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부질없는 시
정현종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출전 : <고통의 축제>(민음사)
시를 배달하며
새해, 첫 번째 배달하는 시는 ‘시, 부질없는 시’이다.
실용과 쓸모와 계산에만 매인 삶이여, 그 짐승 이빨 속에 끼인 시를 놓아다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와 매사에 파이팅! 파이팅!을 외치는 구호와 긍정의 과잉은 자칫 얼마나 고단하고 속된 삶인가. 사방엔 비명과 발악, 그리고 날카로운 발자국들 가득하다. 그 발자국 위에 저 혼자 내리는 눈처럼 저 혼자 내렸다가 저 혼자 녹아버리는 시를 배달한다.
희망과 위로와 행복을 외쳐대는 새해의 클리셰(cliche)를 던져버리고 덧없고, 부질없고, 무용(無用)한 것들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위해 축배!
문학집배원 문정희
시 정현종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광휘의 속삭임』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경암학술상(예술 부문), 파블로 네루다 메달 등을 수상했다.
낭송 최영미 화가. 제1회 최영미 개인전 등 그룹전 다수 참여.
음악 지난토 / 애니메이션 제이 / 프로듀서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