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도니체티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Donizetti, Lucia di Lammermoor)

라라와복래 2018. 10. 14. 14:55

Donizetti, Lucia di Lammermoor

도니체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Gaetano Donizetti

1797-1848

Lucia: Lisette Oropesa

Edgardo: Javier Camarena

Enrico: Artur Rucinski

Raimondo: Roberto Tagliavini

Arturo: Yijie Shi

Alisa: Marina Pinchuk

Coro y Orquesta del Teatro Real

Conductor: Daniel Oren

Teatro Real de Madrid

2018.07.07


Daniel Oren/Teatro Real de Madrid 2018 - Donizetti, Lucia di Lammermoor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였던 월터 스콧(Walter Scott, 1771-1832)은 정략결혼을 강요당한 신부가 첫날밤에 신랑을 죽인 사건에 호기심을 느껴, 이 비극적인 실화를 1819년 <래머무어의 신부>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발표했습니다. 그 실제 사건은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달림플 가 스테어 경의 딸 재닛이 러더포드 가의 아들을 부모 몰래 사귀었는데, 남자는 좋은 가문 출신이긴 했지만 재산도 없고 정치적 입장도 반대편이어서 결코 스테어 집안 부모의 하락을 받을 수 있는 결혼 상대가 아니었다는 거죠. 스테어 가의 어머니는 딸의 교제 사실을 알고 둘을 갈라놓는 한편 적합한 신랑감을 물색해 결혼을 급히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첫날밤에 딸은 미쳐버려 신방에서 신랑을 칼로 난도질합니다. 그리고 끝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재닛은 2주 후 세상을 떠납니다.

스콧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이름만 루시 애쉬튼과 에드가 레이븐즈우드로 바뀌었을 뿐 실화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습니다. 살해될 뻔한 신랑은 살아나서 회복되지만, 미쳐버린 여주인공 루시는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하죠. 스콧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되기 전인 1707년으로 이 사건의 연대를 설정했습니다. 단순히 원수 가문 젊은이들의 사랑만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몰락한 귀족가문과 권력을 얻은 신흥 귀족가문을 대비시킨 일종의 역사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큰 인기를 끌며 유럽 전역에 알려졌고, 작곡가 도니체티는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자 곧장 이 소재를 떠올렸답니다. 대본작가 살바토레 카마라노와 함께 도니체티가 스콧의 작품을 토대로 만든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1835년 9월 26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낭만주의 시대는 ‘실성의 시대’

도니체티의 오페라에서는 주인공들의 영국식 이름이 이탈리아식으로 바뀝니다. 루시는 루치아, 에드가는 에드가르도, 헨리는 엔리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콧 원작에서 신교-구교 갈등을 그린 역사적 맥락은 오페라에 와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7세기 말, 스코틀랜드 람메르무어의 영주 엔리코는 가문을 파산에서 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여동생 루치아와 부유한 권력자 아르투로의 정략결혼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루치아는 엔리코에게 화를 입은 원수 가문의 아들 에드가르도와 이미 깊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정략결혼에 응하지 않으려는 루치아를 회유하고 협박하다가 엔리코는 잠시 외국에 가 있는 에드가르도의 편지를 위조해 마치 그가 변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죠.

혼란과 절망 속에서 루치아는 오빠의 강요에 못 이겨 아르투로와 혼인서약을 하는데, 바로 그 결혼 피로연장에 방금 귀국한 에드가르도가 나타나 반지를 빼 던지며 루치아를 맹렬히 비난합니다. 너무나 큰 슬픔과 분노로 실성하고 만 루치아는 신방에서 신랑 아르투로를 칼로 찔러 죽인 뒤 피 묻은 잠옷 차림으로 피로연장에 다시 나타나 저 유명한 ‘광란의 장면’을 연출하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루치아는 탈진해 죽음을 맞이하고, 그 소식을 들은 에드가르도 역시 루치아의 뒤를 따르려고 자결합니다.

이 오페라의 세 주인공은 모두 뚜렷한 개성의 소유자들입니다. 바리톤이 노래하는 엔리코는 가문을 위해 여동생을 희생시키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주인공으로, 남녀 주인공의 순수한 사랑을 방해하는 악인으로 보일 수 있죠. 하지만 사실 악역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귀족 남성상입니다. 테너 주인공 에드가르도는 오페라 테너 배역의 전형이죠. 원수 집안의 딸 루치아를 사랑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지만, 연인이 자신을 배신한 것으로 쉽게 오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혈기방자하고 직선적인 성격입니다.

