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프랑크 ‘천사의 빵’(Franck, Panis angelicus)

라라와복래 2018. 10. 1. 02:30

Franck, Panis angelicus

프랑크 ‘천사의 빵’

César Franck

1822-1890

Luciano Pavarotti, tenor

Franz-Paul Decker, conductor

Les Petits Chanteurs du Mont-Royal (Boys choir)

Les Disciples de Massenet (Adult choir)

Notre Dame Cathedral in Montréal

1978.12


Luciano Pavarotti - Franck, Panis angelicus


Panis angelicus 천사의 빵이

fit panis hominum. 인간의 빵이 되도다.

Dat panis cœlicus 하늘의 빵이

figuris terminum. 표징을 이루도다.

O res mirabilis! 이 놀라운 신비여!

Manducat Dominum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Pauper, Pauper, 가난한 자, 가난한 자,

servus et humilis. 종살이하는 자, 비천한 자.

‘성체성사의 신비’를 노래해

보통 이 노래를 ‘생명의 양식’이라는 제목으로 일컫는데, 라틴어 ‘Panis angelicus’를 직역하면 ‘천사(angelicus)의 빵(panis)’이 됩니다. ‘천사의 빵’이란 성찬식에 쓰이는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뜻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미사 전례 중에 사제의 축성기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가톨릭 신앙의 신비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성서의 4복음서 및 바울로 사도의 서간에 들어 있는 최후의 만찬에 관한 서술대로,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 말씀과 행위를 통해 이 성체성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찬식 때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시며 스스로를 희생의 제물로 성부께 바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 교의의 핵심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런 성체성사의 교의에 따라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은 것이며 미사 전례 중 성찬식 때 부르는 것입니다.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삼위일체대축일 다음에 오는 첫 번째 목요일을 ‘그리스도 성체 축일’로 선포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체 축일을 위한 전례문을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1) 구원을 위한 희생(O Salutaris Hostia), (2) 지존하신 성체(Tantum Ergo), (3) 천사의 빵(Panis Angelcus)입니다. 성체 찬미가 (1)에서는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천국 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2)에서는 계약의 완성을 위해 인간의 육신을 취해 세상에 오신 ‘말씀’의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3)에서는 성체성사로 미약하고 가난한 인간을 먹여주시는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찬미합니다.

‘천사의 빵’은 ‘천사의 양식’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은 찬송가집이나 성가집에 들어 있는 곡 제목에서 유래된 것 같으나, 이들 곡의 가사는 본래의 라틴어 가사와는 많이 다릅니다. 따라서 ‘생명의 양식’이라고 웹에 소개해 놓은 가사 대부분은 이 곡 본래의 가사와 동떨어진 것이며 관련이 없습니다. 라틴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가사를 참작하여 라라와복래 나름대로 번역한 것이 위 우리말 가사입니다. ‘figuris terminum(표징을 이루도다)’라는 부분 번역에 고심했습니다. 구약에는 그리스도(메시아)가 오는 것을 언급하는 여러 상징(figuris)이 있는데, 예수가 옴으로써 그 상징이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의 신비’에 맞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표징’은 ‘상징’의 종교적 표현으로 곧잘 쓰이는 단어입니다.

만년에 이르러 걸작들을 작곡한 세자르 프랑크

벨기에 리에주에서 독일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세자르 프랑크는 어릴 때부터 그림과 음악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요제프 프랑크는 이 영재 소년을 프란츠 리스트처럼 피아니스트-작곡가로 키우기 위해 리에주 왕립음악원에 입학시켰습니다. 12살 때인 1834년에는 새로 벨기에 국왕이 된 레오폴트 1세 앞에서 첫 공식 연주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니콜라스-요제프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좀 더 큰 무대로 자식들을 진출시키기 위해 가족 모두를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합니다.

아버지는 세자르를 동생과 함께 파리음악원에 입학시키고자 했으나 당시 파리음악원은 외국인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백방으로 손을 쓴 아버지는 1837년에 파리 시민권을 얻고 아이들은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 됩니다. 니콜라스-요제프는 아이들을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기보다는 아이들이 대중 앞에서 콘서트나 리사이틀을 열어 벌어들이는 수입에 눈독을 더 들였습니다. 결국 세자르는 성인이 된 1842년에 불분명한 사유로 음악원을 자퇴하고 맙니다.

세자르의 가족은 벨기에로 돌아왔으나 콘서트 초청도 드물었고 평도 좋지 않아 수입이 끊기자 2년을 채 버티지 못합니다. 파리로 되돌아온 세자르는 본격적으로 작곡에 매달리고 일련의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들을 본 리스트가 호평을 하고 몇 해 뒤에는 바이마르에서 몇 곡을 연주합니다. 그러나 그의 첫 오라토리오 작품인 <룻(Ruth)>이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무관심으로 공연에 실패하자 프랑크는 작곡을 접고 피아노 강습과 반주자로 나섭니다. 물론 수입이 생긴 아버지는 대환영이었죠.

이 시기에 프랑크의 남은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두 가지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나는 그의 부모와의 인연이 거의 끊기게 된 것입니다. 프랑크는 자신의 피아노 교습생인 펠리시테 사이요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는데, 아버지가 그녀에게 보내는 연서를 찢어버리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와 펠리시테 가족의 집으로 들어가버린 것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단원이었는데 프랑크를 환대했습니다. 1848년 2월 28일 26살이 된 프랑크는 펠리시테와 로레트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마침 파리혁명이 한창인 때라 혁명군이 성당 앞에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넘어 들어가서 간신히 치를 수 있었다는군요.

또 하나는 프랑크가 로레트의 노트르담 성당의 보조 오르간 연주자로 지명된 것입니다. 이는 단지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게 된 것뿐만 아니라 그가 교회음악에 천착하게 된 계기가 됨으로써 이후의 그의 음악세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후 평생을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한 점은 안톤 브루크너와도 닮았습니다. 실제로 프랑크는 1869년 노트르담 성당에서 있은 브루크너의 오르간 연주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개량된 독일 오르간 연구에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는 프랑크를 “바흐 이래로 최고의 오르간 연주자”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오르간을 연주하는 세자르 프랑크, 1885년

1872년부터 프랑크는 파리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만년의 걸작들을 탄생시킵니다. 그는 온화한 인품으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당시 오페라 중심이었던 프랑스 음악의 흐름에 제동을 걸며 바흐의 대위법을 강조하여 새로운 음악 어법을 발전시켰습니다. 프랑크의 제자들은 이러한 그의 정신을 이어받았으며, 그중 수제자인 뱅상 댕디(Vincent d'Indy, 1851-1931)가 유명합니다. 뱅상 댕디는 “프랑크는 아름다운 화음 하나를 작곡한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라는 증언을 남겼습니다.

Franck, Panis angelicus

Andrea Bocelli, singer

Myung-Whun Chung, conductor

Orchestra e Coro dell'Accademia Nazionale di Santa Cecilia

Basilica di Santa Maria sopra Minerva, Roma

1994.12.31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