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20) 서당 훈장에게 한자를 익히고, 마을 머슴한테서 한글을 배웠지

라라와복래 2012. 2. 4. 12:05

[고은과의 대화](20) 양 세기의 달빛

서당 훈장에게 한자를 익히고, 마을 머슴한테서 한글을 배웠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지난번에 서당 풍경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운 시절에 문자를 습득하던 모습이 아련한 장면이었습니다.


고은 세 마을 서당 훈장들은 거의 다 오랜 사대주의로 체질화된 노인장이었어. 중국은 늘 대국이고 조선은 소국으로 말했지. 공자라면 임금이라도 현신한 것처럼 상투머리를 주억거리면서 눈을 빛냈어.


김형수 백발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훈장님은 어땠습니까?


고은 그 잿정지 훈장은 강(姜) 훈장이라거나 강 영감으로 부르는 진주 강씨였지. 그런데 그 자신은 강태공으로 불러주기를 은근히 바랐지. 마침 강씨는 고대 은·주 시대의 강족(羌族)의 그 강씨를 강(姜)으로도 표기하는 그 핏줄이 한반도에까지 건너온 것인지도 몰라. 19세기 후반에야 갑골문 고증으로 밝혀진 바로는 서쪽 주(周)가 은(殷)나라의 오랜 통치에 맞서 싸울 때 강족과 연합해서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가 강을 중국 해안지방의 제(齊) 쪽으로 강제 이주시킨 이래 그 강족은 한반도와는 바다 건너 이웃이 된 것이니까. 그런데 그 강족의 우두머리 강상이 주나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무왕의 제후 노릇이나 하는 신세가 되었어. 그냥 충성한 게 아니라 복속당한 것이니까. 이 사실을 은·주와 한(漢)나라를 중국의 정통성으로 삼은 사마천의 <사기> 서술이 왜곡을 일삼은 것이지.

 

김형수 사마천은 역사의 진실을 상상하는 코드로 사용되던 이름인데요.


고은 후대는 사마천의 처참한 명예 극형인 궁형(宮刑) 형벌과 가족의 수난을 내세운 나머지 역사의 아버지로서 그의 엄정한 사관을 극찬하고 있지만 그의 한계는 중화주의 사관 밖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이지. 더구나 몇 항목의 사실 날조에 가까운 왜곡은 역사 서술의 범죄임에 틀림없어. 곤궁한 시절에 낚시질을 하며 문왕에게 접근해서 만년의 강상이 그를 보필했다는 식으로 썼지. 패자의 비애를 충신의 행운으로 말이야. 이상한 노릇은 그와 야릇하게 견주어지는 역사가 반고(班固)도 옥사했다는 점이네.


김형수 구전가요가 일제의 군가였던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아찔해집니다. 해방군의 무기가 점령군에게서 나오는 법이긴 하지만요.


고은 그런데 강씨 우두머리 강상이 동쪽의 새 봉토 여(呂)에 와서 여상으로 성명도 바뀌게 되고, 그를 강태공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태공은 문왕의 존칭이고 그 문왕이 바라던 대상이 바로 여상이므로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게 된 것이 망(望)을 떼어내고 그저 강태공, 강태공이라고 불러 왔겠지. 바로 내 서당 학동생활의 첫 훈장이 이런 엉터리 강태공이었어. 해가 설핏하면 곧장 물가로 나가 낚싯대와 함께 무심한 시간을 보내며 날이 저물었어.


김형수 그런 낭만적 허영이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감정인지, 전후세대가 명동을 ‘파리의 뒷골목’으로 여기던 것처럼 ‘비참’보다 ‘온기’가 느껴집니다.

 

고은 그런데 잿정지에는 또 한 사람의 한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무나 받지 않는 훈장이었어. 전(田)씨였는데 전 학자라고 불렀지. 그 다음 훈장은 바로 우리 동네 용둔부락의 박남순 영감인데 신새벽부터 해소기침으로 하루를 시작했어. 나는 이 까다로운 훈장한테서 <동몽선습>을 배웠지.


김형수 근대 이전의 교육이 눈앞에 삼삼해집니다. <천자문>의 기억, <동몽선습>의 기억에서 요즘 사교육의 현장도 떠오르고요.


