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과의 대화](1)
논쟁은 수컷, 대화는 암컷이니 달빛 같은 대화를
고은 시인의 삶과 문학, 철학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내는 ‘양 세기의 달빛’이 오늘부터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김형수씨가 진행하는 고은과의 대화에서 우리 사회를 넘어 역사·세계·우주·미래로 펼쳐지는 고은 사상의 정수와 함께,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한국어의 참된 유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삽화는 임옥상 화백이 맡습니다. [경향신문 2011-09-10]
김형수 = 바람이 분주해졌습니다. 여름내 무성하던 신록이 이제 귀로에 접어들었나 봅니다. 감춰진 나뭇가지들이 곧 종아리를 드러낼 테지요? 오랜 농경문명의 흔적인지 가을이 오면 우리의 몸은 불가피하게 결실에 대한 상념을 품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언젠가 저무는 들길로 늙은 것과 어린 것이 돌아오듯이 돌아오라고 쓰셨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탁월한 은유의 언어들이 그간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은 = 10년 전부터 몇 군데의 제안이 있었는데 이제야 마주앉게 되었네그려. 먼 길 몇 천㎞의 공중을 날아가는 기러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몇 마디 말을 나누는 것을 들으며 어린 시절의 달밤을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우리도 그런 하염없는 대화를 하고 싶네.
김형수 = 어제는 날씨도 마음이 동하는지 발자국 사이로 바람이 불다가 말다가, 가는 비가 오다가 개다가 했습니다. 자고 나면 마주하는 사람들이 눈앞의 풍경만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구두코에 떨어지는 빗방울만 바라보는 태도, 과거도 미래도 연결돼 있지 않은 현재를 소모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어렵게 찾아왔으니 세상을 대신해서 듣고, 또 여쭙고 해야겠는데 말머리를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독백을 하시라 할 수도 없고.
고은 = 대화를 독백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멀쩡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네. 마찬가지로 독백을 대화라고 우겨대는 사람도 없을 것이네. 이 두 가지 표현 행위는 이를테면 무대 위의 배우들을 통해서 쉽사리 알아볼 수 있겠어. 드라마는 둘 이상이 무대에서 주고받는 대사로 진행되지. 하지만 그런 무대에서도 종종 배우가 상대방과 단절된 상태에서 저 혼자 무엇인가를 곱씹어 말할 때가 있지. 그것 역시 대사임에 틀림없으나 대화가 아닌 독백이겠지. 이런 일은 고전극이나 근대극이나 막론하고 진작부터 도입된 극 구성의 한 요소 아닌가. 그런데 이 독백이 어느 때는 대화 이상의 효력을 나타내기도 해. 압축된 내면을 주술화하는 매혹이 생겨나지. 여기서 다이알로그와 모놀로그의 본질을 한 번 따져볼 만하겠지. 요컨대 대화와 독백을 나눠버리고 말 수 없는 어떤 궁극적인 상사(相似)가 엿보인다 그 말이지. 그래서 대화는 타자와의 독백이기도 하고 독백은 자기와의 대화이기도 하다는 등식도 생길 법해. 이는 대화가 소통의 의미 이상인 것을 암시하겠지.
김형수 = 제가 낮아서 말씀들이 머리 위로 흘러가버릴까 염려되는데요?
고은 = 그렇다 해서 9세기경의 중국 선승 서암(瑞岩)이 자기 자신더러 ‘어잇 주인공이여!’ 하고 부르고 자기 자신이 ‘예잇!’ 하고 대답하는 1인2역의 자문자답이 아우르는 대화와 독백까지 여기서 감당할 이유는 없겠지. 한마디로 ‘대화’라는 낱말은 매혹의 극치야. 저 상고시대부터 인간의 사유를 찬란하게 펼쳐온 표현의 사회화가 이로써 가능했으니까. 고대 세계종교들의 대화 형식에 의한 진리 드러내기나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철학의 단초에 있는 ‘대화편’ 등에서도 이미 대화란 하나의 문화 정석(定石)임을 얼마든지 자임할 법하겠어. 그러므로 대화란 ‘정신의 잔치’라고 찬탄한 시인 호메로스의 말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야.
