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0선](6) 이태준 ‘달밤’(전문)

라라와복래 2011. 12. 19. 04:16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0선](6)

이태준 '달밤'

작가 황석영이 뽑은 한국의 명단편 100선은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mhdn 와 경향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기획물입니다. 명단편 선정은 황석영 작가와 문학평론가 신수정 교수(명지대 문예창작과_문학동네 편집위원)가 함께 했습니다. 황석영 작가는 단편을 읽음으로써 역사서나 경제·사회학 전문서적보다 훨씬 우리의 삶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친년과 바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부분


전쟁과 남북의 분단은 우리 문학사를 두 동강이로 잘라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의 인생과 문학을 ‘실종’시켰다. 남북 양측의 독재체제에서 내쫓겼던 그들의 문학과 삶은 다행이도 남한의 민주화 과정이 진전되면서 복원할 수 있었고, 이는 북측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서 분단의 극복이란 ‘좌빨 타령’이나 ‘북에 가서 살라’는 폭언과 편향된 생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의 올바른 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태준에 대하여 쓰면서 서두에 백석의 ‘마지막 시’를 인용한 것은, 이 시가 어쩌면 월북한 이태준의 말년을 빛바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방되던 무렵 신의주에 홀로 살던 백석의 흔적이 나중에 알려진 이 시로 남아 있다. 시 쓰기를 집어치우고 생계를 위하여 측량기사가 되었던 백석의 이 시에는, 시를 쓰지 않는 기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나 있다. 이후 월북이 아니라 재북하고 있던 초기에 그가 행사시나 선동시 몇 편을 남겼다고 하여, 백석이 시인으로 되돌아갔다고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간절한 시인의 노래였던 셈이다. 해방 이후 소설가 이태준의 급진적인 변화와 월북한 뒤의 처절한 몰락은 ‘인생파’로서의 그의 소설보다 더욱 소설적인 것이었다.


이태준은 1904년 철원에서 태어나 개화당이던 부친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부모가 차례로 사망하자 고아가 되어 친척 집을 전전하며 성장한다. 철원에서 소학교를 나오고 원산에서 객줏집 사환도 하다가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상급반에 정지용 김영랑 박종화 등이 있었으며 가람 이병기가 스승이었다. 동맹휴교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일본에서 신문·우유 배달을 하며 상지대학을 다녔고 나도향과 교유했는데, 이때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며 등단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개벽>지의 기자로 취직했으며 1930년 그의 나이 27세 때에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한다.


그는 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하면서 이상의 시 ‘오감도’를 신문에 발표하여 등단시켰다. 박태원 김기림 정지용 이상 등과 9인회를 구성했는데 이는 프로문학의 퇴조에 따른 것이었다. 카프의 검거 해산 뒤에 이들의 모임은 자연스레 순문학 또는 모더니즘 계열로 문단의 주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태준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원들이 일제 말기로 가면서 거의 절필한 것으로 미루어 문학의 독자적 자율성이나 예술주의가 현실에 대응할 만한 방법론으로는 무력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태준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좀 덜했을지는 몰라도 일제에 협력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황군위문작가단과 조선문인보국회에 이름을 올렸으며 몇 편의 친일적인 글줄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고향인 철원 안협에 돌아가 은거했다.


이태준이 해방이 되자마자 ‘관념적인 사회주의자’로 급진화했던 것은 아마도 무기력했던 일제말의 자신에 대한 반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6년 3월에 발표한 중편소설 <해방 전후>는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의 자전적이고 사소설적인 계열의 작품으로 친일에 대한 자아비판과 치열한 사상적 전환에 대한 심경이 그려져 있다.


