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ald Runnicles/BBC Scottish SO - Wagner, Siegfried Idyll
1870년 크리스마스 날 이른 아침, 지휘자 한스 리히터를 필두로 취리히의 오케스트라에서 선발된 열다섯 명의 연주자들이 루체른 호숫가의 트립셴에 있는 바그너의 저택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바그너의 지시에 따라 부엌에서 조율을 맞춘 다음, 보면대가 놓인 계단에 조용히 늘어섰다. 그리고 저택의 안주인이 일어날 즈음인 7시 30분이 되자 바그너가 새로 작곡한 유려하고 다사로운 관현악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코지마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꿈결 같은 음악소리에 눈을 떴다. 한동안 그녀의 감각과 의식을 무아지경으로 빠트린 그 음률이 잦아들자, 다섯 명의 화동(花童)들을 앞세운 바그너가 침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 다발의 악보를 건네는 게 아닌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남편 바그너가 전날 서른세 번째 생일을 맞은 아내 코지마를 위해서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 특별한 관현악곡은 오늘날 ‘지크프리트 목가’로 불리지만, 원래는 ‘트립셴 목가’로 명명되었었다. 트립셴은 스위스의 루체른에 속한 지역으로, 바그너와 코지마가 그곳의 호숫가 언덕에 있는 저택에서 1866년 3월에서 1872년 4월까지 살았던 사실로 유명하다. 현재 그 저택은 바그너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바그너와 코지마의 아이들은 이 곡을 ‘계단 음악’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역시 이 곡이 처음 연주된 장소에서 유래한 것이리라. 당시 연주자들은 저택의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열했는데, 위에서부터 아래로 제1바이올린 2명, 제2바이올린 2명, 비올라 2명, 플루트 1명, 오보에 1명, 클라리넷 2명, 파곳 1명, 호른 2명, 첼로 1명, 콘트라베이스 1명의 순으로 배치되었고, 비올라를 맡은 리히터는 중간에 잠깐씩 나오는 트럼펫 연주를 겸했다고 한다.
트립셴에 있는 바그너 박물관 전경과 그 뒤로 보이는 필라투스 산봉우리.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징표
이 곡은 바그너가 남긴 관현악곡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럽고 누구나 친숙해지기 쉬운 작품이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목가적인 평화로운 분위기가 지배적이고, 전편에 따스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넘친다. 또 바그너가 당시에 마무리하고 있었던 오페라(악극)에서 가져온 다채로운 선율들이 절묘하게 녹아들어 아기자기한 맛을 자아내며, 클라이맥스에서는 환희에 찬 음률이 찬란히 울려 퍼진다.
제목의 ‘지크프리트’는 바그너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 연작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의 제목이면서, 바그너와 코지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크프리트 바그너는 1869년 6월 6일에 태어났는데, 그의 탄생은 아버지 바그너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열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지크프리트가 태어나기 직전, 바그너와 코지마는 이미 트립셴에서 동거하며 두 딸을 두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합법적인 부부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바그너의 첫 번째 아내인 민나는 186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코지마는 아직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였던 것이다. 더구나 뷜로는 바그너의 제자였고 코지마의 아버지는 바그너의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였기에, 두 사람의 결혼은 결코 축복받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코지마의 초상화, 1879년 42세.
그런 상황에서 조우한 아들의 탄생은 바그너에게 무한한 기쁨이자 일종의 계시였다. 그는 오랫동안 중단했던 악극 <지크프리트>의 작곡을 재개했고, 코지마는 결심을 굳히고 뷜로에게 정식으로 이혼을 요구했다. 그런가 하면 그 해 9월과 이듬해 6월에는 뮌헨에서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의 초연이 거행되었다. 비록 바그너 자신의 의도에는 부합하지 않는 사건이었지만, 그로써 당대 음악계를 주도하는 ‘위대한 작곡가’로서 그의 입지는 한층 공고해졌다.
그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한 1870년 여름, 바그너 가정에는 경사가 연이었다. 우선 7월 18일에 코지마와 뷜로의 결혼무효신청이 법적 인가를 받았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마침내 8월 25일, 바그너와 코지마는 루체른의 중앙교회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지크프리트 목가>는 그 시절 바그너의 성취감과 행복감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하다. 바그너에 의한 작은 ‘가정 교향곡’이라 할 만한 이 목가적인 관현악곡은 연주시간이 짧게는 16분에서 길게는 22분에 이르며, 악극 <지크프리트>에 나오는 여러 가지 선율들과 동기(라이트모티프)들의 유연한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는 E장조, 4/4박자에서 ‘사랑의 평화’ 동기로 조용하게 시작되고, 이후 ‘잠의 동기’가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으로 이어지며 은은한 광채를 더한다. 중간부에서는 독일 민요의 자장가 선율이 오보에로 연주되기도 하며, 이후 ‘세상의 보물’, ‘사랑의 인연’, ‘새소리’ 등 다양한 동기들이 어우러지면서 두어 차례 클라이맥스에 이른 다음, 마지막에는 다시 ‘사랑의 평화’ 동기로 돌아와 조용히 마무리된다.
Wagner, Siegfried Idyll
Sergiu Celibidache, conductor
Münchner Philharmoniker
hilharmonie am Gasteig, München
1993.02.04
추천음반
1.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DG
2. 오토 클렘페러(지휘)/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EMI
3. 한스 크나퍼츠부슈(지휘)/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Westminste
4. 도널드 러니클스(지휘)/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Warner
5. 이반 피셔(지휘)/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Channel Classics
글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 음악에서 보다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느끼기 위해서 머리와 가슴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체험과 상상력, 감동을 중시하는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노트 필자, 네이버캐스트 ‘음악의 선율’ 필진이며, 서울 예술의전당, 성남아트센터, 대구 수성아트피아, 무지크바움, 풍월당 등지에서 클래식 음악감상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