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클라라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Clara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7)

라라와복래 2015. 9. 13. 12:54

Clara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7

클라라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Clara Schumann

1819-1896

Francesco Nicolosi, piano

AlMA Mahler Sinfonietta

Stefania Rinaldi, conductor

2005, Naxos

 

Francesco Nicolosi - Clara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7

 

오랫동안 클라라 슈만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로서, 또 당대를 대표했던 뛰어난 피아니스트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음악사에서 작곡가로서의 자리매김이 되었고, 그녀의 음악을 담은 음반도 적지 않게 나와 있다.

피아노 교사로 유명했던 프리드리히 비크는 딸이 말이 늦자 귀머거리가 아닌가 의심해서 청력을 살리기 위해 5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고, 클라라는 8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클라라는 9살 때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같은 해에 피아노 작품인 4개의 폴로네즈(Op.1)를 발표하면서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다. 초기 작품들은 연주회에서 쳤던 기교적인 작품들을 모방하는 데 그쳤지만 점차 클라라의 작품세계는 성숙되어 갔다.

음악사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바로 쇼팽과 조루즈 상드, 슈만과 클라라 비크와의 사랑이다. 쇼팽과 상드가 행복하지 못한 결말을 맞은 데 비해 슈만과 클라라는 더 이상의 결합은 없을 것 같은 이상적인 커플이 되어 대조를 이룬다.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은 독일 작센 지방의 츠비카우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률을 배우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릴 수가 없어 20세에 다시 음악의 길에 전념하게 된다. 이때부터 슈만은 피아노 교사인 프리드리히 비크의 제자가 되어 그의 집에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때 비크의 딸 클라라는 11세의 소녀였으나 피아노 연주 실력은 대단했다.

슈만은 하루 빨리 훌륭한 연주 솜씨를 갖추어 공개 연주회를 갖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무리하게 연습을 하다가 손가락을 다쳐 피아니스트로서의 장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슈만은 한동안 좌절과 절망에 싸여 방황했지만 작곡으로 전환하여 피아노 모음곡 <나비>(Op.2)를 썼다. <나비>의 악보를 받은 클라라는 슈만이 의도한 것을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에 열중했으며, 이 무렵부터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은 싹트기 시작했다. ◀클라라 비크, 1835년(16세)

그러나 아버지 비크는 공부를 더해야 한다는 구실로 그녀를 드레스덴으로 보내버렸다. 두 사람은 4년간 떨어져 있으면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슈만은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누구보다도 자기의 음악을 이해해주는 클라라에게 먼저 보냈다. 슈만은 두 사람의 만남을 결실로 이어가기 위해 용기를 내서 스승인 비크를 찾아가 클라라와의 결혼을 승낙해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비크는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슈만은 클라라와의 결혼 허가를 청구하는 소송을 라이프치히 법원에 제출했다. 스승 비크와의 법정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비크는 대단히 화가 나서 클라라 몫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버리고 만다. 무일푼이 된 클라라는 결혼 자금을 벌기 위해 부지런히 연주여행을 다녔다. 드디어 이들 연인에게 기쁨을 가져온 승리의 날이 왔다. 라이프치히 법원으로부터 정식 결혼을 인정한다는 판결문이 전달된 것이다.

1840년 21세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한 후에 남편과 함께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클라라 비크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슈만의 부인이라 부르지 않고 오히려 슈만을 클라라의 남편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연주회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찰이 질서 유지에 나설 정도였으며, 그녀의 이름을 딴 디저트 이름이 나오고 시인들은 그녀에게 바치는 시를 쓸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클라라가 슈만의 작곡 생활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슈만의 생애에서 클라라와 결혼한 이듬해인 1841년은 ‘교향곡의 해’로 일컬어진다. 이해에 슈만은 교향곡 1번 ‘봄’(Op.38)과 교향곡 4번(Op.120, 1851년에 개작) 등 관현악곡들을 집중적으로 작곡했는데, 클라라와의 결합을 통해 얻게 된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이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슈만의 교향곡 4번에, 가슴 설레는 첫 만남과 사랑의 짜릿함, 결혼을 위해 거쳐야 했던 투쟁의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쟁취한 사랑의 환희로 녹아 있다. ▶슈만 부부

1856년 슈만이 정신착란에 시달리다 죽은 뒤 클라라는 37년 동안 국내외로 연주여행을 계속하여 리스트에 비견되는 명연주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클라라 슈만은 리스트와 함께 암보(暗譜)로 피아노를 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류머티즘이 그녀의 활동을 멈추기까지 60여 년이 넘는 연주 경력은 남자들도 못 따라갔으며, 당대 유럽에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소유한 연주가였다. 클라라 슈만은 23곡의 피아노 작품을 남겼고, 슈만과 브람스의 해석자로서도 일가견을 이루었다.

1896년 77살 되던 해 클라라는 손자가 연주하는 남편 슈만의 피아노곡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독신으로 지내며 거의 평생 클라라를 운명처럼 연모한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었다”고 클라라의 죽음을 슬퍼했다.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7은 1822년 클라라가 13세 때 작곡했다. 협주곡에 착수한 지 10개월이 지났을 때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 내 협주곡을 지금 끝냈다. 슈만이 여기에다 오케스트레이션을 해주면 나는 이것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할 당시 그들은 서로 음악적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베르트 슈만은 이 곡에 오케스트레이션을 붙여 작품을 완성시켰다. ▶클라라 슈만, 1878년(59세)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이 협주곡은 처음에는 단악장 형식이었다. 여기에 나중에 클라라가 1, 2악장을 보태 3악장짜리 협주곡으로 완성시켜 16세이던 1835년 11월에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클라라 자신의 협연으로 초연되었다. 주제적 통일성으로 결합된 각 악장들은 쉬지 않고 연주된다. 2악장에서 첼로와 피아노의 농밀한 대화는 마치 연인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