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진규의 신작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을 북 리뷰해서 엮어 싣습니다. 9월 16일 발행되어 저도 아직 못 읽었으며, 출판사 <문학동네>의 책 소개 글과 여러 신문에 난 서평이 재미있어 쫌 손질해 선보입니다. 앞으로도 신간 서적인 경우, 여기저기 리뷰 글을 모아 엮어 소개할까 합니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 김진규
애면글면 안달복달, 조선조 공처가 공생원의 숨은 진실 찾기!
오랫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근심하던 부부 사이에 뒤늦게 아이가 생겼다면 응당 기뻐해야 할 노릇이련만 나이 마흔다섯의 공생원은 마나님의 임신 소식에 한숨만 늘어놓을 따름이다. 대체 무슨 사연으로?
때는 조선 성종시대. 연거푸 과거에 실패해 백수 신세였던 생원 공평은 큰아버지에게 빌붙어 살던 처지에 재력 있는 처가에 장가를 가 신세를 편다. 자신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몸무게도 너덧 근은 더 나가 보이는 마나님을 모시며, 나라님도 하는 ‘공처’(恐妻)이니 자신이 하는 공처도 나름의 ‘충’(忠)이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살아간다. 성격 드센 마나님만 보면 깜짝깜짝 기가 죽는 공생원이지만 할 줄 아는 최고의 욕이 ‘이 자식’일 만큼 성격 유순한 공생원과 마나님은 알고 보면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기도 하다.
문학동네 l 248쪽 l 2009-9-16 초판발행
그런 둘 사이에 자식이 안 들어서는 것이 문제였는데,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의원 서지남으로부터 공생원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그만 포기하고 마나님에게 잘하라는 면박을 받는다. 그러니 공생원에게 마나님의 임신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일 수밖에. 마나님이 임신을 했다니! 그렇다면 지금 마나님의 뱃속에 들어앉은 아이는 대체 누구의 자식이란 말인가? 서지남이 비록 의료사고를 내고 야반도주한 돌팔이 의사이기는 하나 공생원은 꺼림칙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공생원은 마나님의 주변 인물을 하나하나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동네 건달이자 난봉꾼인 악소배…백달치 | 소꿉친구인 저포전의…황용갑
배꼽 성형을 해준 의원…채씨 | 마을 두부장수…강자수
소설은 상당 부분을 용의자들의 사연과 내력을 추적하는 데 할애한다. 따라서 소설은 ‘불륜’보다는 조선시대 서민들의 핍진한 생활상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소심한 공생원이 티는 못 내고 이웃과 마나님의 주변 인물의 뒤를 캐는 과정을 통해 조선시대 서민들의 인물상과 생활상을 솜씨 좋게 풀어낸다. 배꼽이 깊어야 아들이 들어선다는 말에 혹한 마나님에게 배꼽 성형을 해준 의원 채씨, 두부 쑤는 솜씨가 일품인 두부장수 강자수, 장사 솜씨가 일품인 마나님의 소꿉친구 저포전의 황용갑, 동네 건달이자 난봉꾼인 악소배, 백달치 등 인물의 사연을 통해 조선시대 서민들의 사람살이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전작에서 “박물지를 보는 것 같다”는 평을 받을 만큼 당대의 사물과 풍습을 공들여 그려낸 김씨의 필력은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능청스레 농을 걸며 조선시대 이야기꾼과 같이 해학을 섞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입담이 걸쭉하다.
소설은 결말부에 두 가지 반전을 심어 놨다. 공생원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해 그를 불안과 의심으로 몰아갔던 원흉인 의원 서지원이 다시 마을에 모습을 드러내고 드디어 출산을 하게 된 마나님은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 공생원에게 충격고백을 한다. 독자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어서 ‘귀여운’ 수준의 반전이지만, “누구의 자식도 아닌 내 자식”이라는 마나님의 일갈은 울림이 있다.
●소설 한 대목
이번엔 인위적으로 배꼽의 모양까지 다듬다니! 공생원은 당혹스러움에 입을 다물 수조차 없었다. 공생원이 보기에 마나님의 배꼽은 그리 얕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살구씨가 들어갈 만큼 크고 깊어야 아들을 많이 낳는다며 여러 날 끌탕을 하더니만, 결국 불뜸질로 배꼽을 속으로 더 밀어넣고 온 것이었다. (……) 공생원은 마나님이 배꼽을 바꾸고 온 그날의 정황이 궁금했다. 아무리 의원이라 해도 아녀자가 외간남정네 앞에서 배꼽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하여 속내를 캐기 위해 은근슬쩍 말에 요령을 부렸다.
“자네! 배꼽은 무사한 게요?”
“아물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손독은 안 올랐소? 채의가 이래저래 주물렀을 것인데……”
“……”
“왜 아무 말이 없는 게요?”
“주물렀다는 말이…… 좀 그렇습니다.”
그 말을 하는 마나님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그레해졌다. 볼의 얽은 자리가 도드라져 보였다.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
공생원의 이마에 맺힌 땀이 망건 틈을 비집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헉, 헉, 나리, 켁, 마님이, 헉, 애가, 헉, 헉, 아까, 커억, 찾아가지구, 산파를, 아이구……”
단어들이 아무렇게나 잘라져나와 사방으로 튀어갔다. 그것들을 주워 간신히 이어붙이고 나니 문장은 이렇게 재구성되었다.
“나리! 아까부터 찾았는데 왜 이제 오십니까? 애가 나올 모양입니다. 지금 우리 마님이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저는 산파를 데리러 가는 중입니다.”
공생원은 대경실색했다. (……) 다가앉은 공생원을 향해 마나님의 입이 연신 옴짝거렸다.
“뭐라는 게요? 무슨 말이요? 안 들리오.”
공생원이 허리를 구부려 마나님의 입에 귀를 댔다. 달짝지근한 숨내. 그 와중에도 피가 아랫도리로 쏠려들자 공생원은 민망했다. 그것이 미안하여 괜한 헛기침이라도 하려는 순간, 마나님의 쇠진 목소리가 느릿하게 감겨왔다.
“당신 자식이 아닙니다.”
공생원의 엉덩이가 순간 중력을 거슬렀다.
‘무어라? 옳거니! 그럴 줄 알았다.’
공생원의 눈빛이 벌겋게 곤두섰다.
“누군가? 그게 누군가?”
한데 손가락 까딱할 기운도 없어 뵈던 마나님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더니, 공생원 턱 밑으로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작가 소개
소설가 김진규(40)는 1969년 겨울, 그저 그런 시골에서 태어나 2007년 겨울, 소설가가 되었다. 전업주부로 생전 처음 써본 소설 <달을 먹다>(문학동네소설상)와 산문집 <모든 문장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