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ㅣ한승동 옮김
창비
2011-11-18
이 책은 수많은 음악과 음악가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음악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음악에 대해 새롭게 사고하도록 우리를 이끌며, 인간의 귀를 매혹하는 음악이라는 예술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다 근원적으로 생각해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서경식의 음악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인간, 시대, 역사와 호흡해 왔던 음악의 역사가 우리의 눈앞에 마치 한편의 교향곡처럼 장엄하고도 황홀하게 펼쳐진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 이후 더욱 깊고 넓어진 서경식의 사유가 보여주는 경이를 함께하는 기쁨을 만끽하길 바란다.
이 책에서 삶과 예술, 역사는 때로는 불협화음으로, 때로는 협화음으로 변주된다. 한참을 유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실컷 빠져들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가만히 내려놓는 순간, 우리에게 울리는 그 명징한 울림이라니! _최재천(변호사)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순례라기보다는 치열한 연애의 기록이다. 그 기록 또한 불가해한 마력을 품고 있어서 놀랍다. 음악에 대한 사랑은 치명적인 사랑인가보다! _이현우(로쟈, 도서평론가_한림대 연구교수)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저자가 들려주는 서양음악의 세계
치열한 시대적 사유와 서양미술 기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미술과 미술비평이 어떻게 시대의 문제와 맞닿을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미술기행 에세이로, 1992년 한국에 소개된 뒤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20여 년 만에 나온 그 연작으로, 서경식의 주된 글쓰기 대상이었던 미술이 아닌 서양음악을 소재로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또다른 면모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음악이라는 예술이 지닌 고유한 성질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음악이 어떻게 인간․사회․시대와 뜨겁게 호흡해 왔는지까지, 서경식만의 흡인력 강한 글쓰기로 말해주고 있다.
더 깊고 더 방대해진 성찰의 힘
서경식의 글이 지닌 매력은 평이한 문체로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이 있는 인식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정면으로 승부하여 그것을 시대와 역사에 대한 성찰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구체적 현실의 모순으로부터 이른바 시대적 보편성을 획득해나간 그의 글쓰기는 그러나 멋을 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일상의 체험과 느낌을 자신만의 사유로 온전하고도 담담하게 그려 보인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참신하게 받아들여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평이라고는 하나 미술 사조나 개념에 대한 학술적 분석이 아닌, 개인의 체험과 미술작품이 조우했을 때의 진솔한 감정에 대해 서술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으킨 파장은 그 어떤 비평서도 성취하기 힘든 것이었으며, 미술비평에서 한걸음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꿰뚫는 힘까지 지니게 되었다. 그러한 서경식 글쓰기의 힘은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중산층 이상 엘리트 계층의 고급 취향으로서의 클래식 음악이 아닌, 한 인간을 깊은 성찰로 이끄는 예술로서 음악 본연의 모습이 더 깊어진 통찰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음악에 대한 사랑은 치명적이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서경식이 가난한 어린 시절 음악에 품었던 동경과 열등감의 고백에서 출발한다. 문화적 교양과는 거리가 먼, 가난한 재일조선인 집안에서 자랐기에 그에게 음악이란 ‘신분이 다른 연인’과 같은 것이었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이라는 표지(標識)고 교양 있는 가정의 표지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이라는 표지고 재일조선인인 내게 클래식 음악이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스러운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유복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케이스 속의 아름다운 악기를 잠시라도 만져보고 싶다, 무슨 소리가 날지 내 손으로 켜보고 싶다 (…) 애타는 동경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신분이 다른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_‘어릴 적’(본문 43~44면) 중에서
가난에 더해진 문화적 소외로 인해 가지게 된 열등감과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었던 음악을 향한 동경은 사실 소년 서경식의 것만은 아니다. 이는 클래식 음악에, 더 넓게는 고급예술에 대해 우리 모두가 느끼는 당혹과 열망이라 할 수 있다. 고급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한다는 것은 풍족한 엘리트 집안에서 자라나 어릴 적부터 공기처럼 문화적 축적을 누려왔다는 의미이기 쉽다. 클래식 음악은 오디오세트나 값비싼 악기와 음악교육을 동반해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을 알고 싶다는 열망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가 다른 클래식 음악 에세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음악을 향한 자기고백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서경식의 소년시절에서 청년시절,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음악에 품었던 복합적인 감정과 그에 얽힌, 때로는 한없이 서정적이고 때로는 긴장감 넘치는,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어 흡사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하다.
말러와 윤이상 : 음악의 ‘고전적 가치’를 찾아서
이 책에는 수많은 음악가와 연주자, 지휘자, 오페라 가수들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은 오스트리아 제국 말기 유대인이었던 지휘자 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박정희 정권 시절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세계적인 현대음악가 윤이상이다.
