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2) 나는 폐허의 자식… 50년대 전후가 내 고향이지

라라와복래 2011. 9. 19. 11:18
 

[고은과의 대화](2)

나는 폐허의 자식… 50년대 전후가 내 고향이지

 

김형수 = 고은 정신의 원적지를 ‘전후문학’에 두어도 될까요? 시간적·공간적 범위가 광범한 분이시라 세대 구분 같은 잣대를 들이대기가 걱정되지만 말입니다.


고은 = 나 하나의 정신이 시대정신의 한계 밖으로 제멋대로 일탈하지 않을 경우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면 1950년대 전후는 내 고향이기도 하지. 자주 나 자신을 폐허의 자식이라고 하는 까닭도 그 전후문학의 불안과 미완 속에 들어 있으니까. 이 1950년대 전후세대가 바로 전통 단절을 들고 나왔지. 현대가 현대 이전의 봉건사회를 계승한 것이냐 단절된 것이냐를 두고 심심할 때면 옳다 그르다고 서로 제 주장으로 맞서는 경우와도 겹친 셈이었지. 전후세대가 전통 단절론을 외쳐댄 경우 실제로 이런 단절론의 쾌감을 벗어나면 그 단절론조차도 하나의 보수반동으로 귀결되는 일이 적지 않았어. 이런 경우 바로 그 젊은 세대가 그 이전의 기성세대보다 더 보수화되어 어느새 전통계승의 앞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지. 이는 20세기라는 보편적인 당대의식을 가지고 있던 한국전쟁 생존자로서의 50년대 계층에게 두드러지고 있어. 결국 세대 갈등은 하나의 호흡일지도 몰라.


김형수 = 개인적으로 궁금한 문제입니다. 5·18 때 20대였던 저희를 1980년대 세대라 하는데 저희는 1970년대의 열정 속으로 정신없이 빨려들어 가면서도 선배들을 꽤 격렬하게 쇄신하려 들었던 것 같아요. 뒤에 오는 세대는 온순하지만 상당히 냉정하게 퉁겨냅니다. 바다의 파도처럼 자연스러운 연결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밀물로 몰려갈 때는 몰랐지만 썰물 때 드러난 폐창이 아찔했거든요. 기성세대를 어떻게 잇고 넘어서야 하는지, 격동기적 영혼의 곤혹과 딜레마는 무엇인지. 돌아볼 만한 옛날이 있을까요?

 

     그림 임옥상 화백

 

고은 = 그 당시 80년대의 삐걱거렸던 세대 동거의 불편함이 먼 후일에는 하나의 지층으로 굳어질지도 모르지. 하나의 모순 앞에서의 삶이었으니까. 이런 사정의 다른 쪽에서 살펴본다면, 가령 내가 태어난 1930년대 초기라 해도 그것이 한말 이전까지 써왔던 중국 왕조의 연호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사대 체제의 시간을 영영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어.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이래의 삶을 둘러싼 환경의 일반 정서가 조선시대와 한말 대한제국시대의 그것과는 간극이 자심한 터라 그야말로 조선 후기에 국토를 편력한 고산자 김정희나 떠돌이 시인 김삿갓의 동시대가 아득한 거리 저쪽이어서 그것이 사실보다는 전설 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어. 심지어는 한국현대사의 한 기점이 되는 1919년 3·1운동의 원인 제공자인 고종이라는 임금조차 그가 서양 음료인 커피를 최초로 마신 것과는 달리 오늘날과 몇 십 년 차이인데도 비현실적인 대상으로 화석화하기 일쑤지.


김형수 = 김정희나 김삿갓을 끌고 다니던 대지의 목가적 연결이 지금은 없습니다. 근대는 과거 단절을 하나의 사명처럼 내포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지구의 광범한 지역에서 인간의 삶이 땅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경험이 진행되는 중입니다.


고은 = 자네의 진지한 지적은 좀 더 본격적인 설왕설래가 있어야겠네. 일단 이 지적은 미루어두지.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종이호랑이 신세로 서구 세력의 먹잇감이 됨으로써 그 동안 초시간적으로 다져진 천하 경륜의 중화주의 존엄이 여지없이 무너진 때를 옳다 됐다 하고, 서구를 급모방한 근대 일본의 욕망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넘보는 과정에서 한국 역시 중국에의 오랜 사대 체제와 일본의 팽창 사이에서 자아 찾기에 부랴부랴 나서게 되지. 그래서 광무(光武)·융희(隆熙) 등의 단명한 연호를 내걸었지. 이때부터 나 여기 있다 하는 호언장담의 안쪽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대한 노심초사도 반영된 것이지.


김형수 = 인간의 심층에 이렇게 다른 시간 감각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자신의 빛으로 투사하지 못하고 타인의 빛에 의존하는 습성도 이때 생겼을까요?


