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희랍어 시간 - 한강 장편소설

라라와복래 2011. 11. 20. 11:30
 

희랍어 시간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2011-11-10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낸 것일까. 전소해버린 줄 알았던 언어의 검부러기 밑에서 올라오는 참된 음절들을. 작가는 언어가 몸을 갖추기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흔적, 이미지, 감촉, 정념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신생의 언어와 사멸해가는 언어가 서로 만나 몸을 비벼대는 찰나, 우리는 아득한 기원의 세계로 돌아가 그곳에 동결해둔 인간의 아픔과 희열을 발견한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다.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참된 욕망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0도 근처에서 차갑게 끓어오르는 글쓰기의 언저리까지 기어이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과 탄생이 새로운 몸을 얻어 환생하는, 세속의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 이렇게 아름답게, 온전하게 몰락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소설이 우리에게 있었던가. _이소연(문학평론가)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여기, 한 여자의 이야기

그것이 다시 왔어.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이, 여자는 말語을 잃는다. 그것이 처음 왔던 것은 열일곱 살 겨울. 말을 잃고 살던 그녀의 입술을 다시 달싹이게 한 건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다. 시간은 다시 흘렀다. 이혼을 하고,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다시 그렇게 말을 잃어버린 후,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 놓을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선택한 것은 이미 저물어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 그곳에서 만난 희랍어 강사와 여자는 서로의 앞에 침묵을 놓고 더듬더듬 대화한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남자의 이야기

시간이 더 흐르면……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꿈에서뿐이겠지요.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 남자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볼 수 없다던 마흔이 가까워오지만 아마 일이 년쯤은 더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아카데미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주의 깊게 지켜보지만 여자의 단단한 침묵과 마주하자 두려움을 느낀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선 본 적 없는 지독한 침묵. 그리고 점점 소멸해가는 남자의 미약한 빛. 이 어스름이 완전한 밤으로 이어지는 걸까.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어쩌면 한 장의 사진을 오래토록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한 장의 사진 | 필립 퍼키스는 <사진강의 노트> 제일 첫 장에서 ‘바라보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말 것,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낄 것. “의미는 없다. 오로지 사물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W.C. 윌리엄스의 말을 인용하며 그는 말한다.


사진이 찍혀지는 순간까지 그것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삶 전체를 통틀어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은 이 머무름과 반대 선상에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 빛, 공간, 거리 사이의 관계, 공기, 울림, 리듬, 질감, 운동의 형태, 명암… 사물 그 자체… 이들이 나중에 무엇을 의미하든 아직은 사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성적이지도 않다.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_필립 퍼키스 <사진강의 노트>


비슷한 의미에서, 윌리 로니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보통 나는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린다. 실재가 더 생생한 진실 속에 드러나도록. 그것은 시점의 쾌락이다, 때론 고통이기도 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_윌리 로니스, <그날들>


이렇게 오롯이 사물 그 자체(혹은 존재하는 그 자체)가 담겨진 한 장의 사진을 오래토록,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보면, 거기에선 천천히 어떤 기미들이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 <희랍어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기미를 발견하고 흔적을 더듬는 일이다.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 기미와 흔적들은 어두운 암실, 정착액 속의 사진이 점점 선명하게 상을 만들어내듯 어느 순간 고대문자처럼 오래고 단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진 현재진행형의 시간까지를 포함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요?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을 찍는다면 그건 바로 이 순간 일어난 일입니다. 십 년 후에 당신이 그 사진을 볼 때, 순식간에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옵니다. (……) 사진은 동결된 순간이며 기억입니다. 하지만 사진은 늘 현재의 순간을 담고 있지요. 바로 사진의 마법이지요. _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그 어떤 사진이라도, 만약 그것을 위하여 적절한 맥락이 창조된다면 그러한 ‘현재’가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진이 좋으면 좋을수록 창조될 수 있는 그 맥락은 보다 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한 맥락은 시간 속에서 그 사진을 대신하게 되는데―그것은 불가능한 것인 그것 자체의 원래 시간이 아닌―서술되는 시간 속에서이다. 서술된 시간은 그것이 사회적 기억과 사회적 행위의 성격을 띠게 되면 역사적 시간이 된다. 짜맞추어진 서술되는 시간은 그것이 자극하고자 하는 기억의 과정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_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암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빛과 어둠이다. 암실에 자연광이 새어들어가게 되면 사진은 하얗게 바래어지고, 암등의 빛이 과하게 되면 사진은 까맣게 타버린다. 그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사진이 완전히 마른 후에야, 인화가 제대로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빛과 어둠과 시간이 만들어낸 예술. 그것이 사진이라면, <희랍어 시간>은 해서,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이며, 그것은 오로지 빛과 어둠으로만, 명암으로만 완성되는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오직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명암 속에서 그 진실을 밝히는.”(G. I. 구지프)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되고 단단한 문자인 희랍어처럼, 빛과 어둠으로만 완성되는 흑백사진처럼, 소설은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으며 그 결이 곱고 단단하다. 목수이며 사진작가인 서영기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목수는 몸의 반응이 중요하다. 나무를 만지고 몸이 반응하며 정신적으로 집중하게 된다. 사진은 세계에 대한 내 사고의 반응이다. 대상은 달라도 반응이 반복되고 집중되면서 동일한 지점에서 둘은 경계가 없어진다.”(월간 사진, 2011.11)


한강의 경우, 그리고 이 소설 <희랍어 시간>의 경우 그것은 언어일 것이다.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감정과 고르고 또 고른 절제된 단어들. 언어로, 문장 그 자체로 세계를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이미 한 장의 사진과, 이 한 편의 소설과 그대로 닮아 있는.