여주인공 루치아는 사랑에 아무런 조건을 걸지 않는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은 존재지만, 오빠의 결혼 강요와 연인의 냉대에 극도의 심적 고통을 겪다가 ‘광기’라는 보호막 속으로 피신해버립니다. 그러나 광기에 이르기 직전까지 루치아는 자신의 선택(원수 가문의 남자와의 사랑)을 방해하는 주변 세계 전체를 상대로 처절한 투쟁을 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엇에 대해서도 자기결정권을 지닐 수 없었던 가부장적인 시대의 연약한 여주인공이지만, 루치아는 마침내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까지 온몸으로 세상에 저항합니다.

낭만주의 시대는 ‘실성의 시대’였습니다. 주변 세계의 냉혹한 현실주의와 이해타산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순수한 주인공들을 양산한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비현실적인 기이한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며 그 환상 속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려 했던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광기와 착란을 일상화했습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격정적 사랑은 죽음에 대한 열망을 낳았고, 애절하게 사랑했던 두 연인의 죽음(동반자살)은 찬란한 사랑의 승리로 간주되었지요. 그래서 노년에 낭만주의 사조를 맞이하게 된 독일의 고전주의 작가 괴테는 ‘낭만주의는 병적인 것이다’라고 말하기에 이릅니다.

여성에게 자기결정권이 없었던 시대의 비극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bel canto, 성악가에게 유연한 가창과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했던 19세기 전반기의 오페라)에서는 특히 이런 낭만주의적인 주인공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광란이나 실성의 장면도 상당히 흔하죠. 도니체티의 첫 성공작 <안나 볼레나>, 역시 같은 시대 벨칸토의 거장인 벨리니의 <청교도>와 <몽유병자 여인> 등에도 광란의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20여 분에 걸쳐 광란의 아리아가 전개되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단연 낭만주의 벨칸토 오페라의 절정입니다. 이 아리아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여주인공 소프라노의 가창력과 연기력이 낱낱이 드러나는데다 관객을 만족시키기도 무척 어려운 곡입니다. 이 ‘광란의 장면’에서 플루트와 경쟁하듯 또는 화답하듯 전개되는 소프라노의 기교는 그저 기교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목소리를 악기처럼 자유자재로 다뤄가며 극한의 콜로라투라 기교에 도전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전아(典雅)한 선율에 담긴 격렬한 감정과 광기를 실감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부르면 객석을 감동의 홍수에 빠트릴 수 있지만, 기교든 감정 전달이든 어느 한쪽이 부족하면 부담스럽고 지루해질 수도 있는 어려운 역이죠.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탁월한 표현력으로 루치아 역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고, 이후의 모든 루치아는 칼라스와 비교되었습니다. 베르디라면 이런 극적인 비극 대본에 대단히 격정적인 선율을 입혔겠지만, 벨칸토 시대의 도니체티는 슬픔도 분노도 광기도 우아하고 서정적인 멜로디와 화려한 콜로라투라 기교에 담아냈습니다.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의 음악적 밀도가 약한 것은 성악적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Lisette Oropesa - Mad scene from ‘Lucia di Lammermoor’ (Teatro Real de Madrid 2018)

추천 음반 및 영상물 (루치아-에드가르도-엔리코-라이몬도 순)

1. 마리아 칼라스, 주세페 디 스테파노, 티토 고비, 라파엘레 아리에 등. 툴리오 세라핀 지휘, 피렌체 5월음악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1953년 녹음. 음반

2. 존 서덜랜드, 루치아노 파바로티, 셰릴 밀른즈, 니콜라이 기아우로프 등. 리처드 보닝 지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1971년 녹음. 음반

3. 존 서덜랜드, 알프레도 크라우스, 파블로 엘비라, 폴 플리쉬카 등. 리처드 보닝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브루스 도넬 연출, 1982년 공연 실황. DVD(한글 자막)

4. 안나 네트렙코, 표트르 베찰라, 마리우쉬 크비첸, 일다르 압드라차코프 등. 마르코 아르밀리아토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메리 짐머만 프로덕션, 2009년 공연 실황. DVD(한글 자막)

이용숙 (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음악의 선율>클래식 명곡 명연주 20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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