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짐’을 ‘힘’으로 바꿔주는 산행
글쓴이_ 이권우(도서평론가)
김별아 치유의 산행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산에 오르는 이들은 안다.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기 위해서임을.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 되면, 출발할 때 가득했던 근심과 걱정이 어느덧 사라졌다는 점을 깨닫는다. 문제가 해결돼서? 그럴 리가. 그저 걸었을 뿐인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 시간이나마 걱정거리를 잊을 수 있어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사실이다. 육체의 고통이 정신의 짐을 잠시 잊게 해주었을 뿐인데, 어느덧 치유의 경험을 한다. 말하자면, 속세에서 잠시나마 신화의 시간대에 돌입한 경험을 한 셈이다. 지금, 이곳을 잊기 위해서 사람들은 산에 오른다. 산이 주는 놀라운 선물이다.
소설가 김별아가 뒤늦게 이런 경험을 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학부모가 함께 백두대간을 타는 동아리를 만들었단다. 이미 다섯 기수가 이 어려운 여정을 마쳤다. 스스로 평지형 인간이라 자처하며 산에 오르는 이들을 뜨악하게 보았던 그네가 왜 이 대열에 동참했고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코의서재)에서 김별아는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삶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을 견디는 가운데 얻은 크고 작은 상처와 좌절의 기억에 꺼둘려 살았습니다. 그렇다보니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운 채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급급해 행복, 희망, 사랑같이 달보드레한 말은 입에 담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나는 한편으로 나를 미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요. 자연의 생명력, 치유력 따위의 말을 알고는 있었지만 절실히 느끼지 못했던 내가 산을 타는 동안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발 한발 산을 오르며 민낯만큼이나 치장하지 않은 솔직한 마음자리를 만날 수 있었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서는 깊고 낮은 마음의 바닥을 들여다보았으며,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날 때는 누구도 대신 올라줄 수 없는 산이기에 오직 나를 믿고 밀어갈 수밖에 없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일러스트 ㅣ 김상민 기자
이 책을 백두산행기로 본다면 얻을 바가 별로 없다. 아무리 무리지어 다녔지만, 산행 초기에 겪을 만한 일이 나올 뿐이다. 길 잃어 헤매고 낙석사고로 큰 사고 날 뻔하고 물 모자라 쩔쩔매고 비 맞아 등산화 흠뻑 젖어 곤란했던 일을 굳이 책을 읽으며 확인하고 싶은 이는 없을 터다. 산 자주 타는 이들은, 어쩌면 뒤늦게 산행의 즐거움을 안 이가 떠는 소란에 마음 불편할지 모른다. 그것도 백두대간을 완주한 게 아니다. 전체 구간의 반 정도를 마쳤을 뿐이다. 진즉 해야 했을 것을 나중에 알아 호들갑 떠는 이만큼 푼수가 어디 있겠는가. 이 책에는 그런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김별아 치유의 산행’. 백두대간을 타며 바라보았던 자신의 내면세계와 그곳에 찍혀 있는 마음의 화상을 어찌 치유해나갔는가를 기록해놓았다. “산행기이기도 하고 마음을 따라가는 에세이이기도 하며 오래 묵었던 상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한 셈이다.
백두대간을 타며 그네는 등산은 운동이 아니라 명상임을 알았다. “헐떡거리며 한발자국 한발자국을 옮기는 동안 서서히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런데 무조건 사라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때 “오랫동안 싸안고 다닌 덧짐처럼 지우고픈, 지워야 할 기억들도 하나둘 물밀어들었다 지나간다.” 도통 들여다볼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심연의 세계를 엿볼 기회를 산 타다 만났다는 뜻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그런 기회가 있었으련만,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워 서둘러 미봉해 버렸으리라. 그네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튀어오른 어린 날의 상처라는 고기를 잽싸게 낚아챘다. 그게 치료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이들은 익히 안다. 한 드라마의 대사처럼 내 안에 네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안에는 세 살부터 여섯 살 사이 부모한테 받은 상처로 입때껏 울고 있는 나의 어린 시절이 있다. 내 안에는 내가 있는 법이다. 그네도 어린 시절의 그네를 만났다.
그네는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관심을 받지 못한 데 대해 분노”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딸내미를 세상에 내놓은 지 한 달 만에 교단으로 복직했던 어머니, 아무래도 가부장적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정일에 지극히 무심할 수밖에 없던 아버지를 둔 탓에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날 동안 여러 양육자를 전전해야 했다.” 그 대가는 일종의 소아우울증이었다. 학교에서는 버젓이 모범생이었지만, 집에서는 작은 폭군으로 군림했다. 제니스 A 디 치아코의 말대로 “비관주의, 부적격자라는 느낌, 현저히 떨어지는 활동성, 지속적인 슬픔, 절망, 원기상실, 무가치하다는 생각과 희망이 없다는 느낌, 즐거움의 상실, 먹고 자는 습관의 변화, 죽음과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엉망진창이 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제3자의 시선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공부 잘하는 ‘엄친아’인데다 성실한 반장이었다. 남 앞에서는 얌전하고 반듯한 아이였다. 그러나 집안에 혼자 있을 때면 머리통이 울리도록 벽을 들이박거나 칼로 팔뚝에 빗금을 그렸다. 실수하는 자신을 참을 수 없었단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시시한 것일지라도 내가 치밀하게 세워놓은 계획과 정교하게 짜놓은 각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실수하고 멍청한 짓 하면 가혹하게 자신에게 벌을 주는 아이로 살아왔다. 정말 마음밭이 마치 “소금밭처럼 짜디짜고 바싹했다.”
