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주석달린 월든

라라와복래 2011. 6. 23. 13:33
 

 

주석달린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제프리 S. 크래머 주석

강주헌 옮김


현대문학 펴냄 2011.05.30


젊은 날 라라와복래는 <월든>을 ‘숲속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처음 만났다. ‘사색의 바이블’이니 하며 이 책에 보내는 무한한 찬사를 귀동냥하고서였다. 그런데 솔직히 이 책은 읽기 어려웠다. 손에 통 달라붙지 않았다. 먼저 번역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당시는 거의 그랬듯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라 우리말 문장투가 영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내게 <월든>을 번역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는데(완역이 아니라 초역이었다) 막상 영문 원서를 옮기려고 꼼꼼히 읽어보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문장 번역은 그렇다 치고 등장하는 인명이나 지명 등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내용이 소화가 안 되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인터넷 정보의 바다 속에서 산다면 모를까 어떤 인명은 도서관 사전 다 뒤져도 제대로 나오는 게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결국 나 또한 어물쩡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그 후 10년 가까이 흐른 1993년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도서출판 이레에서 완역본의 제대로 된 <월든>이 출간된 것이다. 쉽고 막힘없는 우리말 번역에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게다가 그토록 나를 골탕 먹이던 인명과 지명에 대한 각주까지 친절하게 달려 있었다. 역자 강승영은 ‘완벽에 가까운’ 한국어판 <월든>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월든>의 무대인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일대를 답사함은 물론, 각종 참고자료를 구하기 위해 미국 내의 수많은 도서관을 방문했다고 한다. 나는 이 강승영 번역 <월든>을 뛰어넘는 한국어판은 다시 나오기 어려우리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현대문학사에서 <주석달린 월든>을 펴냈다고 하여, 출판사의 책 소개를 읽어보니 이 책이 <월든>의 결정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정가 39,000원. 책값이 뭐 이리 비싸 하고 구입을 미루고 있는데, 알고 보니 보통 책보다 1배 반 정도의 크기로 나온 특별판). 주석자 크래머는 소로 연구소의 큐레이터로 ‘소로 신자(信者)’인 그는 <월든> 주석 작업에 필생을 걸고 달려들었다고 한다. 예일대에서 펴낸 이 책에 그는 무려 1700개의 주석을 달았으며, 소로가 인용한 고대 경전부터 그리스 신화, 논어 등 동서양 고전의 출전을 파악하고, 현대의 작가와 학자들이 인용한 소로 관련 내용까지 덧붙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월든> 원전으로 안내하는 길잡이임에 틀림없겠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_1817-1862)와 <월든>(Walden_1854)에 대한 소개는 생략. 다음 글들은 현대문학사 책 소개에 실린 <월든>의 본문. 일상 속 영혼을 들여다보게 하네요~~


원시 시대에 인간은 발가벗고 단순하게 살았다는 사실에서, 인간은 자연에 잠시 머무는 사람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음식과 수면으로 원기를 회복하면 다시 여행을 계획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세상을 천막 삼아 살면서 계곡을 누볐고, 널찍한 평원을 가로질렀으며, 산꼭대기에 올랐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인간은 자신이 만든 도구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허기가 지면 혼자 열매를 따서 배를 채우던 인간이 이제는 농부가 됐다. 나무 아래를 피신처로 삼던 인간이 이제는 집을 갖게 됐다. 이제 우리는 밖에서 밤을 보내지 않는다. 땅에 자리 잡고 앉아 하늘을 잊어버렸다. _ ‘경제’, 77쪽


왜 우리는 이처럼 바쁘게 살며 삶을 허비해야 하는가? 마치 굶주리기도 전에 굶어죽겠다고 결심한 꼴이다. 우리는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을 던다고 말하면서도 내일 아홉 번 바느질하는 수고를 덜려고 오늘 1,000바늘을 꿰고 있다. 우리는 일을 한다고 늘 바쁘지만 막상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_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 144-145쪽


올바른 독서,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요즘 세태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든 운동이다.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이 요구되고, 책을 읽겠다는 마음가짐을 거의 평생 동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처음 쓰였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 _ ‘독서’, 154쪽


당신은 단순히 글을 읽는 독자나 학생이 되겠는가, 아니면 꿰뚫어보는 사람이 되겠는가? 당신의 운명을 읽고, 당신 앞에 놓인 것을 읽어라.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 _ ‘소리들’, 166쪽


나는 아직까지 고독만큼이나 편안한 친구를 만난 적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방에서 혼자 지낼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더 외롭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혼자다. _ ‘고독’, 196쪽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었다. 고독을 고집하려면 의자 하나로 충분하고, 우정을 위해서는 두 개의 의자, 사교를 위해서는 세 개의 의자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_ ‘방문객들’, 201쪽


