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북스테후데 ‘파사칼리아 D단조’(Buxtehude,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라라와복래 2015. 10. 15. 00:55

Buxtehude, Passacaglia in D minor

북스테후데 ‘파사칼리아 D단조’

Dieterich Buxtehude

1637-1707

Helmut Walcha, organ

1680 Schnitger Organ

St. Peter and Paul Church, Cappel, Germany

1978

 

Helmut Walcha - Buxtehude,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영혼의 음성을 듣게 해주는 음악

“저(싱클레어)는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 들으면 마치 천국과 지옥을 뒤흔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음악, 전혀 구속받지 않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제 생각에 음악이 별로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도덕적입니다.” (중략) 기분이 울적할 때면 나는 피스토리우스에게 이전에 들었던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때면 나는 저녁 무렵에 어두운 교회에 앉아, 넋을 잃은 채 자신 속으로 빠져들어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듯한 이 기이한 음악을 들었다.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는 즐거워졌고, 내 영혼의 목소리가 옳다는 믿음을 강하게 해주었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1705년, 당시 스무 살이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튀링겐의 아른슈타트에서 320km를 걸어서 뤼베크에 갔다. 그가 뤼베크에 간 것은 그곳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하고 있던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북스테후데는 17세기 후반 독일 최고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의 오르간 연주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당대 최고의 경지로 소문이 나 있었다.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고 있었던 바흐 역시 말로만 듣던 선배의 연주를 듣기 위해 휴가를 내고 간 것이다. 과연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는 최고였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바흐는 한 달의 휴가 기간을 훌쩍 넘겨 넉 달 동안이나 뤼베크에 머물렀다.

바흐가 뤼베크를 찾았을 당시 북스테후데는 68세의 고령으로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 전도유망한 젊은 오르가니스트들이 모두 그 자리를 탐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이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려면 전임자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스테후데 역시 전임자인 툰더의 딸과 결혼해서 그 자리를 얻었다. 자신보다 열 살이 많은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에 바흐는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결국 바흐는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는 꿈을 접고 아른슈트타로 돌아갔다. 바흐가 떠나는 날 북스테후데는 유달리 비통한 오르간 음률로 바흐를 배웅했다고 한다.

사실 그 2년 전 1703년에 헨델과 마테존이 북스테후데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북스테후데는 바흐에게 제시한 것과 똑같은 조건을 내걸고 자신의 자리를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맡아 달라고 했다. 그런데 북스테후데의 딸을 본 두 사람은 그 이튿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만큼 딸은 박색이었다고 한다.

가정 음악회를 묘사한 작품. 중앙에서 아담 라인켄이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고 있다. 왼쪽 옆에서 비올라다감바(비올)를 연주하는 사람이 북스테후데이다.

바흐와 헨델 등 숱한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준 북독일 교회음악의 거장

이렇게 음악사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제공한 북스테후데는 1637년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덴마크 영토였던 헬싱보르(지금은 스웨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북스테후데는 오르가니스트였다. 독일인이지만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면서 주로 덴마크에서 살았다. 북스테후데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가서 오르간 소리를 듣곤 했는데 유난히 소리에 민감한 아이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음악가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북스테후데는 아버지 밑에서 음악의 기초를 쌓는 한편 일반 과목을 공부하기 위해 라틴어 학교에 들어가 논리학과 수사학, 기하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 이렇게 쌓은 지식은 나중에 그가 작곡가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라틴어 학교에서 쌓은 라틴어 실력은 훗날 라틴어로 된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라틴어 외에 북스테후데는 어머니의 모국어인 덴마크어는 물론, 독일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이때 익힌 독일어 실력이 훗날 그가 독일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음악 수업을 받은 북스테후데가 그 이후 어떻게 음악 공부를 이어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은 그가 코펜하겐으로 건너가서 공부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공부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688년부터 북스테후데는 독일의 뤼베크에 정착해 그곳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이때 각종 예배에 사용하는 오르간곡을 많이 작곡했다. 또한 공개축제나 뤼베크 지역의 부유한 상인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위해서도 많은 곡을 썼다. 종류도 다양해서 토카타, 전주곡, 푸가, 샤콘, 코랄, 파사칼리아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연주와 작곡 활동을 통해 북스테후데는 자신이 일하는 성 마리아 교회를 북독일 음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성 마리아 교회에서는 오르간 주자가 저녁마다 음악회를 여는 특별한 전통이 있었다. 북스테후데의 전임자였던 툰더가 뤼베크 지역 사업가들의 후원을 받아 만든 음악회였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 전통을 이어 받아 북스테후데는 일요일 오후 예배를 본 다음에 저녁 음악회를 열었다. 프로그램은 종교음악과 오르간곡이었다. 입장료는 무료였고 지방 상인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었다. 독일 전역에서 사람들이 이 음악회를 보기 위해 뤼베크로 왔다. 이 음악회는 뤼베크의 자랑거리로 그가 죽은 지 한참 시간이 흐른 19세기까지 그 전통을 이어갔다. ▶독일의 오르간 제작 명인 아르프 슈니처가 1680년에 만든 카펠의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의 오르간

북스테후데는 많은 성악곡과 기악곡들을 작곡했는데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 작품들은 소실되었고 이들 중 많은 작품들이 20세기에 와서야 재발견됐다. 그 외 성악곡은 주로 교회 칸타타들로 100여 곡 이상이 남아 있다. 가사는 예배 의전에서 가져온 것은 거의 없고, 대개 성서 구절이나 찬미가, 당시의 종교시들에서 가져왔다. 곡들은 신앙심이 넘치면서도 단순하여 바로크 작곡가들의 장식적 음악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북스테후데는 북독일 교회음악의 거장으로 평생 동안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다가 1707년 뤼베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흐가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 뤼베크에 왔던 때로부터 2년 후이다. 만약 그때 바흐가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음악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음악은 경건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환상적이면서도 사색적이다. 끊임없이 분출하는 악상의 독창성과 음색의 강렬함 속에 품격과 힘, 밀도, 웅대함을 갖추고 있다. 이런 그의 오르간 작품은 바흐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파사칼리아는 17세기 초 스페인에서 파사칼레(Pasacalle)라는 2박자의 춤곡에서 유래하여 그 후 프랑스에서 발레곡으로 사용되다가 바로크 시대로 들어서 기악곡으로 발달하게 된다. 곡 전체를 통해 저음에서는 짧은 주제를 반복하고 고음에서는 대위법적인 변주를 전개해 나가다 점점 느린 3박자 형식으로 변형된다. `파사칼리아'는 ‘샤콘’과 더불어 바흐와 헨델 등 여러 작곡가들이 발전시키면서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변주곡이 되었다.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 d단조>는 바흐의 〈파사칼리아 c단조〉의 기초가 되었다. 〈파사칼리아 d단조〉는 단순하고 유쾌하면서도 구성력이 훌륭하다. 이는 단순히 기교적 경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대위법보다 더 자유롭고 기발한 양식 사이에서 북스테후데는 위대한 창작력을 펼쳐 보이고자 하였다. 작품 속에서 그의 구상력은 놀라우며 생기차고 활발한 느낌을 준다.

Buxtehude,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Ton Koopman, organ

1686 Schnitger organ

Ludgeri Church, Norden, Germany

1989.05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