고은 = 항성의 발광은 행성이나 위성의 반사광을 만들어내지. 이런 자체 연호 쓰기의 용기는 고려 초기 광종이 안으로는 호족 세력과 맞서고 밖으로는 송 왕조가 남송시대로 전락할 징조에 직면했던 건국 초기의 빗장 같은 것으로, 이로부터 어느 나라에도 책봉 대상이 될 수 없다 해서 독자적인 연호를 내걸었던 잠시 동안의 기세와도 엇비슷했어.


김형수 = 교과서적 역사 이미지 속에서 스쳐가 버린 것들이라 그 숨결이랄까 육체성이랄까 하는 것이 잘 안 느껴집니다. 최근에 몽골사를 읽으면서 회복하는 중이기는 합니다만.


고은 = 바로 이 같은 자신의 연호가 쓰이자마자 중단된 채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 시절의 식민지시대가 열리게 되었어. 그런 나머지 한국은 일본의 명치유신 이래의 연호인 명치·대정의 대를 이어 1930년대 소화(昭和)라는 일본 왕조의 연호로 나의 식민지 생존의 시대가 진행된 것이네. 그러므로 나는 1960년대에나 1933년생이었고, 그 이전의 어린 시절은 소화 8년생으로 존재해야 했어. 만약 고종과 그 뒤 있으나마나 한 순종 연간이 그 왕통 계승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입헌군주제 대한제국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융희 연간의 후기쯤에 태어난 셈이지. 대지라는 자연의 현실이나 세계라는 인식공간이나 하나의 자아가 여러 개의 자아를 쌓기도 하지.


김형수 = 하나의 자아가 셀 수 없이 많은 제도의 오솔길 앞에 서 있었군요. 대지는 하나이지만 세계는 수없이 많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고은 = 내 얘기를 더 잇자면, 상해임시정부의 공화제 국가가 대한제국이라는 한말을 승계할 수 있었다면 나는 새 정부가 승계한 연호를 쓰거나 멀리 단군 연호를 산정해서 단기(檀紀)의 시대를 살기 시작했을지도 몰라. 물론 해방 이후 건국과 함께 출발한 단기 4000년대는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마치 이승만의 유구한 정통성을 소급 장식하는 것처럼 반만년이라는 시간의 크기를 과시할 수 있었어.


김형수 = 20세기에도 여전히 늑대 부족은 늑대의 연호로 사슴 부족은 사슴의 연호로, 그렇게 자아의 시대를 살았나 봅니다.


고은 = 1960년 4월 혁명 이후 우리는 서구의 기년(紀年)을 그대로 받아들여 서기 연호의 근대적 보편성에 편입된 셈이지. 말하자면 ‘배달겨레’ 또는 ‘백의민족’으로서의 자아의 시대로부터 서기라는 세계의 시대로 바꿔 탄 셈이야. 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뱃길이었어. 그 새로운 세기로서의 생활은 이제까지 낡은 국수주의로서의 누습에 대해서 그 싱그러움 못지않게 촌락에서 도시로 나온 아이처럼 신기해하기 십상이었어. 그래서 단기는 계룡산 신도안쯤으로 가버리고 제2공화국의 춘궁기와 그 절대빈곤에도 불구하고 뭔가 세계사적인 조류 위에 떠 있는 배의 항행감(航行感)을 만끽했어. 심지어는 단기는 이승만이고 서기는 4월 혁명이기도 했으니까.


김형수 = 헉! 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뱃길이라니! 백의민족이 방황했던 숱한 근대의 골목들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고은 = 오랫동안 한 나라의 연호는 나라 꽃, 나라 기(旗), 나라 노래, 나라 화폐 등과 함께 규범집단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것이지. 사실인즉 화폐는 그것이 물질의 극치이자 이에 못지않게 정신의 극치이기도 해. 종이돈에 그려진 인물은 그 사회와 나라의 자존심을 뜻하는 인물들이지. 우리나라의 세종, 중국의 마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나 나쓰메 소세키 그리고 아메리카 달러의 건국 영웅들을 물질적 유통의 긍지로 삼고 있으니까. 1930년대 초기의 식민지 화폐는 당연히 한반도의 고금에 이름을 남긴 광개토대왕도 아니고 원효도 아니고 세종도 아니었어. 일본의 황실이나 근대 지도자였지. 나의 어린 시절 명치천황은 언제나 왼쪽 얼굴 측면을 안 보이고 있어서 한쪽 귀가 없어서 그렇다는 유언비어도 나돌았지.


