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화가와 모델 -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

라라와복래 2015. 8. 17. 07:42

화가와 모델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

잔 에뷔테른은 부모의 아파트에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파리의 낭만적인 정취는 여전했지만, 거기서는 아무런 삶의 의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의 상실에 괴로워하며 평생을 지낼 것을 생각하니 그저 아득했다. 지난 3년이 꿈만 같았고 앞으로 펼쳐 갈 시간들이 악몽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이름으로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했지만 낙원은 언제나 그랬듯 저 멀리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웅크리고 앉아 화석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저 희미한 연옥에라도 모딜리아니가 있다면 그곳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창턱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발아래 그녀를 지지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중력에 몸을 맡겼고 곧 대지를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거리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잔은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뱃속에 든 8개월 된 아기와 함께. ▶잔 에뷔테른의 초상사진. 잔의 사진을 보면 무엇보다 강렬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짧은 사랑, 진한 여운

기다란 인물상으로 유명한 화가 모딜리아니와 그녀의 아내이자 모델이었던 잔 에뷔테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연가(戀歌) 중 하나다. 3년여의 세월 동안 모딜리아니와 잔은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에 크게 기뻐하고 아파했다. 그 사이에 20여 점에 이르는 잔의 초상화를 함께 만들며 고결한 미적 승화를 이뤄냈다. 병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던 모딜리아니의 요절로 그 짧은 사랑은 마침내 포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랑의 자취는 우리에게 여전히 진한 잔상으로 또 여운으로 남아 있다.

위대한 피를 이은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가 상큼하고 아리따운 미술학도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 1898-1920)을 처음 만난 것은 1916년 말의 일이다. 당시 잔은 그랑드 쇼미에르에 있는 콜라로시 아카데미(Academie Colarossi)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는데, 모딜리아니가 살던 누추한 아틀리에 역시 그랑드 쇼미에르에 자리하고 있었다. ▶모딜리아니의 초상사진. 모딜리아니는 타고난 미남이었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잔은 자유분방한 학교 친구들 덕에 라 로통드(La Rotonde)라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곤 했다. 보헤미안들로 시끌벅적한 그곳에서 잔은 늘 다소곳한 웃음과 신비스런 침묵으로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가 모딜리아니의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깊은 사랑의 심연으로 빠져든 것은 그저 운명이었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사랑이 부모와 주위의 걱정을 살 일이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지만 말이다.

백화점의 회계 책임자였던 잔의 아버지는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으로 자녀들을 길렀다. 잔과 후일 풍경화가로 활동하게 되는 그녀의 오빠 앙드레는 모두 미술에 재능을 보였는데, 자녀의 재능을 아낀 부모는 보수적인 가풍에도 불구하고 딸인 잔을 개방적인 미술학교에 보냈다. 그것이 훗날 가족의 불행으로 이어질지는 잔의 부모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잔 에뷔테른, <자화상>. 1916/17, 종이에 유채, 50x33.5cm, 프티 팔레 미술관, 파리

잔이 18~19살 무렵에 그린 자화상이다. 드니 등 나비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느낌이 없지 않다. 나이를 고려하면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과감성과 단순성이 돋보이는데, 특히 화면을 적절히 구획하고 색상을 배치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계속 작업을 했다면 꽤 유능한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잔은 미술 이외의 예술에도 관심이 있어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등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을 정도로 디자인 솜씨도 남달랐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조각가 필리포 콜라로시가 세운 아카데미 콜로라시는 보수적이었던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와 달리 여학생을 받아들였다. 잔이 콜로라시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학칙 덕이었다. 이곳에서는 여학생들이 남자 누드모델을 그릴 수 있었다. 학교의 그런 개방성은 외국인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와 특히 이국 유학생들이 많이 등록했다.

콜로라시 아카데미의 수업 풍경

고딕적인 외모를 지녔던 잔 에뷔테른

잔은 ‘누아 드 코코(Noix de coc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야자나무 열매(코코넛)라는 뜻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듯 그녀의 머리 모양이 코코넛을 닮은 데가 있다. 그녀의 피부마저 코코넛 속살처럼 하얗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파란색이었고 머리카락은 적갈색이었다. 조각가 자크 립시츠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고딕적인 외모를 가졌다”고 했다. 고딕 성당이 주는 고고하고 순결한, 또 신비로운 인상을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모딜리아니가 1918년에 그린 <앉아 있는 잔 에뷔테른>은 잔의 그런 고딕적 인상을 잘 전해주는 그림이다. 첨탑을 뾰족이 세운 고딕 교회를 보노라면 왠지 애상미가 느껴진다. 노천명 시인이 시 <사슴>에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고 노래한 것도 이런 연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잔의 표정과 자세에서 그런 애상미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특히 그녀의 검은 옷은 다가오는 슬픔을 예고하는 듯하다. 살짝 옆으로 기운 그녀의 머리는 삶에 던지는 하나의 의문부호처럼 보인다.

