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 조금 남아 있는 농투성이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1910년대까지가 개화 계몽기였다면, 20년대부터 30년대까지는 민족·민중적 저항이 본격화하는 시대였다. 러시아 혁명이 있고나서 식민지 조선의 프로 문학은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물결을 배경으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문예운동의 현대적 대응이었다. 조선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1925년 창립), 일본의 나프(NAPF, 전일본무산자에술동맹, 1928년 창립), 중국의 좌련(중국좌익작가동맹, 1930년 창립) 등은 세계적 조류의 동아시아적 현상이었다.
이기영은 한설야, 조명희와 함께 카프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된다. 카프의 출발점이 그러했지만 결국 대부분의 소속 작가들이 관념성과 슬로건을 벗어나지 못하고 기계론적 이념의 골격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은 데 비하여, 그는 전통적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이면서 드디어 장편소설 <고향>에 이르러 다른 진영에도 작품으로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기영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아마도 4·19 이후였을 것이다. 당시 인사동·청계천 등지의 고서점에는 월북한 시인·소설가·학자들의 책이 나돌기 시작하여 그 뒤 십여 년 동안 끊임없이 유통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런 헌책들을 읽은 시인 김지하가 ‘말똥종이’ 세대라고 자칭한 것도 그런 탓이다. 일제 치하와 해방공간의 물자부족 시기에 재생 종이에 인쇄된 책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강제로 끊어진 문학적 분단을 뛰어넘으려던 것인지도 몰랐다. 진작 홍명희의 <임꺽정>은 중학생 때의 여름방학에 어디선가 누나가 빌려온 것을 며칠 동안 배를 깔고 엎드려서 ‘깨가 고소하게’ 읽었고, 이기영의 초기 단편과 <고향>을 대학 시절에 찾아 읽었다. 그의 후기작인 <봄>은 아마도 광주에 살 때 어느 집에선가 겉장이 떨어지고 쥐똥 얼룩이 묻은 채 굴러다니던 헌책을 집어다 읽었을 것이다. 70년대의 어느 겨울에 신경림 시인이 이용악, 백석, 정징요 등의 시집을 복사하여 선후배 몇몇이 함께 돌려보다가 전원이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던 기억이 남아 있다. 지금은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방에서 유행가처럼 누구나 노래할 수도 있게 되었건만.
이기영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호방한 개화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카프의 이론가이자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이었던 안막의 아버지와 더불어 세운 영신보통학교를 나왔다. 그는 살림에 변변치 않은 아버지를 벗어나 각처를 방랑하며 밑바닥 직업을 전전한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열네 살 때에 두 살 위의 여성과 조혼을 했던 이기영은 ‘본처’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만나서 새살림을 차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가 정규교육을 차분히 받은 것은 그나마 영신보통학교 시기였다. 나중에 일본에 가서 소설가 조명희 등과 야학을 하며 야간부 영어학원을 다니다 관동대지진으로 일 년여 만에 돌아왔으니, 그의 교육은 오롯이 독서를 통한 독학이 전부였을 것이다.
1989년 내가 떠들썩하게 방북했을 적에 나는 몇몇 월북문인 가족들과 면담할 수가 있었고 이기영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이미 84년에 작고했는데 노처와 맏딸, 맏며느리, 막내딸, 손자 등이 나를 맞았다. 노처는 철원에서 농사지으며 일제 말기에 숨어 살던 얘기를 하다가 삼팔선으로 이북이 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평양으로 오게 되었다고 그랬다. 남편이 이태준과 더불어 소련을 다녀온 46년까지는 남과 북을 마음대로 오갔다고 했다. 말년까지 집필을 계속했다니 아마도 그가 맡았던 ‘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 직책은 얼굴마담 역할이었을 것이다. 마침 남쪽에서 월북문인의 작품이 해금되어 그의 대하소설 <두만강>이 출판되었을 때여서, 남에 있던 손자님께 출판사 측이 인세를 드리고 기념사업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그랬더니 온 가족이 한참이나 침묵했다.