김형수 = 아, 마침내 길을 잃었군요. 그 척박했던 시대, 폐허의 시대 속에 암장되어 있던 시간들이 새처럼 깨어나 날개를 퍼덕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고은 = 과연 1930년대라는 식민지 문화정치 시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연호의 세월 말고는 서기라든가 20세기 따위의 서구적인 소문은 어디서도 떠돌지 않았어. 20세기라는 시간의 지표는 그 후기에야 우리에게 환상처럼 다가왔어. 물론 김기림이나 최재서의 주지주의 문예사조가 이따금 소개되는 과정에서 20세기 문학이라는 구름 속의 이름이 어설픈 비평 감각으로 쓰이기도 했어. 이는 일제 연호의 강제 분위기에서 결코 힘을 쓸 수 없는 외래기호에 불과했지.


김형수 = 선생님이 등단한 이듬해에 태어난 제게 선생님의 시력(詩歷)은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제게는 성장, 가치구현 같은 인문학적 강박에서 오는 계몽주의벽이 있습니다. 승려 시절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방랑의 결실일까요? 선생님의 글은 끝없이 이데올로기적 충동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고은 = 내 체질에 해체가 들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또 나에게는 체질의 잔해로서 이데올로기에의 여진 같은 충동도 자리 잡고 있는지 몰라. 좀 더 얘기가 이어져야겠어. 1945년 해방이 되고 건국 헌법이 제정된 뒤 미국과의 전면적인 유착은 먼저 미국영화가 갑작스레 그러나 당연하게 범람하는 것으로도 표면화되었어. 식민지시대 후기의 전시에 사회의 군사화, 병영화에 충실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검객 세계가 주입된 뒤 그 사무라이의 ‘칼’은 미국 서부영화의 ‘총’으로 교체된 셈이지. 극장이 없는 곳에서도 야외 영사막을 임시로 설치해서 카우보이 백인의 사나이다운 권선징악이 널리 퍼져갔어. 게리 쿠퍼, 존 웨인들이 떨쳐댔지. 그런 영화 제작자의 하나가 ‘20세기 폭스’였어. 그 영화 타이틀을 통해서 20세기는 그것의 당대의식과는 상관없이 한국사회에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지기 시작한 거지.


김형수 = 그 시절에도 향도의 장터에서는 여전히 국극단, 서커스단, 약장수굿들이 문화와 예술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감동시킨 것들이 ‘신파’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 몰라요. 저희는 ‘서낭당 시대’의 아버지를 떠나서 먼지 자욱한 신작로를 따라 도회로 빠져나온 연후에야 톨스토이 같은 것이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은 = 그것은 행불행과 상관없이 자네보다 먼저 태어난 나의 어린 시절과도 일관되는 농경사회의 느릿느릿한 동시대적 환경 탓이기도 하지. 우리에게 20세기란 처음에는 부재의 세기였고, 나중에는 20세기 절반이 우리의 일상에 편입되었어. 이런 20세기 후반부터 우리는 여름날 삼베적삼, 삼베중의를 입고 겨울에는 무명핫옷을 입는 백의민족이다가 여기저기서 양복과 양장의 생활화가 가능했지. 주로 사회의 상류층이나 지도층의 양복은 그 인상 자체로 위압적이었어. 이승만과 김구가 주로 양복 정장과 한복 두루마기 차림으로 대조되는 것도 흥미로웠어. 하지만 우리에게 21세기는 이 같은 20세기적인 굴절과는 다른 것이었지. 아니, 지구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지나칠 정도로 과장된 축제로 21세기를 맞이한 것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지.


김형수 = 밀레니엄의 기억은 제게도 낭패스럽습니다. 무슨 쓰나미 같은 것이라도 몰려오는 양 밀레니엄 버그로 소란을 피웠는데, 사실 그 시간에도 유목민의 초원에서는 수천 년 전과 다름없이 조드라는 재해로 수천 마리의 가축이 굶어죽고 있었거든요.


고은 = 그것은 첨단문명의 질주로 어디 돌아볼 겨를 없는 오늘의 우리 당대에도 지구의 오지나 고원지대에는 신석기시대의 흔적이 태연히 일상이 되는 것하고도 매한가지이지. 1940년대 초기만 해도 농촌의 취락 상태는 근세조선의 풍경 그대로였어. 내 어린 시절 서당 몇 해를 다니는 동안 훈장어른은 영락없는 조선시대 잔반(殘班)의 몰골이었고, 학동인 아이들도 저 영·정조의 농촌 아이들 모양 그대로였어. 내 서당 동기 중 몇은 머리를 길게 땋아 내려 그것을 처녀의 댕기머리처럼 착실하게 꼬아 등짝에 드리웠지. 그런 세태가 고종 연간의 단발령 충격에 이어 일제 식민지 사회로의 갑작스러운 변동과 함께 머리를 박박 깎고 일본 소학교 교복을 입게 되었지. 단추가 다섯 개 달린 교복이 없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땟국이 잘잘 흐르는 한복 바지저고리에 검정 물감을 들인 무명 조끼를 입고 학교에 다녔어. 나도 이런 바지바람으로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갑작스러운 변의(便意)에 어쩔 줄 몰라 바지 입은 채로 변을 본 후 집으로 가서 어머니한테 단단히 혼난 적이 있어. 세상에 오줌 똥 하나 못 가리고 다니는 되다만 놈으로 낙인찍혔지.


