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시, 부질없는 시 - 정현종

라라와복래 2016. 1. 26. 11:50


, 부질없는 시

정현종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출전 : <고통의 축제>(민음사)

시를 배달하며

새해, 첫 번째 배달하는 시는 , 부질없는 시이다.

실용과 쓸모와 계산에만 매인 삶이여, 그 짐승 이빨 속에 끼인 시를 놓아다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와 매사에 파이팅! 파이팅!을 외치는 구호와 긍정의 과잉은 자칫 얼마나 고단하고 속된 삶인가. 사방엔 비명과 발악, 그리고 날카로운 발자국들 가득하다. 그 발자국 위에 저 혼자 내리는 눈처럼 저 혼자 내렸다가 저 혼자 녹아버리는 시를 배달한다.

희망과 위로와 행복을 외쳐대는 새해의 클리셰(cliche)를 던져버리고 덧없고, 부질없고, 무용(無用)한 것들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위해 축배!

문학집배원 문정희

정현종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5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광휘의 속삭임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경암학술상(예술 부문), 파블로 네루다 메달 등을 수상했다.

낭송 최영미 화가. 1회 최영미 개인전 등 그룹전 다수 참여.

음악 지난토 / 애니메이션 제이 / 프로듀서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