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Rachmaninoff, Piano Sonata No.2 in B flat minor Op.36)
라라와복래2018. 6. 11. 10:16
Rachmaninoff, Piano Sonata No.2 Op.36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Sergei Rachmaninoff
1873-1943
Yuja Wang, piano
Toppan Hall, Tokyo
2013.04.17
Yuja Wang - Rachmaninoff, Piano Sonata No.2 in B flat minor Op.36
모든 장르에서 뛰어나고자 노력했던 라흐마니노프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피아노 음악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를 들어 피아노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가장 몰두했던 장르인 반면, 실내악이나 오페라에는 거의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했던 장르인 교향곡과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와 가곡에서도 그 안에는 성공작과 실패작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작곡 기법과 내용에서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를 꾸준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피아노 소나타 장르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아 부으며 정성을 들였다. 커다란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코렐리나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들과는 달리, 유독 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순탄치 않은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우선 파우스트 전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표현한 피아노 소나타 1번 Op.28은 너무나 길고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데 실패했다. 아직까지도 이 작품은 명쾌하고도 뛰어난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이은 피아노 소나타 2번은 표면적으로 성공을 거둔 듯했지만 그 음악적, 구조적인 측면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했던 만큼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한 후대 연주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머리 아픈 고민을 계속 해야만 했다.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처음으로 미국으로 연주회 여행을 떠나 이듬해에 되돌아왔고, 이 무렵 이바노프카에 있는 아름다운 별장을 소유하면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작곡가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1909년부터 1917년까지는 그가 조국 러시아에서 보낸 마지막 시기로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친 시기였다. 피아노 협주곡 3번(1909년)을 비롯하여 전주곡 Op.32와 회화적 연습곡 Op.32와 39, 합창 교향곡 ‘종’과 피아노 소나타 2번이 바로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다. 특히, 1913년에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로마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에드거 앨런 포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종’을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바노프카에 돌아온 뒤 작품을 완성, 그해 겨울 모스크바에서 초연을 가졌다.◀1914년 모스크바에서 발행된 피아노 소나타 2번 악보
이와 같은 시기에 그는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가 자신이 직접 초연을 했다.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로스토프 아카데미의 원장인 마트베이 프레스만(Matvey Presman)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장황하다는 평을 들었던 라흐마니노프는 1931년 여름 이 소나타를 대대적으로 개작하게 되었다. 중복되는 음과 복잡한 성부를 생략하여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120여 마디에 이르는 부분들을 삭제했고 일부 화성을 변화시켜 선율이 더욱 뚜렷해졌으며, 특히 악장들의 발전부에서 많은 패시지의 텍스추어를 새롭게 다듬은 한편 부분 부분을 새롭게 작곡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음악학자인 알프레드 스완(Alfred Swan)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겨 있다.
“제 초기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과잉된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2번 소나타에서도 너무 많은 성부가 동시에 열려 나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길이가 너무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Op.35는 19분 남짓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베토벤과 슈만, 리스트와 쇼팽의 뒤를 잇는 대작 소나타를 염원했던 라흐마니노프는 총 25분이 넘는 연주시간을 필요로 하는 오리지널 버전을 대폭적으로 줄여 20분에 채 미치지 않는 정도의 시간으로 줄였다.
그러나 이 개정판 또한 음악의 윤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오리지널 버전의 중요한 부분을 너무 많이 삭제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전조부도 어색하며 양식적인 측면 또한 지나치게 절제했다는 평가 또한 그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레퍼토리에서 아예 이 작품을 삭제해 버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이에 대한 돌파구는 자신이 아닌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정신적, 예술적 후계자로 생각했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0년 작곡가의 동의를 얻은 호로비츠는 이 두 종류의 버전의 장점을 한데 섞은 버전을 만든 것이다. 그가 평생토록 즐겨 연주했던 약 22분 정도의 길이의 이 혼합 버전은 작곡가의 두 가지 버전에 대한 훌륭한 대안으로서, 현재에는 소수의 피아니스트들이 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연주가의 관점에 따라 각자 조금씩 변형된 버전을 사용하기도 한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소나타 2번 오리지널 버전이 장황하다는 평을 듣고 고민 끝에 1931년에 대대적으로 개작하였다.
1악장: 알레그로 아지타토
피아노 소나타 2번의 오리지널 버전은 연주자에게 과도할 정도의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하는 만큼 비르투오소 용 피아노 작품으로서의 자기과시적인 패시지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1악장 알레그로 아지타토는 B플랫 단조의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대범한 하강 분산화음부터 이러한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이 하강 주제는 뒤이어 장조로 변형되며 악장 곳곳에서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순환 구조 형식을 갖고 있는 이 1악장은 낭만주의 시대에 발전된 중요한 기법을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스타일로 흡수한 것이다. 특히 개성적인 부점 리듬의 변형된 사용이라든지 양손의 교묘한 엇박 진행에서 그만의 개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짧은 카덴차 뒤에 제시되는 시칠리아노 풍의 부드러운 D플랫 장조에서 다양한 부점으로 합성된 리듬이 특히 인상적이다.
발전부는 라흐마니노프가 개정판을 내면서 쟁점으로 삼았던 부분이다. 오리지널 버전은 보다 강한 기교를 요구하는 한편 하강 주제와 주요 조성으로의 명확한 회귀가 담겨 있는데, 1931년 개정판은 이를 대부분 삭제하며 간결하게 만들었지만 핑거링과 도약, 양손의 교차에서 이전보다 더 어려운 테크닉을 담아내며 G플랫 장조의 두 번째 주제를 재현한다. 마무리 코다는 다음 악장과의 연결을 위해 조용한 어조로 끝을 맺는다.
2악장: 논 알레그로. 렌토
서주를 갖고 있는 ‘A-B-A’의 3부 형식이다. 특히 부드러운 하강 음향의 선율이 2악장의 서주를 장식하는데 D장조에서 E단조 렌토로 변화하는 모습은 대단히 몽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낭만적인 G장조를 거친 뒤 다시 E단조의 주제로 돌아오며 이 악장은 클라이맥스를 갖게 된다. 첫 악장에 등장하는 첫 하강 멜로디 주제나 부드러운 두 번째 D장조 주제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이 두 번째 악장은 1악장에 대한 회고라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은 다시 첫 번째 논 알레그로로 돌아가며 끝을 맺는다.
3악장: 알레그로 몰토
2악장의 서주를 조성만 B플랫 장조로 바꾼 채 그대로 사용한 짧은 서주 뒤에 스펙터클하고 웅장하기 그지없는 3악장 알레그로 몰토가 시작된다. 개선 행진곡을 연상시키는 1주제가 악장 전체를 걸쳐 전조를 통해 수차례 등장하는데, 이 악장 또한 1931년 버전에서는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몇몇 패시지들은 완전히 수정되었다. 지극히 낭만적인 리리시즘을 담고 있는 두 번째 주제는 첫 주제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고. 피아니스트의 강한 에너지와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마지막 재현부에 이어 압도적인 승리감에 도취된 B플랫 장조의 화성으로 끝을 맺는다.
Vladimir Horowitz - Rachmaninoff, Piano Sonata No.2 in B flat minor Op.36
Vladimir Horowitz, piano
Carnegie Hall, New York
1968.12.25
추천음반
1.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런던 실황, 호로비츠 버전 (RCA)
2. 졸탄 코치시, 오리지널 버전 (Philips)
3. 데니스 마추예프, 개정판 버전 (RCA)
4. 엘렌 그리모, 그리모 버전 (DG)
글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