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밥그릇 경전' - 이덕규

라라와복래 2018. 9. 14. 05:12

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이 작품은 2004년 이덕규 시인의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입니다.

*‘밥그릇이나 씻어라’는 조주종심(趙州從諗) 선사와 학인(學人)과의 선문답 중 일구(一句)입니다. 이 일화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학인 하나가 조주에게 말을 걸어 왔다.

  “제자는 이 선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컨대 스승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시어 저를 선도하여 주십시오.”

  “아침은 먹었는가?”

  “네, 스승님.”

  “그러면 어서 가서 밥그릇이나 씻게!”

  선사의 이 말을 듣자 학인은 그 자리에서 대오 각성하였다.

시인 이덕규 1961년 5월 화성 출생. 1998년 시 ‘양수기’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놈이었습니다』(문학동네 2015) 등이 있다. 노작 홍사용문학관 관장 역임(2009.12~2015.12). 2016년 제9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