고은 그 다음으로는 잿정지 마을을 지나서 있는 옥산면 지곡리 서당에 다녔는데 거기 가서 <논어>와 <맹자>를 익히게 되었어. 그러니까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不亦樂乎)와 군자(君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따위가 머릿속에 박혔지. 그 훈장은 늘 마고자까지 걸쳐 입고 자주 갓 쓰고 도포를 입은 양반 정장차림으로 동네를 한 바퀴 거니는 것으로 자신의 풍채를 과시했어. 그럴 때 동네의 남녀는 울타리 안에서 그 뒷모습에 대고 ‘사또 행차다. 사또 행차다’ 하고 이죽거리기도 했지. 혼자 거닐며 <시경> 소아(小雅), 대아(大雅)도 읊조렸지. 그 심기백 훈장은 만독(萬讀)으로 인근에 이름을 떨쳤어. <논어> 만독 그리고 <중용> 만독을 한 학자였어. 당시의 시골 한학은 책 한 권을 천 번 읽기나 만 번 읽기가 전설이 되었어.                                                  그림 임옥상 화백


김형수 형식뿐 아니라 내용도 그래요. 근대 학교교육은 문학도 시를 잘디잘게 썰어서 감흥의 여지를 없애고 맙니다. 그렇다고 좋은 시 100편을 외우는 게 좋은 시 한 편을 쓰는 길이라 가르칠 수는 없지만요.


고은 요컨대 학문이란 우선 다독(多讀)을 원칙으로 삼고 그것을 머릿속에 암기하는 것으로 그 수준이 평가되었어. <천자문> 떼기도 등 뒤의 책을 통째로 외우는 배송(背誦)이 있으니까. 또한 중국의 고사(故事)를 얼마나 잘 인용하느냐, 성현의 언행을 얼마나 숙지하느냐로 본국 주자(朱子)를 그대로 섬기는 해동주자 송시열의 학풍이 드러나는 경향 각지의 말단까지 그랬어.


김형수 불멸의 고전과 중국 고사, 또 성현의 말씀을 완전무결한 것으로 받들던 한자 시대가 백 년도 채 되지 않았네요.


고은 한자의 위력은 한문 식자층뿐 아니라 무식층에서도 무조건적이었지. 문자란 절대계급이었지. 그래서 한자를 아는 사람은 그 인기척조차 어흠어흠 하고 근엄했어. 문자 없는 무지렁이는 우선 그 문자에 고개 떨어뜨렸지. 동네의 한자 식자는 우선 제사 지내는 집 지방(紙榜) 써주는 것과 축문(祝文) 써주는 것으로 술 한 병이나 쌀 한두 되 사례도 받을 수 있었지. 또 어쩌다가 집을 짓게 될 때는 마룻대의 상량문(上樑文) 써주는 것으로 닭 한 마리를 받기도 했지.


김형수 그러고 보니 대륙을 차지한 민족은 많지만 문자는 늘 한자 헤게모니가 관철됐어요.


고은 이런 한자를 훈장들은 한문이라 부르지 않고 진서(眞書)라 했지. 진서 앞에서 우리 문자는 언문(諺文)이지. 막말로 말하면 ‘상(쌍)글’이야. 상놈들이나 쓰는 글이었어. 또 ‘똥글’이라고도 했어. 이 ‘똥’이 좀 심했던지 ‘뒷글’이라 하기도 했어. 계집들에게나 소용된다는 ‘암글’이기도 했어.


김형수 가정에서 쓰는 말이 정치, 경제, 사회적 활동과 같은 세상의 중대사에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지 모릅니다.


고은=이런 한자절대주의의 숨 막히는 환경에서 한글 창제의 세종대왕이 그 한글을 ‘훈민정음’이라고 한 것은 실로 그 용단이 존경스러워. 그 자신 어린 왕자 시절부터 철야 독서로 익힌 한자 문화의 장본인이자 국정 전반의 한자 체제 속에서 그 ‘진서’에 맞선 ‘정음(正音)’이라는 이름을 내건 것은 엄혹한 사대주의 체제에 대한 비장한 자아선언이 아닐 수 없지. ‘바른 소리(正音)’란 참글(眞書)에의 과감한 대응이었을 거야.


김형수 언어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모셔진 사원’임이 분명합니다.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문화의 토대이니까요.


고은 우리 한글보다 몇 백 년 앞선 일본 중세의 ‘가나(假名)’ 문자도 그 가나가 가짜 글자라는 의미의 이름이야.


김형수 아, 베트남 말에도 밑바닥에 한자가 있어요.


고은 한자를 진서라고 높이고 한글을 스스로 언문이라 비하하는 근세조선의 문자 봉건성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비천한 이름으로나마 주로 궁궐의 왕실 여인이나 궁녀 그리고 사회 하층의 백성과 천민 그리고 남존여비 체제의 부녀층의 음습한 명맥으로 온갖 핍박과 홀대를 받으며 이어오다가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서야 고종이 국한문 공용을 선포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실로 피눈물이 날 만하지 않은가.