이 콩들에는 내가 수확하지 못한 결실도 있었다. 콩들의 일부는 우드척을 위해 자랐던 것이 아닐까? 밀의 이삭이 농부의 유일한 희망이어서는 안 된다. 밀 이삭의 핵, 즉 낟알이 밀에서 생산되는 전부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수확이 어떻게 실패할 수 있겠는가? 잡초들의 씨가 새들의 풍성한 먹이가 된다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에서도 나는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밭에서 거둔 수확이 농부의 헛간을 가득 채우느냐 않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올해 숲에 밤이 많이 맺을지 않을지 다람쥐가 걱정하지 않듯이, 진정한 농부라면 그런 걱정을 떨쳐내고 자기 밭에서 거둘 수확물에 대한 권리 자체를 포기하고, 첫 열매만이 아니라 마지막 열매까지도 제물로 바치겠다는 각오로 하루하루의 일을 끝낼 것이다. _ ‘콩밭’, 235-236쪽


만약 모든 사람이 당시의 나처럼 단순하게 산다면 절도와 강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충분한 정도를 넘어선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먹고살기도 힘든 사람들이 섞여 사는 공동체에나 절도와 강도가 있는 법이다. _ ‘마을’, 243쪽

 

  월든 호수

 

호수는 대지의 눈이다. 우리는 호수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본성이 지닌 깊이를 헤아려본다. 호숫가 근처 나무들은 눈의 가장자리를 수놓는 가냘픈 속눈썹이며, 주변의 우거진 언덕과 절벽은 눈 위에 걸린 눈썹이다. _ ‘호수’, 261쪽


나를 인도하는 선령(善靈)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날마다 어디로든 멀리 낚시를 나가고 사냥을 나가라, 더 멀리 더 멀리. 앞날을 걱정하지 말고 시냇가와 난롯가에서 쉬어라. 젊었을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해라. 새벽이 오기 전에 근심을 잊고 일어나 모험에 나서라. 한낮에는 날마다 다른 호숫가에서 지내고, 밤에는 어디라도 너의 집으로 삼아라. 여기보다 넓은 들판은 없고, 여기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보다 가치 있는 놀이는 없다. 너의 본성에 따라 저기에 보이는 사초와 고사리처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라. 결코 영국의 건초처럼 길들여지지 마라. 천둥이 울린다고 겁먹지 마라. 천둥이 농부들의 작물에 피해를 준다고 그걸 어찌하겠느냐?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농부들은 수레와 오두막으로 피신하더라도 너는 구름 아래로 피하라. 생활비를 버는 걸 너의 일로 삼지 말고, 너의 재밋거리로 삼아라. 땅을 즐기되 소유하지 마라. 진취성과 믿음이 부족한 까닭에 많은 사람이 현재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고팔며, 농노처럼 삶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_ ‘베이커 농장’, 286-287쪽


상상력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고 깨끗한 먹을거리를 장만해서 요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몸에 양식을 공급할 때 상상력에도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몸과 상상력, 둘 모두가 하나의 식탁에 앉아야 한다. _ ‘더 높은 법칙들’, 296쪽


개미와 인간은 비교할수록 별반 차이가 없다. 미국의 역사, 적어도 콩코드의 역사에서는 전투에 참여한 인원수나 전투에서 보여준 애국심과 용기 면에서 개미들의 전투에 비교할 만한 순간이 기록된 전투는 없었다. _ ‘동물 이웃들’, 314-315쪽


인간은 불을 발견한 덕분에 널찍한 방에 공기를 가두고 방을 덥힌다. 달리 말하면, 자기 온기를 빼앗기는 대신 방을 덥혀 잠자리로 만든다. 그런 방에서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은 채 돌아다니며, 한겨울에도 여름 같은 날을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창문을 이용해 햇살을 받아들이고, 등불을 밝혀 낮 시간을 늘릴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을 한두 걸음쯤 넘어서서 예술을 추구하는 시간을 조금씩 마련한다. _ ‘난방’, 343쪽


겨울에는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눈이 높이 쌓이면 한두 주일 동안 내 집 근처에 얼씬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내 집에서 나는 들쥐만큼, 혹은 눈더미에 파묻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도 오랫동안 견뎌냈다는 소와 닭만큼 아늑하고 편안하게 살았다. _ ‘과거의 거주자들, 그리고 겨울의 방문객들’, 360쪽


우리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걸 고려해보면, 인간이 그랬듯 동물의 세계에서도 문명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게는 동물들이, 굴을 파고 살던 시대의 원시적인 인간, 요컨대 아직은 자기 몸을 지키는 데 급급하지만 변화를 기다리는 인간처럼 보였다. _ ‘겨울 동물들’, 371쪽


우리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법칙들, 즉 겉으로는 모순되어 보여도 실제로는 서로 관련된 많은 법칙들에서 비롯되는 조화가 훨씬 더 경이롭다. 여행자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산의 모습이 달라 보이듯이, 개개의 법칙들도 우리 관점에 따라 달라 보인다. _ ‘겨울의 호수’, 392쪽


대지는 책장처럼 층층이 쌓여 주로 지질학자와 고고학자에 의해 연구되는 죽은 역사의 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꽃과 열매에 앞서 돋는 나뭇잎처럼 살아 있는 시다. 달리 말하면, 화석이 된 대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지다. 대지를 지배하는 삶에 비하면, 동물과 식물의 삶은 기생적인 삶에 불과하다. 대지는 진통하며 우리의 벗어놓은 허물을 그 무덤에서 뱉어낸다. _ ‘봄’, 4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