비록 보수적인 가정에서 착하고 얌전하게 자랐으나 나름의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탓에 그녀 역시 내면에서는 이렇듯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그 의문부호의 끝을 그렇게 격렬하고 비극적인 자살로 마무리할지는. 지금 그녀의 푸른 눈은 영원으로 통하고 있고, 그녀의 붉은 입술은 뜨거운 사랑을 호소해 온다. 늘 말이 없고 내향적이었다고 하나, 모딜리아니뿐 아니라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끌린 것은 잔에게 이런 신비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신비한 매력 또한 고딕 성당의 그것과 같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우면서도 홀로 외로이 서 있는 것은 모두 신비롭게 느껴진다.

모딜리아니, <앉아 있는 잔 에뷔테른>, 1918년, 캔버스에 유채, 92x60cm, 개인 소장

잔의 자살은 모딜리아니 신화의 ‘화룡점정’ 역할을 했다. 개인에게는 커다란 비극이 대중에게는 드라마틱한 신화의 장식물로 기능한다는 것, 그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잔의 초상을 보는 우리는 그 신화를 고려하지 않고 그녀의 초상을 감상하기 어렵다. 그림과 잔이 동시에 보이는 것이다.

그림 속 잔은 지금 임신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이 그림이 1918년 여름이나 가을쯤 남프랑스에서 그려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해 잔은 니스 여행 중에 첫 아이를 낳았다. 부드럽게 배를 싸안는 듯한 손의 표정이 임신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옷이 다소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무렵 모딜리아니의 다른 그림들이 대체로 단순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과는 구별된다.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의 프로필>, 1918년, 캔버스에 유채, 100x65cm, 개인 소장

프로필(profile)은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말한다. 옆으로 그려진 잔의 모습이 이국적이다. 뒤로 뾰족이 뻗은 머리가 고대 이집트의 헤어스타일을 연상시킨다. 목을 길게 그리는 모딜리아니의 특징이 이 그림에서는 더욱 뚜렷이 나타나 마치 백조의 목을 보는 것 같다. 그로 인해 잔은 현실의 여인이라기보다 미지의 세계에서 온 여인처럼 보인다. 옆모습을 그리다보니 아이를 밴 잔의 신체가 더욱 뚜렷이 부각되어 그려졌다. 팔과 허리 아래의 강렬한 붉은색이 그 새 생명의 움틈을 전해주는 것이다. 하체에서 머리끝까지 점점 가늘어지는 신체의 추상적 왜곡 또한 독특한 리듬을 전해준다. 잔은 모딜리아니를 위해 모델을 서기 전까지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모델을 선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잔의 초상은 모딜리아니의 러브레터

모딜리아니와 잔은 서로를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신접살림을 차렸다. 당시 잔의 나이는 19세, 모딜리아니는 33세였다. 연인에서 부부가 되었으나 말이 부부지 그들의 결혼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잔의 부모가 반대했고(사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누군들 소중하게 기른 딸을 술주정뱅이에다 마약중독자로 소문난 화가, 그것도 건강마저 그다지 좋지 않은 14살 연상의 무명화가에게 내주고 싶겠는가), 부모의 마음이 누그러졌을 때는 이탈리아에서 결혼 수속에 필요한 서류가 제때 오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들은 끝내 합법적인 부부가 될 수 없었다.

