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라벨 ‘거울’(Ravel, Miroirs)

라라와복래 2018. 7. 21. 00:15

Ravel, Miroirs

라벨 ‘거울’

Maurice Ravel

1875-1937

Vlado Perlemuter, piano

1955


Vlado Perlemuter - Ravel, Miroirs

0:00 밤나방(Noctuelles) - 4:35 슬픈 새(Oiseaux tristes) - 8:08 바다 위의 작은 배(Une barque sur l'océan) - 14:25 어릿광대의 아침노래(Alborada del Gracioso) - 20:25 종의 골짜기(La vallée des cloches)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작곡된 라벨의 <거울>은 드뷔시의 <영상>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상에 대한 묘사력과 관찰력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드뷔시의 <영상>이 반영된 이미지에 대한 심리적 환원인 반면, 라벨의 <거울>은 굴절된 이미지에 대한 형체적 산화라고 할 정도로 차이점 또한 갖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드뷔시처럼 대상의 형체를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야에 자의식적인 몇 겹의 층을 두어 굴절된 대상의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관찰한 독창적인 묘사법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라벨은 이 곡에 대해 “지금까지 내 스타일에 익숙해진 음악가들마저도 당황할 정도로, 내 화성 체계에 있어서의 커다란 변화를 담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소나티네>(1903~1905)와 같은 시기에 작곡한 작품이면서도 고전주의적인 특징을 벗어나, 혁신적인 화성과 비르투오소의 이상을 요구하는 연주 기법, 이미지에 대한 특수하고도 개성적인 관찰과 상상력을 담고 있는 <거울>은 라벨의 피아노 작품 가운데 가장 난해한 편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이후 작곡한 <밤의 가스파르>(1908)라는 초현실주의적이고 상장주의적인 작품을 탄생케 한 교두보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라벨의 악보대로 연주하기 어려운 난해한 작품

1906년 프랑스의 비평가 미셸 디미트리 칼보코레시는 리카르도 비녜스가 1906년 1월 6일 국민음악협회에서 라벨의 <거울>을 초연한 일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는 다섯 곡으로 구성된 이 모음곡을 “작품의 느낌만큼이나 테크닉으로도 완벽한 라벨의 수작”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라벨의 독창적인 스타일과 풍부하고 표현력 강한 화성, 정교하게 수놓아진 리듬의 향연을 높이 평가했고, 그 안에서 풍부하고도 다양한 감정을 아우르고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4곡 ‘어릿광대의 아침노래’에서는 유머러스한 느낌과 비르투오소적인 풍모가, 2곡 ‘슬픈 새’와 5곡 ‘종의 골짜기’에서는 수심에 가득 찬 새들의 탄식과 종소리의 아련함과 신비로운 느낌이, 1곡 ‘밤나방’에서는 나방의 무지향적인 변덕스러움과 가벼운 날갯짓에서 비롯된 미세한 파동이, 3곡 ‘바다 위의 작은 배’에서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리듬과 시각적인 효과가 표현되어 있다. 파리 초연에서는 ‘어릿광대의 아침노래’가 앙코르로 연주되었다. ▶라벨(우측)과 그의 작품 <거울>을 초연한 스페인의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 1901년경. 늘 깔끔한 얼굴의 라벨이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찍은 사진은 드물다.

<거울>은 훈련된 청중과 고도로 지적인 연주자가 요구되는 난해한 작품인데, 모음곡 가운데 가장 빠르고 다이내믹한 ‘어릿광대의 아침노래’ 뒤에 조용하고 사색적인 ‘종의 골짜기’가 위치해 있어 음악이 끝나자마자 즉각적인 호응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1920~40년대에 활동한 피아니스트들 대부분은 이 작품을 연주하지도 않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몇몇 연주자들만이 일부 곡만 발췌하여 연주하곤 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내 작품은 해석하지 말고 악보대로만 연주할 것”이라고 요구한 작곡가 라벨의 의도가 20세기 초반의 자의적이고 개성적인 낭만주의적 해석 경향과 상충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어찌 되었든 20세기 중반부터 전곡을 연주하고 연주회장에서 자주 등장하게 된 <거울>은 현대적인, 당시로서는 미래지향적인 특성을 띤 작품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개별적인 동시에 연속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거울>의 다섯 곡은 각기 다른 사람에게 헌정되었다. ‘밤나방’은 작가 레옹-폴 파르그에게, ‘슬픈 새’는 피아니스트인 리카르도 비녜스에게, ‘바다 위의 작은 배’는 화가 폴 소르드에게, ‘어릿광대의 아침노래’는 칼보코레시에게, ‘종의 골짜기’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모리스 들라주에게 그 영광이 돌아갔다.

리듬의 교차, 현란한 음색의 향연을 머금고 있는 ‘바다 위의 작은 배’와 ‘어릿광대의 아침노래’는 라벨이 직접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을 하여 각각 1907년 2월 3일 콩세르 콜롱에서, 그리고 1919년 5월 17일 콩세르 파들루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이 <거울>에 담겨 있는 오케스트라적인 음향과 효과는 라벨 이후에 끊임없이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종의 골짜기’는 스페인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에르네스토 할프터와 영국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퍼시 그레인저가 자신의 편곡 버전을 남겼고, ‘슬픈 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펠릭스 귄터가, ‘밤나방’은 영국 피아니스트 마이클 라운드가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와 NHK 교향악단의 위촉으로 가장 최근인 1993년에 편곡된 바 있다.

