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폐광 - 허연

라라와복래 2015. 10. 1. 11:42

 

폐광

허연

아는 사람 몇 명

땅에 묻어본 다음

존재했던 건 전부

결국에는

지층이라는 걸 알았다.

세상의 왼쪽 가슴쯤을

관통했을 이 구멍을

걸어 들어가며

복잡한 연대기를 읽는다.

결코 위대하지 않았을 말들과

싸움과 사랑과 밥이

이 쭈글쭈글한

통로에 새겨져 있다.

그놈의 눈물은 이제껏 흐른다.

그래도 가끔은 반짝이는 게 있다.

스스로 걸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나가는 길을 못 찾은 자들의 뼈.

출전 :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시를 배달하며

우리 안의 슬픈 폐광이 시커멓게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 같다.

싸움과 사랑과 밥? 복잡한 연대기는 결국 지층이 되고 스스로 걸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나가는 길을 못 찾은 슬픈 구멍의 운명들이다.

삶을 시로 투시하는 힘과 연륜을 느끼게 한다. 감상적이거나 낭만적 징후를 드러내기 쉬운 그놈의 눈물이라는 시어도 여기에서는 묘하게 반짝인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시-낭송 허연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가 있다.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고전 탐닉』을 냈다. 한국출판학술상,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음악 권재욱 / 애니메이션 강성진 / 프로듀서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