사실혼 관계에 머물렀지만, 잔은 두 사람의 동거를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 되는 것과 같은 영원한 결합으로 생각했다. 모딜리아니와 잔의 동료 전체를 통틀어 당시 잔과 같은 신앙인은 없었다. 그녀는 일탈적이고 퇴폐적인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당시 파리의 예술 중심지)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앙을 견지한 드문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로서는 모딜리아니와의 사랑을 거의 종교적인 숙명으로, 순교자의 확신으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모딜리아니, <어깨를 드러낸 잔 에뷔테른>, 1919년, 캔버스에 유채, 66x47cm, 개인 소장

각도는 약간 달라도 오른손을 가슴에 댄 세미누드 형태의 그림이 라파엘로의 <라 포르나리나>를 떠올리게 한다. 화가가 자신의 사랑을 모델로 해서 그릴 때 갖게 되는 정서적인 친밀감이 잘 나타나 있다. 화사한 살빛과 영롱한 두 눈이 보는 이를 그녀의 공간으로 따뜻하게 초대한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의 초상을 모딜리아니의 러브레터라고 평한 비평가 클로드 루아(Claude Roy)의 말이 매우 정확한 표현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그림이다.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 - 배경에 문이 있는 풍경>, 1919-20년, 캔버스에 유채, 130x81cm, 개인 소장

잔이 두 번째 아기를 뱄을 때의 그림이다. 웬만해서는 배경을 또렷하게 그리지 않는 모딜리아니가 이 그림에서는 방법을 달리했다. 그래서 <어깨를 드러낸 잔 에뷔테른>에 비해 인물이 다소 딱딱하고 힘이 좀 들어간 느낌이다. 남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와 파리의 우중충한 환경과 다시 만난 탓일까. 남프랑스 여행은 화상 즈보로브스키가 여행을 통해 그림도 팔고 모딜리아니의 병도 호전시키려고 기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의 상업적 성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두 번째 아기까지 뱄으니 모딜리아니에게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이 더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림이 다소 딱딱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잔의 자세와 명료한 색채의 배분은 이 초상화를 품위 있고 격조 있는 그림으로 만들고 있다.

아리땁고 어린 신부를 얻었지만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대마초를 피웠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이 시기 모딜리아니는 뛰어난 작품을 열정적으로 생산해냈다. 비록 주변의 축복을 받으며 풍족하게 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어미가 된 잔은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녀에게는 모딜리아니와 함께한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의 이유였다. 때로는 술에 취한 모딜리아니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뤽상부르 공원 문에 박을 정도로 난푹하게 군 적도 있으나, 그것은 심신이 불안정한 모딜리아니가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스스로 억제하지 못해 분출한 것이었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그런 심리를 깊이 이해했다. 모딜리아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았고, 그가 얼마나 피폐해 있는지도 잘 알았다. 그런 잔을 보고 주위 사람들은 “천사 같은 잔이 모딜리아니를 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끝내 운명의 저주를 극복하고 범인의 행복을 얻는 것은 모딜리아니에게 허락된 운명이 아니었다. 모딜리아니는 일찍 죽어야 했다. 그는 신화가 되어야 했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말년의 모딜리아니는 그래서 술과 대마초를 더욱 끊을 수 없었다. 죽음으로 인한 공포와 잔으로부터 그렇게 일찍 떠나야 한다는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 짧은 창작의 시간 동안 26점이 넘는 잔의 초상을 그린 것은 그녀와 결코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반영된 때문이 아닐까. 비평가 클로드 루아는 그래서 잔의 초상들을 모딜리아니의 러브레터라고 평한다.

“이 작품들에서 모딜리아니는 거의 속삭이듯 말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연인의 귀에 밀어를 속삭이듯 그렇게 그림에 속삭이고 있다.”

결핵으로 고생하던 모딜리아니는 1920년 1월 24일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모딜리아니가 죽기 전 그의 집에 인기척이 없자 걱정이 된 이웃이 문을 열어보았다고 한다. 그가 본 광경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모딜리아니를 스물한 살짜리 아내가 꽉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넋이 나가 있었고 공포에 떠느라 의사를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잔은 그 상태에서 모딜리아니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의사가 급히 불려왔으나 모딜리아니의 상태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딜리아니는 꺼져 가는 촛불처럼 세상을 떠났다.

모딜리아니, <소녀의 초상>, 1918년, 캔버스에 유채, 46x29cm, 개인 소장

모딜리아니, <소녀의 초상(잔 에뷔테른)>, 1919년, 캔버스에 유채, 56x38cm, 개인 소장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보는 얼굴과 정면으로 응시하는 얼굴이 같은 사람의 얼굴임을 알 수 있다. 머리 스타일이나 얼굴 형태를 보면 둘 다 잔을 모델로 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눈동자가 검어 원래 눈이 푸른 잔의 특징과 어긋난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그림들을 다른 사람을 그린 그림으로 오해할 수는 없다. 내면의 응축된 에너지를 투사해 바라보는 시선이 사진에서도 확인되듯 잔 특유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으나 모딜리아니는 잔의 눈동자 색을 짙게 바꿔 그렸다. 말수가 적고 괴로움이 있어도 꾹 눌러 참는 잔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일까.