김형수 김수영의 표현대로 유행에 뒤지는 ‘무수한 반동들’에게 이 땅의 ‘거대한 뿌리’가 있는 게 사실이네요.


고은 그러므로 단언하자면 오로지 민중만이 제 문자를 지켜냈고 계승해 온 것이지. 몇 백 년 동안의 사류(士類) 지식인들이야 얼마나 한글을 배척해 왔는가.


김형수 네. 지식인들이 창조성을 잃었던 폐단을 한눈에 보는 듯합니다.


고은 다행스러운 일은 허균의 한글소설이 있고 추사 김정희에게 아내한테 보내는 한글 편지가 있다는 것이지. 나는 박지원과 정약용이 조선시 선언을 했음에도 정작 한글 시를 남기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 사실 <심청전> <춘향전>도 그것이 한글을 현토(懸吐) 수준으로부터 온전히 해방시킨 것은 아니지. 또한 양반시조나 심지어는 조선후기 사설시조 역시 한적(漢籍)의 박식을 자랑삼고 있는 것이고 그런 자랑을 서술적인 부차(副次)로 삼아 한글의 교착문체를 마감하지 않고 있는 느낌이지. 이 점에서 20세기 단초의 신문학시대의 언문일치 운동이 뜻하는 바는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어.


김형수 그 언문일치를 역사적으로 읽지 않고 늘 오늘의 위치에서 미흡하다 타박했으니. 따지고 보면 ‘문화예술’이라는 말도 예술이 그 자체로 문화의 일부인 게 아니라 관습이나 전통 따위로서의 문화를 벗어나 소위 ‘장르라는 범세계적 전문영역’으로 흡수되기 때문에 생겨난 건데 말입니다. 아프리카 문학과 민중의 관계를 보면, 그곳의 작가들이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고 지구촌에 회자되는 동안에도 아프리카 민중은 제 언어를 잃어가고 있었어요.


고은 다행히 나는 서당을 다니는 동안에도 한자에만 파묻히지는 않은 셈인데, 이 사실이 내 한글의 운명에는 행운이기도 했어. 나는 한글을 아버지한테나 어머니한테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었지. 모국어라는 것이 모어(母語) 아닌가. 내가 어머니 젖을 먹으면서 어머니의 입을 따라 익혀온 것이 모국어 아닌가. 사실 모국어를 초·중·고의 국어수업을 통해서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의 문법이나 그 사용범위의 확대 따위이지 언어 자체는 이미 어머니 품 안에서 그 기본을 넘어선 상태이지. 그런데 이런 모국어의 문자언어인 한글을 핏줄로 익힌 것이 아니었어. 나는 종종 마을 머슴들의 그 또 다른 세계를 기웃거렸는데 그것은 그런 머슴 중에서 아주 잊을 수 없는 대길이라는 아저씨를 안 뒤로부터였지. 그 성씨가 무엇인지는 잊었는데 그 이름만은 지금껏 내 심장에 새겨져 있어.


김형수 마을 머슴에게 글을 배워 세상의 형상을 탁본한 <만인보>를 얻었으니 참으로 눈부신 응보(應報)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머슴 대길이’는 특히 기념비적인데, 단지 글을 아는 머슴이기보다 신체 능력이나 정신의 크기에서 ‘충분히 존엄한 기본계급적 존재’로 그려지는 게 참 인상 깊습니다. 당시 머슴들의 사회적 실존의 자취도 유령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실체로 살아나는 모습이 일품입니다. 그 머슴들의 일상은 어땠습니까?


고은 한동안은 우리 집의 소와 소달구지 그리고 동네에 두서너 대밖에 없는 쟁기를 머슴을 두고 쓴 적도 있는데 이런 머슴들이 밤이면 마을의 한 머슴방에 모여 낮의 고된 노동으로 피로하면서도 서로 진한 웃담도 늘어놓고 세상에 떠도는 풍문 따위에도 귀를 쫑긋거리게 되지. 안집 부엌에서 얻어온 동치미나 날무 또는 배추 뿌리 그리고 찬물 따위로 빈속을 달래기도 하지. 이런 분위기는 어떤 위선도 위세도 없는 적나라한 인간의 진면목을 드러냈어. 또 그런 머슴방에는 머슴들의 호흡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등짐장수라던가 뜨내기 길손들이 하루 이틀을 함께하기도 하지.


김형수 저희가 사는 곳을 남긴 사람들, 저희가 지상에 닿을 때 맞아준, 그 길가에, 강가에, 나무 곁에 무수히 많은 숨소리와 이야기와 노래를 남겨준 분들이 그립습니다. 저도 시골 장터의 주막집 풍경과 몇몇 도시, 또 유랑극단을 떠돌던 신파 예인들의 추억을 모국어의 벽에 생생하게 새기고 싶은 욕심이 강하게 끓어오릅니다.


