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Barenboim/Bayreuther Festspiele 1983 - Wagner, Tristan und Isolde
낭만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지상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두 연인의 죽음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자살하는, 이른바 ‘정사(情死)’라는 것이지요. 오페라 중에는 베르디의 <아이다>,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민족, 가문, 군신관계 등의 이유로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사회적 의무와 개인적 열정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랑의 묘약을 소재로 한 중세문학
기사 트리스탄에 대한 이야기는 켈트의 전설로 전해내려 오다가 12세기 프랑스에서 <트리스탄과 이죄>(Iseut, 이졸데의 프랑스 식 이름)라는 제목으로 문학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13세기 초에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트리스탄>이라는 제목의 장편 서사시를 썼지요. ‘트리스탄’이라는 이름은 ‘슬픔’을 뜻하는 라틴어 ‘트리스티스’(tristis)에서 온 것입니다. 트리스탄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전사했고, 그 소식에 절망한 어머니가 트리스탄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러니 ‘슬픔 속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바그너는 하루를 못 보면 병이 들고, 사흘을 못 보면 죽는다고 하는 ‘사랑의 묘약’을 마신 연인들의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한틀룽’(Handlung, ‘행위’ 또는 ‘줄거리’라는 뜻)’이라는 부제를 달아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했습니다. 이전의 작품들에 ‘낭만적 오페라’라는 부제를 단 것과는 확실히 구분됩니다. 그는 이 단어로 고대 그리스식의 비극을 의미하려고 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처럼 외적인 사건의 전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내면심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트리스탄>에 담은 정치적ㆍ문학비평적인 내용은 바그너의 작품에서는 다 빠졌고, 오로지 ‘사랑’만이 핵심주제로 남았습니다. 바그너는 스위스 망명 중에 자신을 후원해준 기업가 베젠동크의 아내 마틸데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고, 그 시기에 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했습니다. ‘통속적 현실’ 속의 아내 민나를 벗어나 자신의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베젠동크 부인과 결합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 그 바그너의 소망이 그의 텍스트와 음악을 더욱 극단적 갈망으로 충일하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중세라는 시대를 외피로 두르고 있지만, 내용은 낭만주의 시대 연애담입니다. 한편 이 작품에서 바그너는 ‘예술가의 자유와 사회규범 간의 충돌’이라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통한 사랑의 승리’라는 주제 외에도, ‘예술가가 작품 창조를 위해 도덕을 저버리는 것이 어느 선까지 용납되는가’ 하는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는 셈입니다.
바그너는 자신의 가수들에게 주문이 많았는데요, 극의 내용을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분명하고 흠 없는 발음을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가사를 강조하기 위해 ‘멜로디는 가사에서 유기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그너 작곡의 원칙이었고, 이 원칙은 후에 그의 ‘무한선율’(Unendliche Melodie) 기법을 이끌어내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무한선율이란 멜로디가 아리아를 마치면서 끊어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며 확장되는 것을 뜻합니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분리가 사라지면서 이 무한선율은 듣는 사람들을 신비로운 도취 상태에 빠지게 하죠.
무한선율이라는 용어를 바그너가 처음 사용한 것은 1860년 <미래음악>(Zukunftsmusik)에서였습니다. 드라마의 내적 행위가 전체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음악 역시 지속적 흐름을 유지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기법으로, 이것은 낭만주의의 무한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1865년에 뮌헨에서 초연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이런 무한선율의 특성이 극의 내용과 가장 잘 부합되는 드라마입니다.
사회적 의무와 도덕을 벗어나 밤과 죽음을 찬미
1막
‘트리스탄 화성’으로 유명한 전주곡이 끝나고 막이 열리면, 콘월의 왕 마르케의 조카인 기사 트리스탄은 아일랜드 공주 이졸데를 배에 태워 왕의 신부로 데려갑니다. 과거에 트리스탄이 이졸데의 약혼자 모롤트를 죽이긴 했지만 이졸데가 트리스탄의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죠. 그런데도 연인인 자신을 왕과 결혼시키려는 트리스탄에게 분노하면서 이졸데는 콘월로 가는 배 안에서 그와 함께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죽으려 합니다. 그런데 시녀 브랑게네가 독약을 사랑의 미약으로 바꿔치기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새롭게 더욱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여기까지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의 내용입니다. ▶사랑의 미약을 마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사회적 도덕과 의무가 지배하는 낮의 세계와 자연의 욕망이 인정되는 밤의 세계의 대립, 그리고 죽음을 통한 완벽한 합일이라는 주제는 2막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마르케 왕이 밤 사냥을 떠나자 이졸데는 연인 트리스탄에게 건너오라는 신호를 보내지요. 달려온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뜨겁게 포옹하며 영원한 밤과 죽음을 찬미하고 대낮 세계의 덧없는 명예와 삶을 저주합니다. 이들의 사랑의 이중창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트리스탄의 충직한 부하인 쿠르베날이 달려 들어와 “함정에 걸려들었다”라고 외칩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밀회를 눈치 챈 마르케 왕의 신하 멜로트의 계략으로 밤 사냥이 기획된 것이었지요. 밀회 현장에서 발각된 트리스탄에게 마르케 왕은 가장 믿고 아꼈던 트리스탄의 배신에 비통한 심경을 노래합니다. 트리스탄은 "어머니가 나를 낳고 떠나간 밤의 세계로 나도 간다"라고 말하며 멜로트의 칼에 맞아 쓰러집니다.
3막
3막에서 부하 쿠르베날은 트리스탄의 고향인 브르타뉴의 카레올로 주인을 데려와 정성껏 치료합니다. 이졸데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던 트리스탄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줄 이졸데가 마침내 배를 타고 도착했을 때 숨을 거둡니다. 뒤를 이어 마르케 왕의 배가 나타나자 쿠르베날은 부하들과 함께 왕의 부하들에 맞서 싸우다가 멜로트를 죽이고 자신도 쓰러집니다. 두 연인을 용서하러 찾아왔던 마르케 왕은 이 참극에 넋을 잃게 됩니다.
한편 트리스탄과 포옹한 채 정신을 잃고 있던 이졸데는 시녀 브랑게네의 목소리에 눈을 뜨지만, ‘부드럽고 고요하게’ 미소 짓는 트리스탄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최후의 노래인 ‘이졸데의 사랑과 죽음’과 함께 이졸데 역시 트리스탄과 더불어 행복하게 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Waltraud Meier - “Isolde's Liebestod”(발트라우트 마이어 - “이졸데의 사랑과 죽음”)
추천 음반 및 영상물(트리스탄-이졸데-마르케 순)
1. 루트비히 주트하우스, 키르스텐 플락스타드, 요제프 그라인들 등.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및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 합창단. 음반, 1952년
2. 볼프강 빈트가센, 비르기트 닐손, 마티 살미넨 등. 카를 뵘 지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음반, 1966년
3. 르네 콜로, 요한나 마이어, 마티 살미넨 등. 장 피에르 포넬 연출,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DVD, 1983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4. 이언 스토레이, 발트라우트 마이어, 마티 살미넨 등.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밀라노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파트리스 셰로 연출. DVD, 2007년 라 스칼라 극장 실황
글 이용숙 (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