1. 밤나방 Noctuelles

정교한 템포 변화와 어려운 페달링, 기계적일 정도로 정확한 성부 진행과 다이내믹의 점진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밤나방’은 연주하기가 매우 어렵다. “헛간에서 밤나방들이 꼴사납게 한쪽 들보에서 다른 쪽으로 날아다니는”(레옹-폴 파르그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은) 모습을, 반영이라기보다는 굴절된 시각에서 바라본 곡이다. 특히 나방의 신비로운 움직임과 부산스러운 분위기, 더불어 불빛에 반사되는 듯한 나방가루의 광채, 작곡가가 루바토로 지시한 순간적인 생명력을 연상시키는 패시지들은 라벨이 <물의 유희>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사물에 대한 묘사의 극한을 보여준다. 파르그를 비롯하여 작품 <거울>의 곡들을 헌정 받은 인물들은, 라벨이 레자파슈(Les Apaches)라고 명명한 일군의 미래주의적 프랑스 음악가 모임 소속이었다.

2. 슬픈 새 Oiseaux tristes

라벨이 가장 좋아했다고 알려진 ‘슬픈 새’는 새에 대한 쿠프랭적인 취향과 드뷔시적인 색채감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작곡가 자신의 이국적인 개성과 독창적인 시정이 빛을 발하는 명곡이다. “여름의 가장 더운 시기에 어두컴컴한 숲이 주는 압박감에 길을 잃은 새들”의 인상을 환기시킨 것이라고 작곡가는 언급했는데, 이에 따르면 새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새의 불안함을 사람의 심리를 통해 굴절시켜 음악화한 곡이라 하겠다. 균형 잡힌 음색을 바탕으로 장식음의 시그널적인 효과와 페달링에 의한 고요한 분위기가 중첩되는 이 곡은 라벨의 발전된 스타일과 어법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라벨은 ‘애드리브에 가깝도록’(presque ad lib)이라는 지시어를 적어 놓아 <거울>에서 유일하게 연주자의 자의적인 해석을 유도하기도 했다.

3. 바다 위의 작은 배 Une barque sur l'océan

‘물의 음악’의 대가다운 라벨의 점묘적이면서도 영상적인 스타일이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리스트의 <에스테 장의 분수>가 더욱 발전된 듯한 느낌을 준다. 파도에 휩쓸려 부서질 듯한 아르페지오와 햇빛에 반짝이는 듯한 트레몰로, 건반 전체의 울림을 통한 바다의 소리를 표현한 이 곡은 바다를 상징하는 왼손 반주의 아르페지오와 작은 배를 상징하는 오른손의 음형들이 유연하고 포근하면서도 격정적인 동시에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게다가 피아니시시시모(pppp)로부터 포르티시시모(fff)에 걸치는 광대한 다이내믹 레인지를 갖고 있어 피아니스트에게 터치와 음량 조절, 밸런싱에 있어서 극도의 집중력과 파괴력을 요구하는 만큼 라벨이 요구한 대로 악보대로만 연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4. 어릿광대의 아침노래 Alborada del gracioso

<거울> 가운데 가장 신나고 유명한 곡인 <어릿광대의 아침노래>에 대해 발터 기제킹은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려 있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음악적 표현을 넘어서서 연주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곡이다. 복잡한 디나미크(강약법, Dynamik)와 연타음, 이중 글리산도, 왕복 아르페지오, 빈번한 옥타브 도약과 양손 교차가 펼쳐지지만 곡의 내용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스페인적인 리듬을 중심으로 자유분방하지만 불안에 가득 차고 깡마른 듯한 음악적 표현들이 넘쳐흐르는 기이한 열정의 향연을 노래 부른다. ▶폴 세잔, <어릿광대>, 1889-1890년

5. 종의 골짜기 La vallée des cloches

앞선 네 곡의 격렬하면서도 난해한 구성을 마무리하는 듯한 디저트와 같은 곡이다. 조용하고도 감각적이지만 해석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첫 대목에 등장하는 아득히 들리는 타종 소리와 이내 울려 퍼지는 잔향의 효과부터, 한편으로는 단순하게 보이지만 이에 입체감과 실재감을 부여하는 것은 피아니스트에게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연속적으로 들리는 종의 재질인 금속의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과 그 음파가 계곡과 나뭇잎 등에 부드럽게 울려 퍼지며 묻어나는 듯한 느낌을 공존시키는 것은 보통의 감수성을 가진 피아니스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특별한 재능이다. 정중동(靜中動)의 공간에 미처 인식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종의 존재감은 어느새 무(無)의 세계로 소멸해버리며 시적 감흥은 종결된다.

Ravel, Miroirs

Jean-Yves Thibaudet, piano

Wang Zaal,Beurs van Berlage,Amsterdam

199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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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음반

1. 로베르 카자드쥐. SONY

2. 발터 기제킹. EMI

3. 장-필리프 콜라르. EMI

4. 장-이브 티보데. DECCA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왔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음악의 선율>클래식 명곡 명연주 201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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