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이 작품은 2004년 이덕규 시인의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입니다. *‘밥그릇이나 씻어라’는 조주종심(趙州從諗) 선사와 학인(學人)과의 선문답 중 일구(一句)입니다. 이 일화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학인 하나가 조주에게 말을 걸어 왔다. “제자는 이 선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컨대 스승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시어 저를 선도하여 주십시오.” “아침은 먹었는가?” “네, 스승님.” “그러면 어서 가서 밥그릇이나 씻게!” 선사의 이 말을 듣자 학인은 그 자리에서 대오 각성하였다.
시인 이덕규 1961년 5월 화성 출생. 1998년 시 ‘양수기’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놈이었습니다』(문학동네 2015) 등이 있다. 노작 홍사용문학관 관장 역임(2009.12~2015.12). 2016년 제9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정리 : 라라와복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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