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젊은 날의 곁 • 황동규

라라와복래 2009. 6. 13. 20:49

 

젊은 날의 곁



그날, 회현동 집

그날 회현동 집, 하루 종일 눈

내리다 말다 했다.

전나무 속에 숨어 있는 전나무 하나

그리워하다 말다 했다.

“위험하게 살아라!”

니체가 말했다.

난로 위에서 주전자 물이 노래하며 끓었다.

노래로 사는 게 가장 위험하게 사는 것,

노래 끊기면

잦아들 뿐.


마지막으로 숨 한번 푹 내쉬고

물이 잦았다.

노래는?

난로 위에서 주전자가 환한 돛처럼 타올랐다.



끝이 안 만져지는 희망

간밤 눈에 소나무 큰 가지 부러져

창유리 반쯤까지 내려와

창을 열고 만져보니 솔잎

끝이 싱싱했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종지부가 너무 길었고

마지막 어디선가 플루튼지 피콜론지

사람 마음을 콕콕 찔렀다.

잡아당기니 이파리 아닌

큰 가지 전부가 떨어졌다.

제5번보다 간명히.


허튼 희망을 안 갖고 산다는 게

얼마나 비감(悲感)했던지.



이중섭의 소

‘즐거운 편지를’를 쓸 때

이중섭이 세상을 뜨고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맨몸 게 하나가 맨몸 아이의 맨불알을

물고 늘어지다가 놓았다.

서귀포에서 일어난 철회색 바람이

서울 남산 언저리에서 불다 스러지고

그의 소들만 살아서 흩어졌다.

웃는지 우는지 이빨을 옆으로 드러낸 그의 소는

외산(外産) 화집 속에서 발로 땅을 박차던

피카소의 소들보다 얼마나 슬프던지.


그 무렵 신세계백화점 근처를 지나다 보면

저기 또 여기 거닐던

이중섭의 소들!



손님 드문 음악실에서

밤 이슥해 손님 드문 인사동 ‘르네상스’에서 차를 마시며

바르톡의 현악 사중주 4번 4악장을 듣고 있던 예수와 니체.

예수가 말했다.

“활로 그으라고 만든 걸

저렇게 모질게도 뜯어도 되나?“

잔을 놓으며 니체가 말했다.

“인간의 형이상학이 인간의 손에 분해되는군요.”


옆 좌석에서 인간 하나가 중얼대듯 말했다.

“굿든 뜯든 도저(到底)한 소리만 얻으면 되지요.”

‘모진’ 악장이 끝나자 예수가 나직이 말했다.

“큰 바위가 분해되면 비 몇 번 와도 사막이 아니겠는가,”

니체가 혼자 말하듯.

“인간이 건널 수 있는 사막이라면.”

옆 좌석에서 인간이 몸부림쳤다.



김정강의 죽음

오랜만에 화가 김정강이 찾아와

난로 뚜껑에 오징어를 구우며 소주잔을 들었다.

“우리의 건강을 해치기 위하여!”

35도 소주가 내려가는 반쯤 긴장한 식도가 별안간 환해져

겁먹은 어두운 장기(臟器0들을 차례로 비추었다.

소주가 더 아래로 내려가자

어두운 장기들이 환해지고

대신 식도가 어두워졌다.

다시 식도를 환하게 만든다.

수시로 명도(明度) 서로 바꾸는 식도와 장기들을

어떻게 편가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밝음 어둠을 각기 딴 숨결,

어떻게 천상(天上) 지하(地下) 무명처(無名處)를

따로따로 그린 지도로?


난로 위에서 오징어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몇 달 후 그는 죽었다.



병나발은 독주 악기이니

4ㆍ19 날, 콩콩 심장과 책가방을 양 겨드랑에 끼고

경무대 앞에 가서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다

옆 여학생 흰 옷 홀연 붉게 물들자

효자동 가정집을 월장

유유히 대문 열고 골목길로 나오다.

아 일지매(一枝梅)!


한 달 뒤, 스피커 매단 리어카 앞세우고

마이크 들고 종로 거리를 누비며

정작 필요하지 않은 것 가지지도 쓰지도 말자는 비밀

누설하고 다니다.

아 소로(Thoreau)!


소로, 소로, 그대의 휴대용 아나키즘을 뭉개고

어느 날 새벽

군인들이 포를 끌고 시내에 들어왔다.

친구들이 허름한 간판들 뒤로 숨고

나는 입대했다.


1961년 여름 저녁

용산역. 천산남로(天山南路) 낙타와 말들이 술렁대며 떠나던 곳,

객차 나무 의자에 궁둥이 붙이고 앉아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젊은이들 사이에 숨어

목청 산 테너처럼 신문지로 싼 진로병나발 불며

기적을 기다렸다.

켜져도 어두운 불 방금 매달리기 시작한 서울이

흐르기 시작하고

언제부턴가 기차가 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창밖으로 소주병을 힘없이 던졌다.

또 하나, 이번엔 더 힘없이.


믿거나 말거나 하늘의 별들이 몽땅 우박처럼 땅에 쏟아졌다.

머릿속이 온통 금갔다가 엉겨 붙고

별이 새로 돋기 시작했다.

별들의 부활?

보충대 야간 트럭 짐칸에 실려

별빛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 별이 있지, 노래로

노래로 살아야지.

황금빛 어둠.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200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