김형수 = 대화라 하면 고작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이나 떠올리는 제게 선생님의 시야는 너무 넓습니다.
고은 = 근대 이래 대화는 근대인의 인문적 지향과 시민생활의 활성을 위해서 거의 필수적인 인간행위였어. 동양의 전통사회에서 절대 다수의 민중들은 지식과 교양이라는 지배문화와는 별도로 자신들의 공동체적 환경에서 자신들만의 구성진 대화 생활을 함으로써 삶의 이유를 확보했지. 그래서 나는 지난 1960년대부터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뒤늦게 나섰던 ‘대화’의 운동이 보여준 가능성에 앞서 한국의 조선 자연부락에 있어온 생활상의 일상 대화가 지닌 정경에서 새삼스레 대화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어. 누군가가 논쟁은 수컷이고 대화는 암컷이라고 말했거니와 아낙네들의 우물가 몇 마디의 두서없는 대화야말로 끝내 대화의 진수가 아닐까 여기게 돼. 이것은 지식인들의 경쟁적이며, 그러기 위해서 더 관념적으로 돌기해가는 대화가 얼마나 삶의 현장에서 동떨어진 것인가, 얼마나 틀 지워진 것인가, 얼마나 진실의 나심(裸心)에서 멀리 달아나 버렸는가라는 혐의를 반영하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바는 대화는 인간의 꽃이야. 그러기에 그 자신의 체질로는 대화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니체가 진리란 두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진다고 외칠 때 한층 더 대화가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느냐는 문제가 새로워지겠지.
김형수 = 대화의 탄력, 긴장, 이런 걸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말씀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지 않도록 몸가짐을 다시 하겠습니다.
고은 = 사실인즉 대화는 인간에게 가장 오래된 이해의 방법이 되어 왔어. 대화법은 가장 해묵은 인류의 유산이기도 해. 2500년 전 석가와 애제자 수보리 간의 금강경 대화의 길이나 유마와 문수사리의 병문안 대화는 극적이기까지 했어. 저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어느 도시국가보다 대화의 도시이기도 했지. 파르테논 신전 밑의 시장거리 아고라는 지금이야 관광객이나 기웃거리는 팍팍한 공터지만 옛날 당시야 한쪽에서는 생필품 따위를 떨이로 파는가 하면 그런 장바닥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질세라 다른 쪽 공터에서는 40대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젊은 추종자들의 지치지 않는 질의응답이나 대화법의 실상을 밤중까지 이어갔지. 아예 문자를 경멸하는 소크라테스의 구두(口頭) 지상주의가 그렇게 무르익었어. 거기서 플라톤 ‘대화편’이라는 철학의 알파가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지. 죽은 스승의 생전을 여실하게 그려내며 그 스승을 극복하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깔아놓은 그것은 그밖에도 크세노폰, 아이스키네스, 파이돈 등이 밝혀지고 플라톤의 제자도 스승을 본받아 대화편을 썼지. 이게 로마로 건너가 키케로로 이어지고 그것이 에세이로 풍자 대화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 명줄은 질겨서 프랑스 계몽시대 디드로에까지 연변하고 있는 것이 놀라워. 한 가지 쓴웃음이 나오는 것은 히틀러도 문자를 내치고 구술을 즐긴 나머지 대화정신을 부정한 그의 웅변에 심취했지.