구스타프 말러는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음악가로 빠르게 명성을 얻지만, 급속도로 팽배해진 반유대주의 정서로 인해 빈 궁정가극단 음악감독직을 박탈당하고 불행 속에 죽음에 이른다. 이후 말러의 음악은 1․2차 대전을 거치며 독일 정신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상연을 금지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윤이상은 박정희 정권 시절 간첩으로 몰려 납치와 고문, 투옥을 당했지만 ‘윤이상을 석방하라’는 서방세계의 강력한 요구로 풀려나 독일에서 왕성한 음악활동을 벌이다 타계한 세계적인 음악가다. 서경식은 그간 발표한 다른 글에서 윤이상에 관해 간간이 언급해왔으나, 이 책에서는 윤이상과의 인연이나 윤이상 음악이 이뤄낸 고도의 예술적 성취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한다. 윤이상과 관련된 4편의 글은 이 책의 백미로, 정치적 수난자로서의 윤이상과 예술가로서의 윤이상이라는 두 가지 면모에 깊이 빠져든 청년 서경식이 어두운 현실에 갇히지 않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한 윤이상처럼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과정이 매우 강렬하게 묘사된다.
말러와 윤이상 모두 음악적인 천재들이었으나, 파시즘에 억압당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은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남아 더욱 활발히 해석되고 연주되고 있다. 지금도 앞으로도 이들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두 음악가들이 겪었던 고통이나 시대적 상황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서경식은 이것이 바로 이것이 그들 작품이 지니는 ‘고전적 가치’라고 말한다.
음악이라는 폭력 : 아우슈비츠 이후의 음악
히틀러가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고 특히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에 깊이 심취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수인(囚人) 오케스트라가 있어서 나치 친위대를 위해 오페레타를 연주하거나 교수형 집행 때 경쾌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이는 음악이 가장 잔혹하게 사용된 사례일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생환 이후에도 수용소에서 흘렀던 음악이 들리면 그 순간에 피가 얼어붙는다고 했다. 이러한 음악의 그로테스크한 역사는 사악한 세력이 음악을 악용해서 벌어진 일일 뿐일까. 서경식은 이런 해석은 다소 일면적이라고 말한다. 나치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이용했다는 건 맞지만 이 음악이 준 고양감이나 비장감은 오히려 유대인 대학살을 고무하고 촉진하는 작용도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즉, 음악의 악용을 넘어서 음악 자체가 지닌 폭력성을 응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의, 듣는 이를 열중하게 만드는 영웅적인 음향 그 자체에 불길한 것이 감춰져 있다. 베토벤만 그런 게 아니다. 예컨대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한없이 숭고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경험하는 방법은 그 장대한 ‘무한선율’의 ‘물결’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취는 위험하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음악은 도취와 각성 사이에 매달려 있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_‘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본문 295~96면) 중에서
서곡(序曲)
성미가 급해선지, 내게는 연주가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연주회장에 나가 기다리는 버릇이 있다. 객석을 채운 사람들이 아직 드문 이른 시각부터 자리를 차고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프로그램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일찍부터 앉아 있어봤자 나중에 온 관객이 지나갈 땐 일어서서 틈을 내줘야 한다. 유럽 관객들은 태연히 연주 시작 직전에야 와서는 주눅도 들지 않고 먼저 온 사람을 일어나게 만든다. 나는 몇 번이나 앉고 서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도 굳이 일찌감치 미리 가는 걸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연주 시작 전의 무대를 바라보는 게 좋아서다. 극장 조명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팀파니나 하프는 언제 봐도 아름답다. 이윽고 거기에 바이올린이나 호른을 안고 정장한 남녀들이 줄지어 나타나 제각기 떠들썩하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준비를 마친 콘서트마스터가 등장하면 모두 일어서서 맞이한다.
오보에가 천천히 기준음인 A음을 연주하면 모두가 거기에 맞춰 튜닝을 한다. 이때 그날 밤 연주가 어떠할지 예측할 수 있다. 좋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날은 튜닝만 들어봐도 가슴이 뛴다.
만장의 박수갈채 속에 지휘자가 등장해 지휘대에서 객석을 향해 가볍게 절을 한다. 수런거리던 객석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치켜든다. 자, 시작이로군. 기대와 긴장에 찬 순간이다. 이 순간에 이르는 상투적인 드라마의 자초지종을 맛보고 싶어 나는 언제나 연주 시작 무려 30분 전부터 객석에 앉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책은 2010년 4월 27일부터 2011년 8월 30일까지 33회분을 매주 1차례씩 66차례(1회분을 둘로 나눔)에 걸쳐 문화웹진 나비에 연재한 에세이를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예전에 나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을 썼을 때의 나는 30대의 절망한 청년이었다. 지금도 비관적인 건 변함이 없지만 나이는 어느새 60이 돼버렸다. 순례자가 늙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늙은 순례자의 잡담에도 어쩌면 또 다른 맛이 있을지 모르겠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같은 예술이라 해도 미술과 음악은 다르다. 내게 음악은 어딘가 미술보다 더 버거운 데가 있는 상대다. 음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본문 중에 써놓았으니 읽어주시기 바란다.
