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그림으로 읽는 철학] 르누아르의 ‘빨래하는 여인들’

라라와복래 2011. 8. 1. 07:09
 

 

 

[그림으로 읽는 철학]

르누아르의 ‘빨래하는 여인들’

빨래의 내공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노르웨이의 테러범 브레이비크는 돈을 주고 여성을 사서 잠자리를 한 적은 있어도 정서적인 교류를 해본 여자 친구는 없었다지요?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남자의 그 파괴적이고 뒤틀린 심성 뒤엔 여성혐오증이 있었습니다.


여자를 좋아하세요? 좋아하면 살피게 되고, 잘 지내게 되고, 보살피게 되지요?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여자들이 행복해합니다. 책을 읽고 있든, 피아노를 치든, 춤을 추든, 목욕을 하든, 빨래를 하든 여자들이 하나같이 부드럽고 하나같이 빛납니다. 르누아르는 여자를 좋아한, 여자와 잘 지낸 남자 같습니다. 저 그림은 ‘빨래하는 여인들’인데, 이제 막 빨래를 하려고 소매를 걷어올리고 있는 저 여인, 르누아르가 좋아한 여인 같지 않습니까? 뒷짐을 지고 신사를 흉내 내고 있는 소년은 내심 자기가 엄마를 지키고 있는 거라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조금만 지나면 자신이 신사라는 것도 잊고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도 잊고 엄마를 따라 나온 다른 애들과 함께 물속에서 정신을 놓고 놀 것입니다.


저 그림 앞에 서면 빨래도 하지 않고 청소도 하지 않고 요리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 차려입고 출근을 하며 최고의 생산성을 위해 뛰는 현대인들의 삶이 왠지 허깨비 같습니다. 비싼 일을 하는 시간이 통장의 숫자는 늘려줄지 모르지만 편안하게 풀어주지는 못하니까요. 냇가 대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이들이 시대를 잘 만나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저 안쓰럽습니다.


잘 보십시오. 냇가에 물풀들이 무성하지요? 돌 틈에 부딪치며 깨지며 흐르는 물들이 물풀들을 먹여 살렸네요. 저런 냇가가 건강하고 젊은 냇가입니다. 파란 물은 부지런히 명랑하게 흐르고 여기저기 나뭇잎들은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겠지요.


볕 좋고 바람 좋은 날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한 손엔 빨랫감을 안고, 다른 손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저런 냇가로 모여들었겠지요. 저마다 냇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빨래를 하다보면 서로서로 친구가 되어 이야기들이 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맨발이 되어 물장구를 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놀 것입니다. 냇가에서 빨래를 해보셨습니까, 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두 여인은 벌써 자리잡고 앉아 빨래를 하고 있네요. 한 여인은 빨래를 돌 위에 얹어놓고 치대고 있고, 다른 여인은 흐르는 물에 빨래를 헹궈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빨래에 열중하고 있지요?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저 빨래하고 있는 여인들을 보고 있자니 몸을 움직이는 평범하고 단순한 일일수록 몸에 붙으면 묘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허드렛일을 허드렛일이라 취급하지 않고 기꺼이 오랫동안 기분 좋게 반복하다보면 허드렛일이 만들어주는 내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단순해질 수 있는 것은 성향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단순해져야 먹은 맘 없이 흔연하게 웃을 수 있고, 흔연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너무 복잡하고 너무 예민합니다. 너무 많은 생각, 너무 많은 고뇌, 너무 많은 갈등으로 잘 자지도 못하는 현대인은 뱃심이 없습니다. 그런 현대인들이 삶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자연을 만나는 일이고, 그 다음이 허드렛일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바로 저런 일들이지요.


간간이 손빨래를 해보시지요. 흐르는 냇가에서 두들기며 치대며 빨래를 하다 보면 깨끗해지는 빨래를 따라 마음에 낀 얼룩들도 점차 사라지고, 문지르고 헹구다 보면 명치끝에 걸려 있던 뭔가가 빠져나가기도 합니다. 빨래는 잔뜩 때가 끼어 있는 내 감각들을 청소하여 내가 누려도 되는 세상을 열어 보여줍니다. 빨래하는 일이 나를 세련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더없이 자연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힘 있게 치대는 손동작 속에 근심을 날려 보내며 빨래를 하고 싶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하고 싶습니다. 행복한 삶은 생산성이 높은 삶이 아니라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일상의 일들이 행복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 아닐까요?

[이하 라라와복래] 이주향 교수의 ‘빨래의 내공’이란 곧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 단순함은 우리를 흔연하게 웃을 수 있고, 흔연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군요! ‘빨래의 내공’이 이렇게 쎈 줄 몰랐습니다~~. 이왕 빨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빨래와 관련한 그림들을 웹서핑해보았는데요, 놀랍게도 고금동서의 많은 화가들이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걸 알게 되었네요. 몇 점 골라 올립니다. 

 

     외젠 부댕, 빨래하는 여인들

 

     르누아르, 빨래하는 여인

 

     고갱, 아를의 빨래하는 여인들

 

           반 고흐, 아를의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

 

     박수근, 빨래터, 50.5x111.5cm, 1950년대 후반. 2007년 45억2천만원 경매. 현재 최고가 작품.

 

     빨래하는 풍경 옛 사진

 

     빨래하는 풍경, 중랑천 둔치, 195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