김형수 = 저도 어릴 때 말더듬이 있어서 오랫동안 소통을 고통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고은 = 본디 대화란 일대일의 교육행위 내지 표현행위였겠지. 그것은 활자문명이 고대 중세의 집단을 위한 낭송의 시가 시집이라는 활자매체와 그것을 읽는 개인 사이에서 묵독의 시가 된 것처럼 극히 제한적이며 사적이기까지 한 것이었지. 더러 아고라나 아카데미라는 교외 숲속의 언덕에는 하나가 아닌 여럿에게 스승의 목소리는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디오니소스의 비극처럼 집단을 위한 것은 아니었어. 아마도 이런 점이 대화가 양보다 질의 편에 있게 되었는지 몰라. 현대사회, 특히 시장의 가치로 모든 가치가 규정되는 사회에서나 일방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정권에서나 인간사회의 숨결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소외 방어의 소통을 흔히 대화에서 찾으려는 고민이야말로 그것의 질과 함께 양에서 찾아야 할 터인데. 그동안 우리는 세칭 거대 담론의 시기도 살아보았지. 그것의 자기화에 이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탈현대의 분해 속에서 자아에 갇혀 버리기 일쑤이지. 권력도 대화를 싫어하거니와 권력의 객체조차 대화의 의미를 등지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깊어져. 지금이야말로 대화의 다층위기 내지 만성위기야.
김형수 = 앞에서 논쟁은 수컷이고 대화는 암컷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얼마나 깊이 박혀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끔 수컷의 마음도 암컷의 마음도 잃어버린 자폐의 시대를 사는 느낌을 갖습니다. 문명이 온통 ‘자의식 비대증’을 앓는다고나 할까요? 다들 ‘존재의 내부’에만 집착하다 보니 ‘자의식의 바깥’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지는 겁니다. 자의식의 비대화는 대화와 독백이라는 언어의 두 가지 기능을 없애버립니다. 대화는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고 독백은 서로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날 텐데 자아가 지나치게 확장되어 자아의 바깥이 사라지고 나면 대화도 독백도 사라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고은 = 이런 때에 어느 밤의 달빛 같은 대화를 지향하는 일은 그 형식의 중요성으로 그 내용의 중요성이 앞당겨지네. 행여 우리들의 이 먼 길이 우리들만의 동굴 밀어가 아니라 세상의 한 골목에라도 하나의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바 간절해.
김형수 = 대화 형식에 대해서 길게 말씀하신 취지를 알 것 같습니다.
고은 = 저 날새기가 무서운 <세헤라자데>의 그칠 줄 모르는 서사 의지로부터도 조금은 배울 것이 있겠지. 또 30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의 할머니한테 들을 수 있었던 옛날이야기의 그 진진한 밤의 초롱초롱한 어린이 눈빛도 떠올려져. 그 어린아이들은 청중만이 아니라 화자의 대화 동기를 낳아주었지. 판소리의 고수나 청중의 ‘얼씨구!’도 대화를 뜻하겠지.
김형수 = 강물은 샘솟을 때 바다에 이를 것을 계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고은 = 대화의 처음도 처음이야. 처음이란 연애도 도둑질도 그리고 어떤 진실에의 미지에 발 디디는 그 처음으로 가슴 두근거리네그려. 한 가지 점 찍어둘 일은 우리는 어떤 가치의 척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야.
김형수 = 아, 네. 어느새 21세기 속으로 꽤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두 세기에 벌어진 일들을 선생님만큼 속속들이 겪으신 분이 있을까 싶습니다.
고은 = 시대구분론이란 근대 인텔리겐치아의 장난인지 몰라. 그래서 나는 옛날 동양에서 말하는 청사(靑史)라는 장대한 과거 감각이 마음에 들어. 또 아날학파의 ‘장기 지속’으로서의 천년 단위도 그럴싸해. 천년만년 살고지고의 그 시간의 유장함도 우리네 조상들의 민간 유전자 아닌가. 서양에도 3000년쯤의 역사 공간을 미래로 설정한 사람이 있어. 칼비노던가. 장대한 시야에 미래를 담아 피폐한 현대문화를 갱생시키려는 한 처방이라고 하지. 아예 ‘처음과 끝’이라는 무한 설정도 있어. 사실인즉 서기의 BC나 AD도 시간의 골짜기를 못 벗어나.