이런 위험한 짓을 하도록 나를 몰아간 것은 전에 창비사에서 일하던 안병률씨다. 그가 뭔가 새롭게 책을 써보라고 하기에 나는 그 예의 좋지 못한 버릇 때문에 그만 “음악순례 같은 건 어떨까요?” 하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정신을 집중해서 책 한 권을 쓸 만한 여유가 없어서, 정기적으로 마감에 쫓기지 않으면 도무지 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문화웹진 나비에 연재하는 부담까지 왕창 떠안게 됐다.
그렇게 준비를 갖춰 놓고 그는 정작 회사를 떠나버렸다. 그 일을 예전에 나와 여성 소설가 타와다 요오꼬(多和田葉子)의 대담집 <경계에서 춤추다>를 편집해준 박영신씨가 물려받아 이렇게 멋진 책으로 만들었다.
번역은 한승동씨에게 부탁했다. 2005년 한겨레에 칼럼 연재를 시작한 이래 줄곧 내 글을 번역해주고 있는 소중한 파트너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가곡을 독창할 때의 반주 피아니스트와 같은 존재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때로 가수 본인보다 더 중요한 존재다. 그와는 이미 일생의 6년간 공동작업을 해왔다. 이젠 순례 여행길을 함께 가는 귀중한 동행자라고 해도 좋다.
이런 편집자, 번역자와의 앙상블이 있었기에 나라는 연주자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음악을 음악답게 만드는 것은 청중이고, 책을 책답게 만드는 것은 독자다. 이 책이 박수를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요란한 부잉을 받게 될까? 어느 쪽이든 즐거운 일이다. 긴장의 한순간이다.
자, 지휘자가 지휘봉을 힘차게 내리긋는다.
2011년 11월
서경식
유럽서 만난 음악과의 사랑
_ 경향신문 문학수 선임기자 2011-11-19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저자 서경식이 20년 만에 ‘연작풍’의 제목으로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이번에는 미술이 아니라 음악이다. 전작에서는 미술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천착했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보다 개인적인 취향과 신변잡기적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예컨대 가난한 재일조선인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에게 서양음악은 동경과 열등감이 뒤얽힌 복잡한 감정으로 다가왔던 예술이었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이라는 표지고 교양 있는 가정의 표지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이라는 표지고 재일조선인인 내게 클래식 음악이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스러운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유복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이 언술은 다른 맥락으로 읽히기도 한다. ‘어린 서경식’은 얼마나 ‘그것’을 갖고 싶었을까? 이를테면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힘든 저자의 문화적 엘리트 취향, 유럽 곳곳의 미술관을 순례하고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직접 찾아가는 저자의 ‘예술 순례자’ 기질이 사실은 아주 어린 시절에 싹텄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201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느꼈던 감회와 그곳에서 들었던 연주에 책의 상당 분량을 할애한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와 첼리스트 미클로스 페레니가 연주한 브람스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성실과 성숙을 감지할 수 있었던 아주 좋은 연주”로 평하고,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대타로 무대에 오른 아르카디 볼로도스의 연주를 처음 접하고는 감탄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음색의 명석함이라니! 섬세하도다!” 페스티벌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필하모닉의 연주회, 바그너와 슈트라우스를 연주한 그 연주회에 대해서는 “올 여름 최고의 연주회”라는 극찬도 꺼내놓는다. 물론 연주회 자체에 대한 평가는 이 책에서 부수적이다. 그보다는 아내와 동행한 저자의 개인적 여정, 유럽의 근현대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함, ‘지금-여기’에서 느끼는 소회가 더 빈번히 등장한다. 그것이 이 현란한 ‘순례기’에서 독자가 ‘재미’를 느낄 만한 부분이다.
또 하나의 전작인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경계인의 삶을 비탄의 눈길로 더듬었던 저자는 말러와 윤이상, 슈베르트에 특별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말러는 “나는 삼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고 술회했고, 윤이상은 남북 분단이 낳은 디아스포라였다. 슈베르트 또한 고독과 방랑의 짧은 생을 살았다. 저자의 눈길이 유독 어떠한 음악가들에게 쏠리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책은 서양음악 자체보다 ‘나’와 ‘순례’에 방점을 찍으면서 사적인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인문학자 이현우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순례라기보다는 연애”라는 비유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