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라라와복래 2010. 12. 31. 00:09
 

 

 

 

청전(靑田) 이상범

1897~1972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은 1897년 9월 21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를 졸업하고 1925년부터 선전(鮮展) 특선 10회에 이르렀으며, 1927년부터 동아일보의 미술책임 기자로 근무하다가 1938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피검되었다. 1938년부터 선전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47년 종합미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1949년 홍익대학교 교수, 1949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겸하고 1953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4년 예술원회원, 1956년 미술가협회 고문에 추대되고, 1961년 홍익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63년 3·l문화상 본상, 1966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작품세계는 초기에는 스승이었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영향을 받아 남북종(南北宗) 절충화풍을 보였으나 점차 독자적 세계를 개척,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그려냈다. 대표작품으로 창덕궁 경훈각 벽화, 원각사 벽화, 설로도(雪路圖), 고원귀려도(高原歸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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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무림(高遠霧林) 1968년, 종이에 수묵담채, 77×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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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山家)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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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청류(山家淸流)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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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효색(山家曉色)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9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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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수장(山高水長)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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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고은(林泉高隱)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1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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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강어락(春江漁樂) 1954년, 종이에 수묵담채, 3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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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산유거(春山幽居)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83×84㎝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은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30대 후반에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표적인 한국 근대 미술가를 뽑을 때면 항상 그는 첫 번째로 손꼽힌다. 그가 이처럼 유명한 것은 산수화에서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고 우리 근대 미술의 자부심을 살려줬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개성과 창의력은 우리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민족 공통의 정서와 미의식을 자극하고 국민적 공감력을 지닌 한국적 풍경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게 생각된다.

 

청전의 산수화를 보면 야트막한 산등성과 맑은 계곡을 그린 것이 한국의 전형적인 산촌의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어느 곳의 실경(實景)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은 절대로 관념산수가 아닌 것이다. 또 청전 산수화는 농부와 아낙네가 등장하는 시골풍경이지만 그것은 결코 농촌의 리얼리티를 담아낸 것이 아니라 번잡한 도회적 세속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어 조촐히 살아가는 아름답고 온정이 깃든 우리네 마음속의 고향인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유전자처럼 전래되어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미지의 고향 풍경 같은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청전의 산수화는 21세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한 시대의 획을 긋는 화가로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화실 : 전 생활을 여기에서 모색

 

누하동 오가리五街里 구불구불 구불어진 골목길 막바지에 조그마한 화실 하나 장만한 지도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나는 이 화실의 장치에 대한 관심보다도 내가 이 화실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기 위해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무엇보다도 행복감을 느낀다.

 

참으로 나의 이 조그마한 화실은 나의 모든 창조적인 계기를 계시해 주고 정리해주면서 실현에 옮겨주는 유일한 일터이다. 나의 모든 생활과 생명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이곳에서 모색된다. 나이 육십이 가까워가니 사고방법과 화풍이 젊은 사람들과 자연히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낡은 형식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진격進擊하도록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모색이 나의 화실의 최근의 분위기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현대를 이해하고 현대를 연구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고유한 민족성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서양사람과 또는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취를 나타낼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화실의 창 너머로 물건 팔러 온 여인이나 또는 시골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구경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드시 그분들에게 "이 그림을 보시고 어떻게 느끼십니까" 하고 그 감상을 물어본다. 이리하여 어떠한 사람이라도 우리나라의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고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나타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 정서가 어떻게 하면 현대라는 이 시대에서 창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지금 화실에서 모색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 화실에서 이와 같이 하나의 새로운 것을 우리의 고유한 전통 밑에서 찾고 연구해 나아가려는 학도의 마음을 갖는다. 이러한 마음이 나를 항상 젊게 하고 언제나 진격한 작풍을 갖게 하며 또 앞으로도 내가 더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북돋워 주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갖지 못한 개인전을 나는 또 이 화실에서 꿈꾸어 본다. 참으로 단체전에 비해서 개인전이란 한 작가를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며 또 그 작품의 진가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개인전을 퍽이나 어렵게 보게 되고 좀처럼 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가져 보겠다는 꿈이 살아 있다. 그것이 앞으로 1년이 될지 2, 3년이 될지 모르나 꼭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전은 그 작가의 생명과 생활의 숨김없는 결정체를 그대로 내놓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955-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