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박수근 그림이 박완서 구원했다

라라와복래 2011. 6. 23. 13:03
 

 

 

박수근 그림이 박완서 구원했다


지금부터 61년 전 이맘때, 서울대에 갓 입학한 여학생은 꿈과 자부심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곧 터진 한국전쟁으로 학업은 고사하고 전쟁 통에 죽은 오빠 대신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다. 그녀는 간신히 미군 PX 초상화 가게에 취직했다. 지나가는 미군을 붙잡고 "돼먹지 않은 영어로" 가족이나 애인 초상화를 주문하라고 꾀는 일이었다. 그 일의 모멸감 때문에 그녀는 점점 성격이 황폐해지면서 가게 화가들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이때 한 순하고 과묵한 화가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됐지만, 서로가 뒷날 한국 문단과 화단의 큰 별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와 화가 박수근(1914~1965)의 이야기다.


그림 ① 나무와 여인 (1956), 박수근(1914~1965) 작, 하드보드에 유채, 27 x19.5 ㎝, 갤러리 현대 제공.


올해 초 타계한 박완서 작가는 바로 자신의 PX 경험담을 바탕으로 데뷔작 <나목(裸木)>(1970)을 썼다. 이 소설에 나오는 화가 옥희도는 박 화백을 모델로 한 것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옥희도의 그림 '나무와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박 화백의 실제 작품(그림①)으로, 지난해에 열린 그의 45주기 회고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이렇게 그림 속 나무를 묘사하며 박 작가는 옥희도가, 즉 그 모델이 된 박 화백이 나목과 같다고 했다. 전쟁의 비참한 시대, 미군에게 싸구려 초상화를 팔아 연명하면서도 담담한 의연함을 잃지 않던 모습에서 말이다.


그런데 박 작가의 PX 생활과 박 화백과의 만남은 소설 <나목>에서보다도 수필 '박수근'(1985)에서 한층 더 흥미롭게 묘사돼 있다.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사실이 지니는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 그리고 그것을 짧은 수필에 날렵하고 감칠맛 나고 박력 있게 풀어낸 박 작가의 더욱 원숙해진 글솜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박 작가는 당시 PX 초상화 가게에 박 화백을 포함한 대여섯 명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 남자들"이 일하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모두 간판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가게 주인이 말하기에, 박 작가는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그녀는 여기서 초상화 주문 끌어오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수줍고 꽁한 성격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으나 주문이 끊긴다는 화가들의 아우성에 (이때도 박 화백은 아우성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미군에게 "뻔뻔스럽게 수작을 거는" 수준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그림 주문이 늘어나자 이번에는 화가들에게 '싹수없이 못되게 굴었다'.


"서울대 학생인 내가 미군들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고, 간판쟁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급의 예술가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저희들의 일거리를 대주고 있는데, 그만한 생색쯤 못 낼게 뭔가 싶었다. 나는 그때 내가 더 이상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었다."


그림 ② 절구질하는 여인 (1954), 박수근 작, 캔버스에 유채, 130 x 97 ㎝, 갤러리현대 제공.

 

혹자는 박 작가가 전쟁의 쓴맛을 덜 봐서 학벌 타령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와 가족들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란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점령한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죽을 위기를 이미 몇 차례 겪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전쟁의 현장에서도 스스로를 포기할 수 없던 젊은 영혼은 순수한 긍지가 변질된 추한 우월감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했으리라. 그 자괴감 섞인 우월감으로 더 불행해질망정.


그 불행에서 박 작가를 구해준 것이 박 화백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화집을 가져와 '망설이는 듯한 수줍은 미소'를 띠며 관전(官展)에서 입선한 그림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시골 여인이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는데, 박 화백은 전후에도 이 소재로 종종 그림을 그렸다(그림②).


박 작가는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박 화백은 왜 그림을 보여주는지 설명이 없었고, 그 뒤로도 여전히 조용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진)

"그가 신분을 밝힌 것은 내가 죽자꾸나 하고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그다운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내 불행에만 몰입했던 눈을 들어 남의 불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중략) 그에 대한 연민이 그 불우한 시대를 함께 어렵게 사는 간판쟁이들, 동료 점원들에게까지 번지면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균열을 일으킨 내 심정을 축여 오는 듯했다."


     그림 ③ 귀로 (1965), 박수근 작, 하드보드에 유채, 20.5x36.5 ㎝, 갤러리 현대 제공.


이 에피소드는 박 작가의 자전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에도 나오는데, 박 화백의 배려가 언 몸을 녹여주는 따뜻한 물 같다고 쓰여 있다. 화가의 성품이 자기 작품과 딴판인 경우도 많건만 박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그대로 닮았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은 색채 톤이 과묵하고, 그 오래된 화강암의 표면 같은, 또는 갯벌의 흙 같은, 또는 늙으신 어머니의 손등 같은 질감에 인고의 무게와 따스한 체온이 배어 있다(그림③).


그 후 두 사람은 박 작가가 결혼을 해 PX를 그만둘 때까지 1년 가량 우정을 이어갔지만 소설 <나목>에서처럼 연애 감정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수필 끝부분에서 박 작가는 그녀의 눈에는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박 화백의 눈에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쉬듯이 정겹게 비쳤을까" 신기하다고 했다. 그건 박 화백이 "나는 인간이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의 말을 실천했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가장 추하고 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는 전쟁, 그러나 그 안에서 한 줄기 희망과 위안을 주는 것도 역시 인간이라는 아이러니를 박 작가의 이야기와 박 화백의 그림은 오늘날에도 절절히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은 박완서 작가가 수많은 작품을 낳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 중 논픽션에 가까운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한국전쟁의 미시사적 자료로도 손색이 없다. 이 작품을 보면 1·4후퇴 때 서울에 온 인민군은 시민의 굶주림 문제는 아랑곳없이 선전예술 공연과 우파 색출에만 골몰하고 북으로 철수할 때는 노인들은 따라가길 원해도 거부하고 젊은 사람들은 강제로 끌고 갔다. 박 작가는 이때 끌려가다 용케 탈출했다. 또 6·25 발발 때 시민을 내버려 두고 먼저 도망친 남한 정부는 돌아와서는 인민군에게 밥해줬다는 이유로 숙부를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이때의 경험이 작가가 전후에 어느 쪽 이념에도 쏠리지 않고 인간을 직시하는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글_ 중앙일보 문소영 기자 2011-06-23]


[원글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110623010807916&p=joon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