프로문학과 모더니즘문학 운동은 출발점이 달랐지만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 프로젝트였으며, 결국 모더니즘 계열의 많은 문인들이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월북하게 된다. 이태준은 근대주의자이면서도 왜곡되고 타락한 식민지근대를 비판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면서 처사(處士)로서 보신을 했던 것인데, 이후 근대의 주요한 동력인 사회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기도 했다. 다만 그 전환이 ‘인민’과의 생활적 실천 속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해방의 감격과 반성 속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어서 ‘관념적’인 한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태준은 해방공간에서 조선문학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이 되었고 예술동맹과 합쳐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위원장 홍명희, 부위원장 이기영 한설야 등과 함께 공동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7월에 이태준은 정리할 것이 있어 삼팔선 이북이었던 고향 안협에 다녀온다며 잠적했다가 모스크바 통신에 의하여 북조선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했고 연이어 평양에 체류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그해 말에 이태준이 평양에서 보낸 소련 방문 메시지가 남한 신문에 실린다.


내가 1989년 방북했을 때 이기영 박태원 홍명희 등의 가족과 면담한 적이 있다고 썼는데, 그 외에도 월북문인들의 후일담에 대해서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은 남측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궁금증이었다. 나는 초대소에 묵었으며 지도원이 교대로 배치되었고 평양작가실에서 나온 최승칠 소설가가 동반자 겸 중간 조정자로 나와 있었다. 최승칠은 나보다 열 살쯤 연상이었고 함흥 사람으로 김일성대학을 나와 노동신문 기자를 거쳐 소설가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남에서 수감되어 있던 무렵에 간경화로 작고했는데, 이전에 민속학자 임석재 교수의 딸들이 ‘국대안반대사건’ 이후 월북했고 그 둘째딸과 결혼했다.) 내가 단언하건대 사상과 원칙의 유무를 불문하고 문인은 동업자에게 동정적이다. 처음에는 서로 조심하였지만 기간이 오래되면서 친해지고 속내를 털어놓게 되어서 나는 제법 많은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인 이용악이 평안도 수로공사에 대한 행사시를 쓰고 별반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과 그의 아들이 화가로서 인민예술가가 되었다는 것, 백석이 아동물을 몇 편 쓴 일, 소설가 한설야가 집안에 외제 카펫을 깔고 보드카를 마시며 소련 사람들과 주말마다 파티를 했다는 둥 하는 소문이 숙청 이후에 알려졌다거나, 무용가 최승희가 남편 안막이 처형되고 벽지로 유배된 몇 해 뒤에 김일성이 보내준 쌀가마를 붙들고 통곡했다거나, 연안파 김두봉이 농장원으로 하방된 지 일년 만에 고된 노역을 못 견디고 작고하거나, 그가 박산운 시인에게서 들었다는데 정지용 시인이 경기도 북쪽 지역에서 미군기에 폭사했다는 이야기, 이태준의 말년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이태준이 1964년에 가까스로 복권되어 당 중앙 문화부 창작실에 배치된 이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몇 년 뒤 다시 지방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최승칠 소설가의 설명에 의하면 ‘소설가나 시인이 국가로부터 집과 급료를 받는데 몇 해 동안 작품을 내지 못하면 당에서 주의를 주고, 그래도 생산을 하지 못하면 전업 배치를 하게 된다’고 했다.


최승칠 소설가로부터 얼핏 들었던 정지용 시인의 최후에 대해서는 훨씬 뒤인 2001년 8.15 평양축전에 도종환 시인 등 우리 문인들과 참석했다가 북한 계간지 <통일문학> 주간인 조정호 평론가에게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북한 소설가 석인해(1990년 작고)는 1950년 9월 21일 아침 남쪽에서 문화공작대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동두천에서 정지용을 만났다. 김수영 시인이 같은 시기 의정부 북방에서 겪은 경험담이 그의 미완의 기록 ‘의용군’에 나온다. 청장년 문인, 연극인 등이 대열을 이루어 북행하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의 공습과 기총소사를 받았다고 한다. 석인해와 정지용은 함께 동두천 북방의 산을 넘었는데 석씨가 산 이름이 “소요산”이라고 말하자 정지용은 “이름이 풍류적”이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갑자기 미군 전투기가 날아와 로켓포와 기총소사를 했다. 김수영도 그의 산문에서 그라망 전투기들이 계속해서 북행하는 대열을 따라다니며 수시로 하강 공격했다고 썼다. 전투기가 사라진 뒤에 석인해 소설가가 정지용을 찾아 둘러보니 가슴에 기관총탄을 맞고 숨져 있었다. 일행들과 함께 길옆에 대충 묻고 제대로 표시도 못하고 떠났다고 한다.