이 늦깎이 산악인에게 배워야 한다. 산을 오르며 마치 낮달처럼 떠올랐던 내 삶의 추악한 면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네는 자신에게 집요하게 물어보았노라 했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가”라고. 참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던진 질문이다. 그토록 간절한 질문이었기에 답에 이르렀다. 생각보다 훨씬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아니겠는가. 갈등하고 방황했던 것도 기실 나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산행이었을 터. 죽음에 대한 강렬한 유혹은 한번뿐인 삶을 뜨겁게 살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말이었을 뿐. 그래서 마침내 다음처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힘과 짐, 혹은 짐과 힘이 나뉘는 지점에 ‘자기연민’과 ‘자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고통과 시련이 곧 도전의 기회이자 스스로에 대한 시험대가 된다. (중략) 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하기보다는 가련하게 여기며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에게는 모든 고통과 시련이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짐이 된다. (중략) 나를 아끼고 존중하되, 불쌍히 여기지 않기로 한다. 보듬어 다독이되, 딱하고 가엽게 여기며 쩔쩔매지 않기로 한다.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기보다는 깊이 이해하여 진심으로 사랑하기로 한다. 그럴 때 ‘짐’은 비로소 ‘힘’이 된다.”
세상살이에 지쳐 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는 이라면, 책 제목에서 위로받을 일이다. 다윗 왕 시절 이야기다. 다윗이 궁중 세공인을 불렀다. 전쟁에서 승리했다 해서 오만하지 않도록, 패배했다 해서 좌절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경구를 반지에 새겨오라 했다. 고민하던 세공인은 결국 솔로몬에게서 답을 찾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그것이었다. 산을 타다보면 이른바 깔딱고개라는 것이 나와 정말 숨이 깔딱거릴 정도로 힘들 때가 있다. 포기하고 싶다. 무슨 영광을 보려 이 짓을 해야 하나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비를 넘으면 능선이 나온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주는 시원한 손길을 느낀다. 오를 적에는 손바닥만한 하늘만 보였으나, 이제 탁 트인 전망이 가슴마저 시원하게 해준다. 힘들 때 조용히 되뇌어보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내리막길이라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내려간 만큼 올라가는 길은 더 험하니. 긴장 풀고 함부로 걷지 말고 오르막 오르기 위해 숨 고르는 시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들떠 함부로 나대지 말고 입에 담아보아야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그래서 산을 타면 성숙해진다. 산이 삶이라는 낱말과 얼마나 비슷한지 알아가게 되어서이다. 그네가 말한다.
“쉬운 산이란 없다,고 터져나온 불평이 쉬운 삶이란 없다,란 중얼거림으로 변한다. 쉬운 산이라고 생각했기에 더 어려웠다. 처음부터 평탄한 삶만을 기대한다면 더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은 원래 이렇게 높고 낮고 울퉁불퉁하고 험한 것이다. 삶도 처음부터 행운과 불운과 뜻밖의 우연과 그러할 수밖에 없는 필연의 요철로 만들어진 것이다. 불평할 것 없다. 산을 원망하랴, 삶을 탓하랴?”
여기서 그칠 리 없다. 그네는 운명애론자가 된다. 골방에 갇힌 니체가 아니다. 산에 오르는 니체다. 자학, 좌절, 후회에서 벗어나 자애, 열정, 긍정으로 변한다.
“다만 삶이 그러하듯 산도, 산이 그러하듯 삶도, 그 걸음걸음이 이유이자 목적인 ‘끊임없는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휙휙 쌩쌩 스쳐간다. 머무르는 것이라고는 없기에 때로 허전하고 쓸쓸하지만, 머무르지 않기에 미련 없이 버리고 돌아설 수도 있다. 삶은 지나간 과거에 있지도 않고 다가올 미래에 있지도 않다.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체험하는 바로 그것뿐!”
산은 그저 저곳에 있을 뿐이다. 스스로 찾아올 적에 비로소 품안에 안아준다. 이제 산으로 가보길. 거기서 만나는 자신의 민얼굴을 직시하길.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 비관은 낙관으로, 좌절은 희망으로, 상처는 삶의 거름으로 바뀔 터. 지금 이곳의 삶을 축제처럼 지내는 힘을 그 산이 줄 터이다.
글쓴이 이권우는 출판저널 편집장을 지냈으며, 자칭 ‘책읽기의 달인’ ‘소문난 책벌레’라 할 만큼 이 시대 가장 앞서가는 독서가이자 도서평론가입니다. 이른바 ‘출판저널리스트’로서 다양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위 글은 현재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도서평론가 이권우의 길 위에서 책읽기’ 꼭지 중 하나(2011-09-03)를 전재한 것입니다. 쓴 책이 여럿 있는데 <죽도록 책만 읽는>과 <호모 부커스>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