나중에 내가 그 집을 나올 때 맏며느리가 따라나오며 “이남에 계신 손자님께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고 나직하게 말했다. 이남에 살던 맏아들은 평생을 청상으로 살다 간 본처 한양 조씨의 소생이며, 그들 모자는 해방과 전쟁 사이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침묵 속에 평생을 마쳤다. 그리고 이북에 있는 맏아들은 아·태 평화위의 이종혁이다. 그는 김정일과 김일성대학 동창이었으며, 남로당 경제통이었던 창녕의 대지주 성모씨의 딸 성혜림과 교제했고, 주석의 아들에게 그녀를 양보했다. 성혜림의 아들이 김정남인데, 그녀의 가족사는 비극적이다. 이종혁은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수재로 독일·이태리·유엔 대표부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방북했을 때 상대역으로 수차례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베를린 체류 시절에 로마에 있던 이종혁이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를 통하여 내게 전화를 했고, 노모에게 인사를 드린 것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전한 적이 있다.
‘쥐불’(원제는 한자로 ‘鼠火’이지만 민속에서도 일컫는 대로 필자가 한글로 고쳐 씀)은 이기영이 1·2차 카프 검거 선풍에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기 전에 쓴 단편소설이다. 이를테면 그의 단편 ‘쥐불’과 장편 <고향>은 카프 문예운동을 선언한 이래 비로소 관념이나 이론이 아닌 작품으로 당대를 형상화한 셈이 되었다. 작품이 발표된 1933년 무렵은 앞서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좌우 합작운동이던 신간회가 해체되었으며, 윤봉길의 상해거사가 있었고, 전국적인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총독부는 치안유지법 개정으로 3000여 명을 구속했다. 그리고 총독부는 미곡 생산 통제를 위하여 농촌갱생운동(신생활운동)을 실시한다. 유신이란 단어도 그랬지만 내가 70년대에 향토예비군으로 겪은 ‘국민교육헌장’ 암송은 선배들의 일제시대 ‘교육칙어’ 암송에 해당되고 ‘새마을운동’은 ‘신생활운동’과 흡사하다.
‘쥐불’은 돌쇠라는 주인공이 양식이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동네 청년들과 정월보름날 노름을 하는 데서 시작한다. 사실은 소 판 돈을 갖고 있던 이웃집 응삼의 돈을 따먹으려고 꾀었던 것이다. 응삼은 사람이 모자란데다 이쁜이라는 이름처럼 고운 아내를 가졌고 그녀는 속으로 돌쇠를 좋아한다. 면서기 원준은 자기가 탐내는 이쁜이의 속내를 눈치 채고 유지들을 선동하여 마을회의에서 돌쇠를 신생활운동을 저해하는 타락분자로 몰아세우고, 돌쇠는 자책과 함께 어느 지식인 청년의 도움으로 유지들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소작농의 현실을 말한다. 작품에서 지식인의 등장과 유부녀인 이쁜이와의 정분이 부자연스럽기는 하여도, 오히려 민중의 부정적인 이중성을 그냥 까발린 채로 당시의 농촌사회를 드러낸다.
‘쥐불놀이’는 해동 무렵에 한 해 농사의 밑거름과 해충 구제를 위하여 논밭에 불을 지르는 일종의 정화 행사인데, 아마도 그 뒤에 씨를 뿌리면 건강한 알곡이 열릴 것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다른 신경향파 작가들의 지옥도 같은 생활상이나 경직된 투쟁의 교훈 없이 살아 생동하는 사람살이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기영은 그의 ‘창작방법 문제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에 문학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은 대개 소시민적 인텔리 출신이므로 그들의 제작하는 작품이 필연적으로 인텔리적 취미를 띨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프롤레타리아문학이 되는 이상 모름지기 대중성을 가져야 할 것 아닌가? 더구나 문화의 정도가 낮고 전 인구에 문맹이 대다수를 차지한 이 땅에서는 그럴수록 통속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