이 소설과 함께,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하던 것들, 그 기미와 흔적들, 영원과도 같은 어떤 찰나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어떤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한강 1970년 이른 겨울 광주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이 되던 겨울, 서울 수유리로 옮겨와 성장기를 보냈다.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0) <채식주의자>(2007) <바람이 분다, 가라>(2010), 창작집 <여수의 사랑>(1995) <내 여자의 열매>(2000)를 출간했다.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을 받았고,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재직 중이다.

 

말을 잃은 여자, 눈을 잃은 남자… 상실로 소통하다

희랍어 시간ㅣ한강 지음ㅣ문학동네ㅣ194쪽


여자와 남자는 한 인문학 아카데미의 희랍어 시간에 만났다. 여자는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 남자는 희랍어 강사다.


한강(41·사진)의 신작 소설에서 희랍어는 중요한 상징이다. 라틴어보다 훨씬 어려워 유럽인들도 싫어하는 언어, 수동태·능동태 외에 중간태까지 갖춘 정교한 언어, 문법적 복잡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쇠락의 기미 없이 사라져간 언어, 언어이면서 더 이상 언어가 아닌 언어다.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는 이유는 실어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열일곱 살 때 처음 실어증에 걸린 그녀는 낯선 불어 단어를 배움으로써 말을 되찾았다. 그리고 20년 만에 여자는 다시 말을 잃었다. 이혼한 뒤 혼자 키우던 아이를 소송 끝에 전 남편에게 빼앗겼다. 예민한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엄마마저 여의었다. 편집자, 문학강사로 일했으며 세 권의 시집을 낸 여자는 모든 진부한 언어를 뒤로한 채 희랍어를 배운다. 그리고 희랍어로 조금씩 시를 쓰기 시작한다.


남자에게도 희랍어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10대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 간 그는 두 문화의 균열 속에서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지극히 내성적인 그는 외국인이란 이유로 늘 남의 눈에 띄는 자신의 처지가 싫었다. 아시아계 학생이 수학을 잘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뛰어난 희랍어 실력 앞에서 독일 아이들은 기가 죽었다. 그런데 부계 유전에 따라 점차 시력을 잃어간다. 견딜 수 없는 공포와 싸우던 그는 한국행을 택하고 희랍어를 가르친다.


부서질 것처럼 섬세한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직조된 이 소설은 여자와 남자가 살아온 과거, 그리고 희랍어를 사이에 둔 현재의 일상을 담아낸다. 여자의 장(章)은 3인칭으로 돼 있다. 말을 잃은 여자는 자신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늘 검정 옷을 입고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걷는 그녀는 희랍어 수업에 나가는 걸 빼고는 어두운 집안에 물끄러미 앉아 있다. 반면 남자의 장은 수신되지 않는 편지들로 돼 있다. 첫사랑이던 농아 여인에게, 여동생에게, 그리고 유일한 독일 친구이자 자신을 사랑했던 저승의 요하임 그룬델에게.


두 사람에게 희랍어 시간은 유일하게 외부와 소통하는 시간이다. 그 수업에는 철학과 학생, 대학원생, 그리고 한 직장인이 더 있다. 어느 날, 여자가 희랍어로 시를 쓴 걸 발견한 동료 수강생은 남자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남자는 시를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만, 여자는 가방을 챙겨서 나가 버린다.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여자가 농아라고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사과하려고 애쓴다.


다시 두 사람이 부딪치는 계기가 찾아온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카데미 건물 안으로 박새가 날아 들어오자 여자는 바깥으로 내보내려다 실패한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새가 내는 기척에 컴컴한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져 안경이 깨지고 손을 다친다. 도움을 청하는 그의 음성을 들은 여자가 달려오고, 손을 치료한 뒤 집으로 데려다준다. 말을 잃은 여자와 눈을 잃은 남자 사이에 마침내 따스한 감정이 오가기 시작한다.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저마다 상실의 통증을 갖고 있다. 여자는 말을 잃고, 남자는 눈을 잃고, 남자의 첫사랑은 귀를 잃고, 남자의 병약한 친구는 요절했다. 남들보다 좁은 출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언어는 더욱 큰 존재감을 갖는다. 미묘하고 허망한 삶의 순간을 예민하게 옮겨 적는 한강의 언어는 더욱 빛을 발한다. 소통이 절실해질 무렵, 여자는 드디어 말을 되찾게 된다.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대중문화에 쫓기는 신세가 된 요즘 많은 작가들이 쓰고 싶어 하는 소설, 줄거리를 요약하기 어렵고 쉽게 드라마나 영화의 대본이 될 수도 없는, 말줄임표로 가득한 시적인 소설이다.


[경향신문 한윤정 기자 2011-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