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왼쪽 위에 커서를 놓으면 재생목록이 나옵니다. 거기서 현재 연주되는 곡이 몇 번인지 알 수 있고 또 듣고 싶은 곡을 선택해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쇼팽이 남긴 방대한 작품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날 피아노 레퍼토리는 대단히 빈약했을 것이 분명하다. 인간 영혼의 가장 은밀하면서도 깊숙한 부분을 담아낸 피아노 작품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작품이 바로 쇼팽의 것이기 때문이다. 쇼팽은 평생에 걸쳐 피아노라는 악기에 자신의 천재성과 삶 전체를 바쳤다. 물론 몇몇 실내악 작품과 가곡들을 작곡하긴 했지만 이들 장르 또한 피아노가 반드시 포함되었던 만큼, 쇼팽의 영감의 원천은 역시 피아노였다. 그의 가장 친밀한 동료였던 피아노를 통해 쇼팽은 대단히 다양한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다. 피아노 소나타는 물론이거니와 녹턴, 프렐류드, 왈츠, 마주르카, 연습곡, 즉흥곡을 비롯한 짧은 형식의 작품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평가해야 하는 것은 이들 소품의 형식과 리듬, 피아노 테크닉, 정서 등등을 새롭게 정의함과 동시에, 낭만주의와 고전주의를 놀라울 정도로 혼합해냈을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과 감정적인 격렬함, 수줍은 듯한 내면적 울림과 정열적인 외향적 기운의 혼합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쇼팽이라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쇼팽은 단순히 음악의 장식적 요소를 제외했을 뿐 아니라, 필요 이상의 기교 및 과도한 감정 토로 또한 경계했다. 이것이야 말로 쇼팽의 진정한 음악적 개성이 출발하는 지점이라 말할 수 있다.
서정성과 영웅적 무게감이 실린 폴로네즈
최소한 열다섯 곡에 달하는 폴로네즈는 쇼팽이 평생토록 꾸준히 작곡했던 장르다. 최초의 폴로네즈는 그가 여덟 살 무렵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르샤바 근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폴란드 농민들의 무곡에 깊이 동화했던 쇼팽은, 궁정 무도회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느긋하고 장엄한 무곡으로부터 진실로 위대한 숨결과 힘을 담아낼 수 있는 서사적이고 리드미컬한 시의 형식으로 폴로네즈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835년 파리에서 작곡한 두 개의 폴로네즈 Op.26에서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데, 이제 폴로네즈라는 무곡은 서정적이고도 영웅적인 무게감을 갖는 동시에 단호하면서 경건하고 극적인 개성들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무거운’ 장르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Op.26 No.1은 힘찬 4마디의 서주로 시작하여 웅장하고 리듬감 있는 곡으로, 곡 중간부가 아주 단순하고 아름다우며 쇼팽다운 특징이 넘쳐흐르는 3부 형식의 작품이다. 특히 고음역부의 솔로 멜로디와 아름다운 첼로의 오블리가토를 연상시키는 칸틸레나가 계속적으로 함께 제시되며 분위기를 극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이 작품이 감상적이며 환상적인 측면이 지배적이라면, Op.26 No.2는 더욱 비장한 감정으로 충만해 있다. 이 곡 역시 3부 형식으로 1부는 장엄하고도 비극적인 마에스토소와 경쾌한 폴로네즈 리듬의 대비, 2부는 부드러우면서도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드러내는 양식, 3부는 1부를 반복하며 형식적 완결을 꾀한다.
3년 뒤에 작곡한 두 개의 폴로네즈 Op.40에서는 이전보다 감정적인 대비가 훨씬 강하게 드러난다. Op.40 No.1은 ‘군대 폴로네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승리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Op.40 No.2는 고통스럽고 비장한 기운이 드러난다. 19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스타인은 이 두 작품에 대해 전자는 폴란드의 영광을, 후자는 폴란드의 비극을 상징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호방하고 용맹스러운 1, 2주제가 인상적인 ‘군대 폴로네즈’는 군대의 개선 행진을 어렵지 않게 연상시킨다. 그 용맹스러운 리듬은 작품 전체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만큼 엄격한 템포와 단호한 터치로 연주해야만 한다. Op.40 No.2는 비장하고도 음울한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는 곡으로 1839년 마요르카 섬에서 완성되었다.
폴란드의 민속 춤 폴로네즈를 추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도취적인 강렬한 드라마, 환상적 분위기의 폴로네즈
1841년에 완성된 폴로네즈 Op.44는 더 비통하면서도 관조적인 작품이다. 리스트는 “곡 안에 마주르카를 삽입한 가장 정력적이고 박력적인 작품이다. 곡 전체가 매우 독창적이고 변화무쌍하게 변화하여 시인 바이런의 꿈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쇼팽 스스로도 “폴로네즈의 형태를 빌린 환상곡”이라고 언급했듯이 다른 폴로네즈보다 훨씬 다이내믹하고 추진력 높으며 힘이 넘친다. 구성은 4부 형식으로 3부에서는 마주르카를 사용한 트리오가 등장하고 4부는 1부의 축소된 재현으로서 A-B-A-코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작품은 독립된 작품번호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폴로네즈이지만 두 작품이 페어링되어 감정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전 작품들처럼 Op.53의 훌륭한 파트너라고도 말할 수 있다.
1842년에 작곡된 Op.53 ‘영웅 폴로네즈’는 쇼팽의 폴로네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고난을 헤치고 점차 고양되는 흥분감과 이에 대한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해결, 종국에 이르러서는 승리에 대한 도취가 터져 나오는 압도적인 작품이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격렬한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지만, 한편으로는 경건하고 장엄하며 단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작품은 피아니스트로 하여금 초인적인 기교와 창조적인 드라마를 요구하는 난곡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폴로네즈는 1846년에 작곡한 Op.61 ‘환상 폴로네즈’로, 생의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던 쇼팽의 감상적인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감돌고 있다. 이 작품은 환상곡보다는 폴로네즈에 가까운 자유로운 형식을 띄고 있다. 서정적이고도 환상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그 뒤에 숨어 있는 영웅적이고도 혁명적인 기운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쇼팽의 마지막 대 서사시이다.
이후 그는 대곡을 작곡하지 않고 보다 본질적이고도 내면적인 소수의 작품만을 작곡했다. 그나마 1847년 8월 조르주 상드와 결별한 이후 쇼팽의 열정적인 창작력은 완전히 고갈되어버렸다. 이외에 쇼팽이 작곡한 폴로네즈는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그랑드 폴로네즈’ Op.22와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서주와 화려한 폴로네즈’ Op.3, 그리고 10대 무렵에 작곡되어 작곡가 사후 출판된 세 곡의 폴로네즈 Op.70 등이 있다.
1. 폴로네즈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절대적인 카리스마는 영원히 잊힐 수 없을 것이다. 전곡 녹음을 하지 않았지만 1968년 Op.44 녹음, 1971년 Op.53 녹음, 1972년 Op.41 No.1 녹음(SONY)이 그의 가장 훌륭한 폴로네즈 리코딩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2.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세 번에 걸쳐 녹음한 전곡 녹음이 아마도 폴로네즈 해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폴란드의 정서와 비르투오소로서의 전지전능함의 전형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의 해석 가운데 특히 1951년 모노 녹음(RCA)이 가장 다이내믹하고 건강하다.
3. 슈라 체르카스키의 1969년 전곡 녹음(DG)도 개성적이면서도 우아한 해석으로 돋보이고, 개릭 올슨의 연주(Hyperion)도 폴란드적인 아름다움의 극한을 보여준다.
글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