김형수 = 사유의 협곡이라고 할까요? 여러 낱말이 제게 생각의 비좁음을 깨닫게 합니다. 한데, 문득 탈자아, 탈공간, 탈시간적 인식과 사유가 떠올랐습니다. 통속적인 몸과 영원적인 사유가 분절되는 것 같은 경험 말입니다.
고은 = 내가 전생 다생을 말하는 것도 종교의 차원 말고 삶의 연속 차원이고 시의 차원이야. 그래서 내 육체가 곧 미래이다라고 술 취해서 장담해보기도 해. 사마천 <사기> 밖에서의 고대 중국의 유구한 시간이나 그보다 더한 고대 보도의 무시간적 시간 앞에서 근대사의 시간은 왠지 좀스러워. 그래서 나는 내 현재가 적어도 200만 년 전 홍적세 이래 인류 8만 세대에 걸친 유구한 본성을 계승하는 현재라고 생각하면 나 자신이 시시해질 수 없어. 내 시의 본성은 그렇게 오래 내려온 핏줄로 길고 길어. 끝내 나는 별의 핏줄이야.
김형수 = 언젠가 선생님을 큰 세상에 다녀가시는 ‘어린 나그네’라 쓴 적이 있는데, 사실 선생님께서 쓰신 말을 표절한 것입니다. 그 어린 나그네는 지금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넋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고은 = 이런 나라 해도 내가 언제 태어났는가 하는 신원진술서 같은 질문 앞에서는 한갓 달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아. 그것도 좋아. 식민지 36년의 절반쯤에서 그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 좋은 1930년대 초반에 나는 태어났어. 이렇게 35년, 36년 따위의 시기조차 쪼개지고 나눠서 뭘 하나 할 수 있겠지. 한번 이런 짓을 하기로 한다면 서구 현대사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10여 년과 그 이후의 10년을 나누어서 희망의 역사, 절망의 역사로 파악하는 사례도 있어. 1930년대도 아니나 다를까 그 후기는 그냥 전기의 계속인 것과는 달리 바로 일제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확대라는 광기와 마침내 태평양 위의 미일전쟁으로 번져나가는 그런 시기의 발단이었어. 유럽에서는 그간의 국제적 완충화나 각국의 여러 가능성이 정체성으로 전락하면서 저 보헤미아 출신의 육군 하사관이던 히틀러의 나치즘이 출현한 시기였지. 거기에 덩달아 혼란을 빙자해서 나타난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뒤따랐지. 그것들이 미국 다음으로 영국과 아시아 경영을 꾀하던 일제가 그것들에서 등 돌려 독일, 이탈리아와 추축동맹을 맺어버리지. 과연 반동의 계절이었어. 이게 내가 태어난 국내외적 환경이야. 내가 태어났을 때 점성술의 무슨 별이 반짝였는지 알 바 없는 한여름의 삼복중에 내 출생일이 들어 있어.
김형수 = 말씀을 듣는 동안 제 자신이 마치 세상의 하중을 안 받는 몸뚱이를 가진 것처럼, 질량이 없는 유령처럼 느껴지다가 한여름의 삼복중에 태어났다는 말씀에서 남도 시골 장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떠올라 퍼뜩 깨어났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자식이거든요.
고은(78)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 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1933년 전북 군산 출생으로 12년간 조계종 승려로 수행했으며 환속 이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간사(1974), 남북작가회담추진위원장(1989)을 역임했다. 현재 겨레말남북공동편찬위원회 위원장이다. 1958년 처음 시를 발표한 뒤 50여 년간 시·소설·평론 등 여러 분야의 저서 150권을 펴냈다. 1990년대 이후 23개 언어로 작품이 번역돼 세계 언론과 독자에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한국 작가로는 가장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다.
김형수(52) 시·소설·평론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과 담론 생산으로 1980년대 이후 민족문학 진영을 이끌어왔다. 시집 <빗방울에 관한 추억>,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반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임옥상(61) “미술은 자연의 부름, 역사의 소리, 윤리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작업”이라는 소신을 바탕으로 국내외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1981년부터 14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공공미술에 주력했다. 전주대 교수, 민족미술협의회 대표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