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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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더없이 편안한 자세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식사>
1863년, 캔버스에 유채, 208×264.5㎝, 오르세 미술관, 파리
사랑보다 명예가 중요한 사람들은 사랑 앞에서도 겉치레의 옷을 벗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비난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모독하면서 괜찮은 척 살아가고 있는, 마음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발표되었을 당시(1863),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작품입니다. 프랑스 사회는 저 그림을 불편해하고 증오했습니다. 마네는 오명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왜 저 그림으로 파리가 발칵 뒤집혔는지 이해되지 않습니까? 신사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부끄러움도 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저 여인! 나는 생각합니다. 저 ‘풀밭 위의 식사’나 ‘올랭피아’ 같은 마네의 그림들은 그 시대의 위선을 고발하는 작품들로만 보기엔 너무나 매혹적이라고.
생각해보면 과거의 화가들은 누드의 여신을 많이 그렸습니다. 여신의 누드는 되는데, 여인의 누드는 안 된다며 분노하고 야단을 치는 그 경직되고 격앙된 태도 속에 들어있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부끄러워하는 문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문명의 편견들을 떠안고 살면 삶은 안전하지요? 그러나 매력도 없습니다.
찬찬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여인의 표정을 살펴보십시오. 여인의 표정은 단정하지도 않지만 도발적이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천연덕스럽지요. 그럼에도 저 여인을 도발적이라 느끼게 하는 건 우리가 가진 도덕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관념들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거짓의 옷, 겉치레의 옷이 없는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그래놓고 우리가 불편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잘못했다고 겉치레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거지요.
이렇게 볼 수는 없을까요? 잘 차려입은 저 남자들은 세속적이면서도 세속적인 것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너무나 세속적인 남자들이라기보다, 그래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사들일 수 있겠다고. 그들은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지도 않고, 사회적 편견의 힘으로 여자를 재단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여자를 대하는 성숙한 저 태도가 마네의 태도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물과 숲, 남과 여, 어두운 양복과 빛나는 피부, 네 사람의 구도가 안정적이고도 시원하지 않나요?
사실 편견을 내려놓고 보면 저 자세는 더없이 편안한 자세 아닙니까? 비스듬히 기대앉아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 무릎을 직각으로 세우고 앉아 무릎 위에 팔을 얹고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얼짱 각도로 바라보는 이를 자신감 있게 바라보고 있는 누드의 여자, 모두들 편안하지 않으면 취할 수 없는 자세들입니다.
저 자세들의 오리지널이 있다지요?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에 나오는 바다의 신들의 자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가야 할 황금사과를 두고 아테나와 헤라와 아프로디테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어지러운 세상엔 관심이 없다는 듯 바다의 신들이 모여 앉아 대화하고 있는 자세입니다. 그러니 저 자세는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일일랑은 남의 일처럼 모르는 척 물려놓고 그들만의 평화를 만들어 누릴 수 있는 자들의 여유로운 자세인 겁니다.
마네는 여신이 아닌 여인을 그렸습니다. 우아하거나 순수하거나 요염하거나 어쨌든 완벽한 자태로 인간을 초라하게 만드는 현실감 없는 여신이 아니라 다리가 짧아도, 뱃살이 있어도 함께 살며 사랑하며 이별할 수 있는 인생을 그린 것입니다. 여신이 있었던 자리에 들어서 있는 여인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풍경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소풍가고 싶습니다. 솔직하고 담박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예쁜 보자기에 도시락을 싸고 기분 좋은 긴장감을 살짝만 불러일으키는 멋진 남자들도 같이. 맨발이, 목욕이 무례가 되지 않는 친구와 함께. 강가에서 멱을 감으면서 자연스럽게 젖과 꿀이 흐르는 대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겉치레 없이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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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라라와복래] <풀밭 위의 식사>(Le Déjeuner sur L'Herbe)는 원래 ‘목욕’(Le Bain)이라는 제목으로 1863년 '살롱전'(Le Salon)에 출품하여 낙선한 작품으로, 그 해 ‘낙선전’(Salon des Refuses)에 전시되어 큰 스캔들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낙선전은 명칭 그대로 살롱전에서 낙선한 화가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열린 전시회입니다.
그림에서 보듯 <풀밭 위의 식사>는 두 쌍의 남녀가 물이 흐르는 숲속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모티프는 두 거장의 작품에서 차용했습니다. 하나는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이고, 또 하나는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입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과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남성의 모습은 <파리스의 심판>(라파엘로의 작품은 남아 있지 않고 표절작가로 유명한 라이몬디의 모작 동판화를 보고 마네가 차용했다고 합니다)에서, 나체의 여인과 옷을 잘 차려입은 남성을 배치한 구상은 <전원 음악>에서 따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라이몬디의 동판화 <파리스의 심판>, 라파엘로의 모작, 1515(그림 오른쪽 아래 장면을 마네가 차용)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 , 1510년경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1863
그림의 두 남자는 친동생 귀스타브와 처남입니다. 여성들은 마네가 좋아했던 모델 빅토린 뫼랑과 일시적으로 고용한 유대인 처녀라고 합니다. 그림의 인물들은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나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 속에 살아 있는 파리 시민의 모습입니다.
마네의 이 그림은 주제ㆍ색채ㆍ기법 등 거의 모든 면에 걸쳐 비난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유로 네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을 새롭게 조화시키고 고전주의적 주제를 현대화한 것이었는데, 관람자에게는 현실 생활의 한 장면에 나체를 그려 넣은 대담성이 자극적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래서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둘째, 나체뿐만 아니라 나체의 주인공이 빅토린 뫼랑이란 것이 심사위원들을 불편하게 했고, 이 여성이 옷을 잘 차려입은 부르주아 남성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에 자신들의 위선을 꼬집은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셋째, 마네는 그림 속 대상들의 색채를 묘사하면서도, 색조의 대비로 명암을 표현하는 방법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거부했습니다. 중간 색조를 과감히 생략했고, 전체적으로 녹색과 갈색 톤으로 채색했습니다. 그 결과 대상의 세부 묘사는 단순화되고 실루엣(윤곽선)이 강조된 반면에, 명암의 표현이 최소화되면서 대상이 평면적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늘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부분을 생략하고 밝은 표면(나체의 살결)과 어두운 표면(남자들의 검은 옷)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 기법이, 전통적 회화 기법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낯설게 비쳤습니다.
넷째, 마네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을 묘사하면서 그 공간 속 여러 요소들의 크기나 위치를 원근법에 따라 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단일 시점의 원근법에 따라서 풍경을 묘사하는 데 익숙했던 당시 관람자들은 <풀밭 위의 식사>에 묘사된 배경에서 공간적 깊이를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화면 가운데 목욕하는 여인은 그 오른쪽에 그려진 배에 비해 너무 크게 그려졌기 때문에 관람자들은 원근감에 혼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에서 마네는 현대 회화의 선구자이며, 이 작품 <풀밭 위의 식사>는 현대 회화의 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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