 개념 때문에 물건을 생산하지도 않고 내게 없는 물건에 대해서도 검소하다는 핑계로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 그 물건을 만드는 것조차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우리나라가 가난해서 그 물건을 쓰지 못하는 것이지 단지 검소하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가난과 검소를 구분했다. 따라서 박제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명제인 ‘재물은 우물과 같다’라는 생각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 생산된 물건조차도 그저 그 물건이 있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그 물건이 찌그러졌는지 기능이 부족한지 등을 상관하지 않았다. 따라서 생산 기술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박제가는 이렇게 소비는 나쁜 것이 아니라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 있던 각종 골동품과 서화, 사치품은 필요 없는 물건이 아니라 높은 문화 수준이 반영된 물건이었고, 당시 과학기술의 집약체였다. 또 고가치 상품이었던 만큼 가격도 비쌌다. 따라서 이런 사치품의 수요 증가는 더 많은 과학기술의 접목을 필요로 했고, 생산 경쟁이 일어나서 생산 기술 또한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박제가는 이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상품 유통에 중요한 수단에 대해서도 박제가는 중국의 선진기술을 배워서 배와 수레를 개선하고 도로와 다리를 정비하자고 주장했다. 특히 수레의 이용을 강조했다. 수레가 다니기 시작하면 길은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하면서 이런 유통수단의 확대는 생산을 확대시켜 물가를 안정시키고 시장을 통합시켜서 결국 소비자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유수원도 유통, 운송, 교통의 개선이 물가를 안정시키고 상품의 고른 판매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이런 수레의 제작이나 도로 교량의 정비는 대상인이 주도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마포나루 황포돛배 재현. 조선 시대 새우젓과 소금을 싣고 나루를 오가던 모습

국가의 강력한 상업 관리가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유수원의 상업 발전 전략은 사농공상의 사민이 각기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이어가며 전문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국가가 주도하여 이들 상공인들을 등록, 관리하고 상인자본을 육성해서 상업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반도 당연히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면 염업의 경우, 국가가 자본을 대어서 소금을 직접 제조, 생산하고 이를 대상인에게만 판매해서, 대상인이 수레나 배를 통해 도시로 옮겨 놓으면 소상인이 이를 넘겨받아서 각각의 촌락에 판매하도록 했다. 이렇게 국가가 소금산업을 관리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세를 공평하게 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국가의 엄격한 관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호적법을 엄격하게 시행하여 세원을 철저히 파악하는 것이 세금을 균등하게 거두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상인자본의 축적도 국가가 강력하게 상인들을 관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상인을 모두 등록하고, 대자본의 대상인을 위주의 점포를 개설함으로써 더욱 많은 상품의 유통, 매매를 통해 대규모의 이윤을 남기도록 했다. 소상인과 행상 등은 이들 점포에 소속되어 활동함으로써 상질서가 유지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모은 상인 자본은 자연히 국부의 증진으로 국가 재정의 충분한 확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전업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영위함으로써 생산을 늘리고 생산된 물자를 원활하게 유통하여 공급할 때 시장은 활성화된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민간 주도의 국제무역으로 상업을 발전시키자

박제가의 상업 진흥 전략은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한 소비시장을 확대하여 생산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국부를 증진시키자는 것이다.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민간의 국제무역이 차단되어 있어서 조선 밖의 견문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단순히 수입 물자에 대한 무지뿐만 아니라 고급문화, 선진문화에 대한 식견도 없었다.

박제가는 국내 상품의 지역별 편중을 해소할 도로개발 및 운송수단을 적극적으로 개량하여 국내 시장을 통합하고, 외국 시장과의 원활한 연결로 소비시장을 더욱 확대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런 소비의 확대는 생산을 자극하여 생산량 확대가 가능하다. 수요가 증가할수록 생산량도 증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생산단계는 더욱 분업화 및 정교화되며, 생산에서의 경쟁은 기술 개발을 가져오고 원료나 부품의 표준화를 추진하면 생산량의 획기적인 증가가 가능하다고 했다.

박제가의 이런 구상은 아래의 시(「효좌서회(曉坐書懷)」)로 집약될 수 있다.

육로로 재화가 연경과 통하지 않고 陸貨不通燕

바다 상인은 일본 땅을 넘나들지 못하네. 海賈不輸倭

비유하자면 들판의 우물이 있는데, 譬如野中井

물 긷지 않아 저절로 말라버리는 격. 不汲將自渴

민생안정의 여부는 보물에 달려 있지 않으니 安貧不在寶

경제생활의 방도가 날로 힘들어짐을 걱정하노라. 生理恐日拙

지나치게 검소하면 인민이 즐거워 않고 太儉民不樂

지나치게 가난하면 도둑이 많아진다네. 太窶民多竊

나라가 가난한 것은 무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국내 유통도 부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물물을 긷지 못한 것처럼 부의 속성을 활용하지 못한 탓이다. 백성들이 부유해지는 것은 각 집마다 보물을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고 경제생활을 제대로 영위하느냐에 딸린 문제이다. 조선에서 지나치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여 백성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또 지나치게 가난해서 도둑이 늘어나는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이것이 박제가의 핵심적 경제사상이고 상업 진흥 전략이다. 백성들의 소비수준을 기본 가치로 삼아서 백성의 행복한 정도를 표현하고 있다.

박제가는 상업 발전을 위해서 운송수단을 적극적으로 개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대의 반응과 결론

가장 혁신적인 상업 진흥책을 제시했지만 유수원과 박제가의 제안 모두 실제의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당대의 반응을 보면 모두 이상한 주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고 하고 있다.

유수원의 제안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유수원의 글을 보고 놀라고 이상히 여겨서 수군거리다가 떼를 지어서 비난한다. ‘저 사람이 이 책을 써서 뭐하려는 거지? 이걸 시행해서 나라를 운영해보겠다는 건가!’

박제가는 중국에서 보고 느낀 것을 말해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말을 들어주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이 과거의 중국이 아니라고 하면서 되놈의 중국이라고 심하게 비난하고 비웃고 무시했다. 청을 배우고 청의 장점을 아무리 설명해도 비웃을 뿐이고 망발을 한다며 대꾸하지도 않아서 이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유수원과 박제가는 각각 영조와 정조 시대를 살았다. 또 각각 영조와 정조를 만나보고 개혁안도 제시한 경험이 있다. 영조는 유수원에게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저술이어서 참으로 귀한 책이다’라고 했고, 정조는 박제가에게 비답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당대가 처절한 성찰로 가난한 조선을 부강한 국민,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보고자 시도했던 개혁안은 신분제적인 인식, 직업에 대한 차별 등과 같은 상업 중심의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고, 국제무역 미비, 선진 기술과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유수원과 박제가의 혁신적인 개혁안은 그야말로 시안으로 남게 된 것이다.

노혜경 (덕성여자대학교 연구교수) 역사연구가로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 취득한 뒤 UCLA Postdoctoral Scholar 과정을 거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실학박물원 학예사 등을 역임했다. 조선후기 역사 변동 요인을 추적하고, 현대 우리사회의 여러 인식의 근원을 조선시대 사례에서 탐구하며, 역사와 경영을 접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역사>한국사>조선역사 201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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