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그림으로 읽는 철학] 반 에이크 '수태고지'

라라와복래 2011. 1. 3. 05:39
 

 

 

[그림으로 읽는 철학]

반 에이크 '수태고지'

“어서 오너라, 은총을 받은 이여!”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모두들 숨이 멎는 것 같다고 표현했던 그림이 있습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심장인 저 그림, 바로 반 에이크(Van Eyck)의 ‘수태고지’입니다. 많은 수태고지가 있으나 에이크의 수태고지가 빛나는 것은 천사와 마리아의 눈높이 때문입니다. 눈높이가 그들 관계의 온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는 대천사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이 입고 있는 저 화려하고 화사한 옷, 한 번 만져보고 싶지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날개까지 저 섬세한 옷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라기보다 영광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저 옷은 결핍도, 자만도 없이 충만한 존재의 외화(外華)입니다. 우리 속의 수호천사가 바로 저런 모습 아닐까요?

 

얀 반 에이크, ‘수태고지’, 1425~30년, 나무 위에 유채, 93×37㎝,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그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풀어놓은 말은 그림의 일부입니다. “아베 그라티아 플레나(AVE GRATIA PLENA).” 천천히 반복해서 발음해 보십시오. 아베 그라티아 플레나! 그 뜻이 뭔지 몰라도 따뜻해지는 문장이지요? 대천사에게서 나온 축복의 말은 이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은총을 받은 이여.”

 

마리아를 친숙하게 느끼는 미소와 몸짓으로 봐서 말씀(Logos)을 전하는 천사가 가지고 온 것은 ‘은총’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은총의 내용이 뭐지요? 그 은총이라는 것은 그림의 제목처럼 수태입니다. 분명 수태는 은총이지요? 그런데 상황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겁니다. 처녀가 임신했을 때는 돌로 내리치는 나라에서 처녀 마리아의 수태가 어찌 온전한 은총일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놀랐습니다. 그 놀람은 일차적으로는 두려움에서 온 것이겠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운명인데 그게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야 하는 모멸적인 것이라니요!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이 숨이 멎는 거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마리아의 두려움에 공감하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림은 바로 그 다음 순간, 두려움이 신비로 변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을 보십시오. 파란옷의 순수한 그녀는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온, 의지가 굳은 여인의 얼굴입니다. 그런 여인이 뭔가 자신을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을 신비와 환상과 기적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가브리엘의 ‘은총’의 말과 만나 축복이 된 것이지요. 만일 마리아가 가련형의 여인이었다면 그 크나큰 운명의 바람에 휘청거리며 비틀거렸겠지요?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은총이겠습니까? 강요된 은총은 은총이라기보다 폭력인 걸요. 보십시오. 저 그림의 힘은 천사의 미소가 자연스레 마리아의 신비로 흐르고, 마리아의 신비와 경이가 천사의 온화함과 짝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저 그림에 매료되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신비를 알고 있기 때문인 거겠지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로지 경이만이 있는 그 축복! 그 축복받은 경이와 신비의 힘으로 거듭나 마리아는 무거운 운명에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아이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엄마의 힘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고 키워가게 된 겁니다.

 

이제 그림의 배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닥의 타일이나 벽면에, 삼손에서 모세 그리고 다윗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유명한 영웅들과 사건들이 삽화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 모두가 아이를 가진 마리아의 신비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진 마리아는 돌연변이로 태어난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오래된 전통이 품어 키운 전통의 꽃이라는 거겠지요.

 

신묘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이생에서 키워내야 할 우리의 소중한 꿈, 새로운 태양이 수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던져진 왜소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자연과 역사가 마침내 낳은 세계의 주인공인 겁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품고 있는 신의 아이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에 눈뜨는 순간 우리는 부드럽게 우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의 수호천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수원대 이주향 교수(철학)가 오늘부터(2011-01-03) 경향신문 오피니언 지면에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이란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화가나 미술평론가들의 미학적 또는 미술사적 그림 감상이나 평은 있어 왔지만, 그림에 대해 철학적인 접근으로 글을 펼쳐내기는 이주향 교수의 이번 시도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가이기도 하며 평소 철학이 쉽고 재미있는 학문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글들을 써온 이주향 교수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연재에 즐거운 기대를 걸며 앞으로 계속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