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2곡 “풍향기”

라라와복래 2018. 9. 30. 01:09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2곡 “풍향기”

Ian Bostridge/Julius Drake - Schubert, Die Winterreise 2. Die Wetterfahne (풍향기)

풍향기 (해설: 이언 보스트리지)

바람이 풍향기를 희롱하네, Der Wind spielt mit der Wetterfahne

내 아름다운 연인의 집 위에서. Auf meines schönen Liebchens Haus.

나는 벌써부터 망상에 빠져 Da dacht’ ich schon in meinem Wahne,

그것이 불쌍한 도망자를 조롱한다고 생각하네. Sie pfiff den armen Flüchtling aus.

그는 지붕 위에 나부끼는 깃발을 Er hätt’ es ehr bemerken sollen,

좀 더 일찍 보아야 했어. Des Hauses aufgestecktes Schild,

그랬다면 지조 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So hätt’ er nimmer suchen wollen

그 집에서 찾는 일은 없었을 거야. Im Haus ein treues Frauenbild.

바람은 내 마음도 희롱하네, Der Wind spielt drinnen mit den Herzen

지붕 위의 풍향기를 돌렸듯이, 그리 요란하지 않을 뿐. Wie auf dem Dach, nur nicht so laut.

그 집 사람들은 왜 나의 고통을 캐물을까? Was fragen sie nach meinen Schmerzen?

그들의 아이는 부유한 신부지. Ihr Kind ist eine reiche Braut.

풍향기는 침묵에 잠기고... 나그네는 추위에 몸을 떤다

슈베르트의 원숙한 노래들은 대부분이 피아노 도입부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도입부는 악상을 우리에게 소개하여, 음악으로서, 음악만으로 몰입하도록 준비시킨다. 이어 목소리가 들어온다. 우리에게 주목해야 할 상황을 던져줌으로써 악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려준다. 이 곡 ‘풍향기’에서는 피아노가 아니라 아르페지오(아르페지오는 하프에서 유래한 용어로, 화음에 속한 음들을 동시에 연주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하나하나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로 솟구쳤다가 내려온다. 오르내림 속에 반복적인 음들과 트릴(trill)이 들린다. 마치 에너지가 휘몰아쳤다가 충동이 스르르 빠져나가면서 잠잠해지는 것 같다. 이 도입부 악상은 노래 곳곳에서 반복되고, 가창이 끝나고 난 뒤에 또다시 마무리로 등장한다.

이어지는 가사를 보면 피아노 도입부가 가사의 분위기를 앞서 표현한 것임을 확실히 알려준다. 슈베르트의 전형적 장치로 그저 바깥세상의 일만이 아니라 주인공의, 나아가 청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도 나타낸다. 바람이 연인의 집 지붕에 걸린 풍향기를 돌리고, 주인공은 망상에 빠져 그것이 자신을 조롱하듯 요란하게 쫓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 가지 생각이 격돌한다. 금속 풍향기의 요란한 소리, 나그네의 망상, 가족이 자신을 조롱하고 떠나라고 말한다는 미친 생각. 어쨌든 그가 이 집 가족이 아님은 분명하니까.

무엇보다 풍향기는 가족의 가식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일종의 문장(紋章)처럼 지붕에 걸려 안에 사는 사람들의 지위를 과시한다. 도망치는 우리의 시인에게는 과분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불편함과는 별개로, 첫 곡에서처럼 여기서도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실치 않음을 기억하자. 그들이 그를 쫓아냈을까, 아니면 그가 자발적으로 나갔을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요란한 금속 장치의 소리는 가족이 그를 쫓아낸 것이라고 풀이된다. 우리는 이런 쫓아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 옛날 유럽 마을에서는 사회 규범을 어기거나 배척당한 사람에게 소란스러운 음악을 연주하여 처벌했다. 그는 빽빽거리는 피리 소리와 냄비 두들기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와 같은 장치가 우리의 상상을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자. 풍향기의 독일어 원어는 날씨(Wetter)와 깃발(Fahne)이 합쳐진 ‘Wetterfahne’이고, 영어로는 수탉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주로 ‘weathercock’라고 불린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풍향기의 예측 불가함은 그 집안에 지조 있고 정결을 지키는 여성이 없다는 표시로 보기 충분하다. 여성을 뜻하는 말로 다소 예스러운 용어 Frauenbild(‘여성의 이미지’라는 뜻)를 사용하여 마치 그가 조신한 처자를 기대했다는 듯 소원하고 아이러니한 효과를 거둔다. ▶풍향기

시의 마지막 네 줄은 슈베르트에게 각별히 중요하다. 그는 이 대목을 반복하여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의미임을 강조하는 한편, 안락한 집안의 생활에서 벗어나기로 한 나그네의 판단이 옳음을 음악으로 강화한다. 여기서 시인 뮐러는 저도 모르게 슈베르트적인 방식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다. “바람은 내 마음도 희롱하네,/ 지붕 위의 풍향기를 돌렸듯이, 그리 요란하지 않을 뿐”이라는 두 행을 통해 음악이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음을 확실히 말한다. 슈베르트가 이 대목을 두 번째로 반복할 때 선율의 윤곽에 살짝 변화를 줘서 보다 강렬하게 만든다. 하지만 셈여림은 마찬가지로 ‘여리게’에서 ‘세게’로 표기된 마지막 두 줄의 난폭함과 대조를 이룬다. 이 마지막 두 줄은 우리가 나그네의 심리 상태와 그가 떠나기로 한 여정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그 집 사람들은 왜 나의 고통을 캐물을까? 그들의 아이는 부유한 신부지.” 앞의 물음은 집요하게 들리고, 뒤의 문장은 왠지 빈정대며 승리를 만끽하는 것 같다. “그 집 사람들은…”이 반복될 때는 확신에 차서 몰아붙이는 느낌을 준다. 이 대목은 한 차례 더 등장하는데, 음높이가 올라가고 집요함도 더해진다. “그들의 아이는…”이 반복될 때는 선율이 더 들쑥날쑥하고 신경질적으로 들리며 설상가상 요란한 장식음이 거든다. 그런 다음 피아노에서 돈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12개의 불꽃 튀는 상행 16분음표가 우리를 다시 도입부의 피아노 음형으로 이끈다. 음악은 마지막으로 부르르 떨며 잦아든다. 풍향기는 침묵에 잠기고, 가족은 평화롭게 집 안에 있고, 나그네는 추위에 몸을 떤다.


이언 보스트리지

이 해설은 세계적인 테너 이언 보스트리지가 지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장호연 옮김, 바다출판사, 2016)에서 옮긴 것입니다. 30년 넘게 무대에서 <겨울 나그네>를 부른 성악가로서의 경험과 유럽 근대사를 전공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로서의 지식을 쌓은 보스트리지가 과거와 현재의 문헌들을 뒤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2년에 걸쳐 집필한 책입니다. 작곡가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외부 상황을 꼼꼼히 추적함으로써 독자에게 음악 감상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주는 이 책은 새로운 형식의 음악 해설서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뮐러의 시 우리말 번역은, 보스트리지가 독일어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이를 옮긴이 장호연이 번역한 것임을 알려둡니다. <겨울 나그네> 24곡 해설을 이언 보스트리지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서 추려 한 곡씩 차례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참고로 보스트리지의 해설은 한 곡당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입니다.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