 

자료와 더불어 추측을 해본다면 이태준의 일차적 위기는 남로당 숙청의 신호탄이었던 1952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5차 회의 때였다. 보고자였던 김일성은 당내 종파주의의 위협을 직설적으로 공격하고 있는데, 첫 목표는 정치적으로 약한 고리인 문인들에게 겨누어졌으며 조선문학가동맹은 분파주의적 행동이 특히 심각한 단체로 지목된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임화 이태준 김남천 이원조(이육사의 아우) 등이 거명되었다. 당시 월북한 남한 출신 작가들이 모이면 술자리에서 예술 창작에 대한 당의 교조적인 지도와 간섭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국내파인 남로당에 대하여 주도권을 쥔 빨치산파인 북로당의 견제에 대한 불평도 있었다고 한다.


위의 5차 회의에서 당 선전부장 박창옥이 등단하여 먼저 남로당 출신 남한 작가들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고는, 돌연 박헌영과 이승엽을 거론하며 종파주의자라고 질타했다. 이듬해인 1953년 내내 북의 노동신문과 조선중앙방송 등 모든 매체는 남로당의 종파주의와 자유주의적 경향에 대한 뉴스를 쏟아낸다.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은 간첩죄와 반역죄로 철저하게 조사받고 검거되었으며, 수많은 남한 출신 사회주의 운동가와 지식인들이 벽지의 농장과 탄광으로 쫓겨 갔다. 이태준은 이때 아직은 세력이 남아 있던 소련파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준에게 두 번째의 위기가 왔던 것은 1956년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 때에 연안파와 소련파가 합작하여 조선노동당 전원대회를 열어 수상을 실각시키기로 했던 때였다. 이들 반대파는 중국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의외로 전원대회에서 소수파로 몰려 투표에 실패하자 각자 중국과 소련으로 망명했는데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었다. 이태준은 함흥의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내려갔다가 곧 이어 함흥 콘크리트블록 공장의 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이른바 부르주아지의 잔재를 혁명화한다는 교육 과정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중국, 소련과 각각 ‘우호 협조 및 원조에 관한 조약’을 맺는 한편 ‘혁명적 문학예술 창작’에 대한 지침이 내려지면서 남한 출신 문인 작가들의 복귀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1964년 이태준도 중앙당 문화부 창작1실 전속작가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우여곡절을 거치고도 끝내 당의 요구에 걸맞은 창작을 해내지 못하였던지 다시 지방으로 소환된 것 같다.


이태준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남파공작원’으로 남한에서 체포되어 장기수로 살아남은 김진계의 ‘조국’이라는 구술 자료에 나온다. 그는 이남에 내려와 생존할 수 있는 현장훈련을 위하여 땜장이가 되어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마천령산맥 기슭에 있는 강원도 장동탄광 지역에서 열흘간 머물렀다. 마을 사람들이 뚫어진 냄비나 솥단지 등속을 들고 나오면 김진계가 능숙한 솜씨로 땜질을 해주었는데 어느 노인이 구멍 난 솥을 들고 나타났다. 노인은 키가 훤칠하고 나이에 비해서 건장한 체구였다. 젊었을 때에는 꽤 미남이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남한 말씨를 써서 궁금증이 더했다. 김진계는 노인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땜질하면서 그는 노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혹시 글 쓰시는 분이 아니냐고 그가 묻자 무슨 충격이나 받은 것처럼 노인은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이더니 빙긋이 웃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이태준이라고 합니다.”