김형수 = 하하, 그때 이미 고은 시의 화자를 상징하는 ‘불완전동사’가 태어나 있었네요. 어렸을 때 콜레라 환자를 격리하는 걸 보면서 문명의 야만스러움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때문에 저희가 암각화에 새겨진 듯이 경직된 표정이 아닌 문학적 호기심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고은 = 해방 당시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나 마포형무소에 갇혔던 독립운동가들이 출옥해서 환호하는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인파 거의가 한복차림이지. 그 뒤의 한국전쟁 당시 1951년 1월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말미암아 국군과 유엔군이 서로 겨루며 압록강 상류와 하류까지 북진했다가 후퇴할 때 평양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그 피란민의 급박한 광경을 찍은 사진을 보아도 그들 거의가 무명 바지저고리의 백의민족이었어. 그 피란을 가능케 한 사람이 당시 육군소령이던, 뒷날 전후작가인 선우휘였어. 6·25사변의 휴머니스트였지.


김형수 =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를 노래하던 시대가 그리 머지않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 빨리 탈근대의 마술에 도취되는 것을 따끔하게 일깨우시는 거지요?


고은 = 글쎄 말이네. 나의 20세기란 20세기 후반의 한 자락에서 서구문물의 이식 내지 모방의 숨 가쁜 과정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도 있었는데, 물론 우리 자신이 이미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고착에 구멍을 내는 자발적인 근대의 싹이 튼 바탕에 서구 근대라는 등식이 가능했어. 임화의 이식론에 대한 반론이 있는 것은 근대문학사를 떠나서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지. 저 1960년대 이후 국학 부흥이 인문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데 그 국학의 기본 텍스트 대부분이 식민지시대 일제의 통치에 부응하는 자료이기도 했어. 식민지시대에도 불구하고 뜻있는 민족문화의식의 계층에서 다산 정약용의 저작물들이 현대 활자로 간행되는 기념사업도 있는 한편 조선의 현재 상황에서 하나의 용기를 불러일으킬 고대사의 신비화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학 지식인들의 좌파적 역사인식도 식민지 체제에의 저항문화에 한몫 단단히 했지.


김형수 =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생명의 파도를 넘어가는 창조의 시간들, 그 찰나의 연결들을 어떻게 타고 넘느냐에 따라 오늘의 가치가 전혀 달라지겠네요.


고은 = 그렇지. 현실이나 대상은 전적으로 누가 보느냐에 의해서 존재가 인식의 먹잇감이 되기도 하지. 묘향산 단군굴에서 발굴했다는 단군시대 ‘삼일신고’니 뭐니 하는 난해한 민간 철학사관의 책자도 나타났고 그런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서구의 최신이론을 적용한 사회문화적 각성도 있게 되었지. 그 뒤로 어느 반가의 서고에 깊숙이 소장된 골동품으로서의 전통문화인 목각본이나 필사본들이 제대로 꽃 피어나기를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어.


김형수 = 저는 인간 하나하나의 창조적 감수성이 각자의 문화적 원형에서 습득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원형적 감수성을 파괴당하고 망각했으며,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것들만 전승되었습니다. 분단이 이렇게 만든 겁니다.


고은 = 과거란 가버리고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부터 재현되기 위한 대기 상태이기도 한 셈이야. 인류는 미래를 향해서, 미래를 앞으로 삼고 가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과거에의 지향 없이는 살 수 없는지 몰라. 세계의 모든 유적지는 유령들의 곳이 아니라 인류학, 고고학 그리고 관광의 엄청난 밑천이기도 하지. 먼 미래의 어느 날 분단이라는 이 저주받은 결박도 하나의 유산으로 될지 몰라. 통일조차도 절대가치가 아니게 될 때 말이야.


고은 시인의 삶과 문학, 철학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내는 ‘양 세기의 달빛’이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김형수씨가 진행하는 고은과의 대화에서 우리 사회를 넘어 역사·세계·우주·미래로 펼쳐지는 고은 사상의 정수와 함께,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한국어의 참된 유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삽화는 임옥상 화백이 맡습니다. [경향신문 2011-09-10]

 

임옥상(61) “미술은 자연의 부름, 역사의 소리, 윤리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작업”이라는 소신을 바탕으로 국내외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1981년부터 14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공공미술에 주력했다. 전주대 교수, 민족미술협의회 대표 등을 지냈다.


김형수(52) 시·소설·평론을 넘나드는 작품활동과 담론 생산으로 1980년대 이후 민족문학 진영을 이끌어왔다. 시집으로 <빗방울에 관한 추억>,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반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