모딜리아니가 사귄 여성들은 대체로 지성미가 넘치는 이들이었다. 잔 또한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와 별개로 잔의 나이가 아직 어렸다는 것이다. 술과 대마에 찌든데다가 때로 이성을 잃을 정도로 강한 성격인 모딜리아니를 품고 주변의 비난과 의구심을 견디며 자신의 자존을 지켜내기에 그녀는 아직 세상 경험이 적었다. 그녀의 자살은 외로이 버티고 버티던 자아가 끝내 부러져 생겨난 파열음 같은 것이었다.

“편히 잠들라, 죽은 아이를 요람에 넣어 흔들었을 애처로운 여인이여”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은 1920년 1월 27일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에 묻혔다. 그러나 잔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 전날인 26일, 친정의 5층(우리 식으로는 6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뱃속에 있던 둘째 아이와 함께 스스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잔의 부모는 모딜리아니의 장례식 다음 날 그녀를 페르 라셰즈가 아닌, 파리 교외의 바뉴 묘지에 묻었다. 가족의 앙금이 풀려 잔의 유해가 모딜리아니의 묘지에 합장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모딜리아니와 잔의 비극적인 죽음은 두 사람의 지인들에게 큰 충격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사람들은 뭔가 한 줄기 여린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모딜리아니가 설령 지옥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는 그 빛이 있어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 빛은 바로 잔이라는 존재였다. 잔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스스로 빛이 되었다. 모딜리아니에게 그녀는 영원한 구원의 여인이었다. 죽음의 나라까지 동행하는.

모딜리아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모딜리아니의 전기를 슨 시인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은 잔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아픈 마음을 토로했다.

편히 잠들라, 애처로운 잔 에뷔테른이여.

편히 잠들라, 죽은 아이를 요람에 넣어 흔들었을 애처로운 여인이여.

편히 잠들라, 더는 헌신적일 수 없는 여인이여.

생 메다르 교구의 마리아 상과 닮았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죽은 아내여.

편히 잠들라, 흙에 덮여 가는 그 새하얀 은둔처에서.

잔 에뷔테른, <자살>, 연도 미상, 종이에 수채, 20.7x327.9m, 개인 소장

자신의 자살을 주제로 잔이 그린 수채화이다. 섬뜩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잔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고 잘 알았던 문인 스타니슬라스 퓌메는 자살에 대한 잔의 관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잔은 자살에 대해서도 입에 올렸다.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슬퍼하지 않았다.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괴로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큰 고통이 그녀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겼으나 그렇다고 사랑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 것은 아니었다. 첫 아이를 배고서야 부모가 처음으로 그녀와 모딜리아니의 동거를 알았다는 사실은 자신이 얼마나 책망 받을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어머니가 그나마 해산을 도우며 그녀의 입장을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해도 오빠 앙드레와의 관계는 죽을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이 그림을 모딜리아니가 죽은 뒤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 넋이 나가 자살을 결행하게 되는 마당에 그림을 그릴 심적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그림은 아직 모딜리아니는 살아 있었지만 다가오는 불행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던 삶의 종장에 그린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잔의 부모는 바뉴 묘지에 잔을 묻을 때 부고를 내지 않았다. 다만 학창시절 잔과 가까웠던 동창 두 사람, 모딜리아니의 화상인 즈보로브스키 부부와 다른 두 사람 등 극소수의 사람들만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도 묘지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그들은 잔이 매장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페르 라세즈에 있는 모딜리아니와 잔의 무덤

그로부터 10년 뒤 모딜리아니의 형 주세페 에마누엘레 모딜리아니가 잔의 부모를 찾아와 모딜리아니와 잔의 헌신적인 사랑을 생각해서라도 두 사람을 함께 묻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잔의 부모가 이를 승낙해 마침내 두 사람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모딜리아니와 잔의 딸 잔 모딜리아니는 모딜리아니의 누나 마르게리타에게 입양되어 길러졌으며, 훗날 아버지의 발자취를 연구해 전기를 펴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한겨레신문 미술 담당 기자를 지냈다. 학고재 갤러리 관장, 서울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쓴 책으로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지식의 미술관》,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등 30여 권이 있으며, 대중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미술의 세계>테마로 보는 미술 201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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