김진계는 그를 사진에서 보았을 뿐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평북 안주군에서 선전실장을 할 때 도서실을 정리하면서 이태준의 창작집 <달밤>이나 <가마귀>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문장강화>라는 책이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이태준의 글을 읽은 느낌은 우리말을 요리조리 자유롭게 쓰면서 아름답게 표현해서 상당히 민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시민적이고 뭔가 약하다는 느낌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4년 어느 날 그의 책들이 도서실에서 사라졌다. 작업을 하면서 김진계는 궁금한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아직도 글 쓰십니까?”

“쓰고는 싶소만….”


노인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이태준의 나이 66세이던 1969년의 일이다. 장동탄광 노동자지구에서 두 부부가 이름도 잊고 살고 있었다. 뒤에 또 어느 탈북 여성작가는 이태준이 숙청된 뒤에 그의 아들딸들이 각처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증언했다.


이태준은 1930년대 후반에서 해방과 전쟁에 이르는 가혹한 억압의 시기에 중단편 60여 편과 장편소설 13편을 썼다. 그의 작품은 현진건의 뒤를 이어 세련된 묘사와 인물 창조로 한국 단편소설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다고 당대 비평가와 문인들로부터 평가받았다. 그의 작품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자전적인 사소설 종류, 식민지의 주변부를 살아가는 하층 유랑민들의 생활을 프로문학의 투쟁과는 달리 씁쓸한 페이소스로 다룬 것들, 그리고 해방 후 사상적 전환 이후의 이념적인 소설과 보고문, 성명 등이 있다. 물론 여기서는 식민지 시대의 작품을 다루는 장이어서 해방 이후는 당연히 제외된다.


나는 자전적인 요소와 주변부 민중을 함께 다룬 듯한 ‘달밤’과 식민지 근대의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좌절해가는 구한말 세대 노인들의 이야기인 ‘복덕방’, 그리고 농촌을 떠나 서울의 행랑살이를 하면서 도시의 품팔이 노동자가 된 사내의 불운을 그린 ‘밤길’의 세 편을 놓고 망설였는데 특히 마음에 들거나 또는 아주 마땅치 않거나 하는 작품이 없었다. 나아가서 ‘패강랭’ ‘가마귀’ ‘장마’ ‘영월영감’ ‘돌다리’ ‘농토’, 거의 모두 밋밋했다고나 할까. 나는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대학생 적에 헌책방에서 구하여 한번 죽 읽어본 일은 있으되 별로 깊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문예반 취향으로나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번 글을 쓰기가 가장 힘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극적인 생애 후반부가 복잡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밤’과 ‘밤길’의 제목도 서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두 작품을 놓고 며칠 동안이나 저울질하다가 ‘밤길’이 매끈하게 군더더기 없이 잘 빠지기는 하였으나 어딘가 시궁창을 수채화로 ‘쌈박하게’ 그려낸 것처럼 작자의 관조가 믿기질 않아서 내려놓기로 한다. 역시 ‘달밤’을 남겨놓고 보니 그 어느 땜장이의 말처럼 소시민적이고 뭔가 약한 느낌이 전해지는 이 작품은 어울리지 않게 힘이 들어간 것보다는 문인화의 붓자국처럼 유연하지만 기개도 있어 보인다.


‘달밤’에서 성북동으로 이사 간 ‘나’는 바보 신문배달부 황수건을 만나고 그곳이 시골이라고 느낀다. 이태준 당대에조차 도시에서는 사라진 바보와 대화하면서 화자는 순수한 인간의 정을 느낀다. 우리 어릴 적에 어느 동네에나 있었던 ‘미친년’이나 ‘바보’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것들은 추억과 그리움같이 근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것일까?


나는 전집에 실린, 1943년 무렵 이태준이 성북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차녀 소남, 장녀 소명, 부인 이순옥, 차남 유진, 이태준, 안고 있는 막내딸 소현, 장남 유백이라고 사진설명이 되어있는데 온 식구가 어린 막내만 빼고는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다음은 이태준의 단편소설 ‘달밤’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