고은 대체로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우리 사회 일반은 나그네 환대라는 미덕이 있었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나그네 박대를 엄벌에 처하는 사례가 있지만 그런 벌칙 따위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이 한국 농촌의 오랜 인심 수위였는데 우리 동네도 예외는 아니었어. 행색이 점잖은 양반 행객이면 마을 유지네 사랑채에 머물게 하여 귀빈 대우로 손님 밥상이 제법 화려하고 거기에 반주 주전자도 가득 채워져 있었지. 떠날 때는 노자도 보태주었지.


김형수 아름다워요. ‘문명의 밖에 남은 야만이 고향’이라 하시더니!


고은 이와 함께 머슴방도 길손에의 환대는 진했어. 어느 머슴은 새경 쌀을 돈으로 환산해서 그런 행상 나그네한테 꾸어주었다가 2~3년 동안 그 나그네가 오지 않아도 안달하지 않고 있었지. ‘자네 돈 떼였네, 자네 사람 믿었다가 빈털터리가 되었네’ 따위의 말을 들어도 담담히 있다가 마침내 그 나그네가 원금 가지고 나타나기도 했어. 거기에 이자 대신으로 술 한 병과 명태 몇 마리를 가져와 머슴방 잔치가 베풀어진 일이 있었어.


김형수 재수 없는 년은 봉놋방에 누워도 고자 곁에 눕는다는 통속적인 속담까지도 그런 배경의 힘으로 구원받는 것 같아요.


고은 나는 그런 머슴방의 대길이 아저씨한테 한글을 배우고 그가 읽는 언문소설 따위를 읽게 되었지. 그러다가 종조부댁의 서울 유학 숙부들의 서가에서 탄금대인(彈琴臺人)이 지은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을 읽기도 했어. 그 저자가 뒷날 농촌소설가 이무영(李無影)이라는 것을 알았지. 나는 머슴방에서 배운 한글로써 10대 이후 다른 문자 언어 강제에도 불구하고 언어습득론에서 말하는 제1언어인 한국어를 내 삶의 요체로 삼을 수 있었지. 사실인즉 언어는 민족이나 국가에의 등식(等式)의 가부에 앞서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개적(個的)인 것이고 아니 그 개적인 초기 상태는 어머니의 언어와 아들의 언어조차도 서로 달라지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이런 말의 근원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 민족어 또는 국가어라는 근대 의제(擬制)를 감수하고 있지 않은가.


김형수 그런 경험이 오늘의 ‘겨레말큰사전’에 닿는 맥락은 하나의 문화사적 사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입담들이 말을 쌓아올려 건축된 것이 겨레말인데, 남북으로 나뉘어 상호 정체성의 차이를 드러내다 보니 빈사(瀕死) 언어가 속출했어요. 외국의 학자들은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날이 올지 모른다고 걱정하는데, 우리라고 다르겠습니까? 동무니 인민이니 하는 말처럼 이념 갈등으로 숨져간 언어 또 ‘먼 바다 고기잡이 배’처럼 일방에 대한 배타적 반발로 모습을 감추는 언어가 늘어가던 터에 남북해외를 망라한 ‘겨레말큰사전’이 준비되는 게 얼마나 감격적인지 모릅니다.


고은 아직 세계 도처에 존속되고 있는 3000 내지 8000 언어는 언어만으로는 이렇듯이 몇 천 개이지만 정작 그 문자는 몇 백 개밖에 없는데 이 가운데 한글이 한국어를 표기할 수 있다는 축복은 얼마나 절절한 노릇이겠는가. 돌이켜보자면 고대 향찰이나 이두문이 근세조선 시대까지 구차하게 사용된 것으로 멈췄다면 지금 우리의 문화는 어느 지경이겠는가.


김형수 언어는 역사 보관소이니 숱한 세기들을 다 잃고 말았겠지요.


고은 한글의 출현과 그것의 수난과 재생이란 한민족의 운명을 이끌어온 역정이지. 나는 오랜 사대주의 전통문화인 한자와 내 모국어가 낳은 한글을 식민지 시대라는 타자의 언어 문자가 침범한 역경 속의 생명으로 살았어. 나를 빼앗긴 땅에서 나를 빼앗기지 않은 역설(逆說)이 그 역경의 자화상인 사실!


김형수 어느 시대에나 누군가 앞장서서 언어의 역경을 견뎠기 때문에 오늘의 ‘모국어의 황홀경’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의 절을 어떻게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넷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르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삼십육 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