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0선](9)
이상 '날개'
작가 황석영이 뽑은 한국의 명단편 100선이 문학동네 http://cafe.naver.com/mhdn/34828 와 경향신문에 동시에 연재를 하기에 이를 전재합니다. 명단편 선정은 황석영 작가와 문학평론가 신수정 교수(명지대 문예창작과_문학동네 편집위원)가 공동 작업했습니다. 황석영 작가는 단편을 읽음으로써 역사서나 경제·사회학 전문서적보다 훨씬 우리의 삶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식민지 청년의 고독은 도깨비불처럼 빛나고
서구 모더니즘의 다양한 전위적 문예운동은 대개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출몰했으며 진정한 20세기의 출발을 그때쯤으로 본다. 지금도 일본의 근대를 논할 때 ‘번역문화’를 내용과 정신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이며, 이를테면 한국과 중국이 사용하고 있는 근대의 모든 관념어, 학술·과학기술 용어가 모두 일본의 번역 조어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임화가 우리의 신문학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이시된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다.
이미 박태원의 장에서 구인회의 출현을 당시의 내지(일본)와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논하였는데 일본에서도 1930년대 초반의 대탄압 뒤에 시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운동이 활발해진다. 변화의 선진에 있던 일단의 시인들인 하루야마 유키오, 기타가와 후유히코, 호리구치 다이가쿠 등이 중심이 되었던 문예지 <시와 시론>이 나왔고, 이들을 김기림·정지용은 물론 이상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재학할 때부터 탐독했다. 이 잡지에는 서구 모더니즘에서 파생된 최신 아방가르드 경향의 비평과 시가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유럽의 문예운동에서 심리주의 상징주의 다다이즘 데카당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은 모더니즘의 다양한 형태로서 매 시기의 전위주의에 속한 것들이었다. 아방가르드의 명성이 높아지게 된 것은 성숙이나 전통을 희생한 대가로 젊음이나 이러한 젊음이 지니는 목표를 낭만주의적으로 과대평가한 것과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미래의 모든 조류에 개방되어 있으며 스스로 모든 전통으로부터 속박과 방해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
김해경(이상의 본명)은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이 되기 전에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장손으로 자랐고, 보성고보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다녔다.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은 죽마고우인 화가 구본웅이 화구상자를 이상에게 주었는데 제대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며 나무 목자가 들어간 이(李)씨에 상자 상(箱)을 넣어서 아호를 삼은 것이다. 이상이라는 필명은 1934년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에서 처음 썼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이미 경성고등공업 제8회 졸업생 앨범에 이상이라는 아호가 적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경성고등공업은 해방 뒤에 서울공대가 된 식민지 최초의 기술교육 기관이었다. 건축·토목 분야가 식민지 기간산업이라는 점에서 하급기술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건축’이란 말 그대로 ‘영화’와 함께 모던을 대표하는 총체 예술이었다. 이상의 동문들은 나중에 한국 건축계의 선구적 건축가로 동숭동 서울대학 본관, 서울대학병원, 화신백화점, 신세계백화점, 한국은행, 경기도청, 중앙도서관 등의 식민지식 건물들을 남긴다. 여기서 식민지식이라는 것은 벽돌과 화강암을 이용한 본국 유사 건물의 카피를 의미한다. 이른바 중앙청으로 불리던 총독부 건물의 원형 돔은 영국식 건물을 옮겨다 놓은 인도의 근대 건축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든 이상이 재학 중에 접했던 건축과 미술 관련 잡지나 <시와 시론>에 소개된 서구 최신 문예이론은 그를 모던보이로 형성시켜 주었다.
이상은 그림도 그리고 건축잡지 표지에 응모 당선하기도 하며 시와 단편소설을 발표하는 등 ‘딜레땅트’로서 청년기를 시작한다. 1933년 폐결핵으로 각혈까지 하게 된 이상은 배천(白川) 온천으로 요양을 갔다가 기생 금홍을 만나고 서울에 올라와서 그녀와 동거하며 다방 ‘제비’를 운영한다. 지식인 청년 이상과 기생 금홍의 동거는 현재의 풍속에 비춰 보더라도 대단히 파격적인데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시속으로서는 그야말로 초현대적인 일로 보인다. 베를렌, 와일드, 보들레르 등에 있어서 사랑한다는 것은 악을 저지르는 일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되고, 창녀에 대한 동정은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사회와 부르주아적 가정에 기초를 둔 도덕을 거부하는 저항의 표현이 되었다. 창녀는 뿌리 뽑힌 자요 사회에서 쫓겨난 자이며 사랑의 제도적 부르주아적 형태에 반항할 뿐 아니라 사랑의 자연적인 정신적 형태에 대해서도 반항하는 반역아다. 창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과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 창녀와의 이러한 연대감을 선언함에 이르러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예술가의 소외는 극에 달한다.
이상은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이태준의 소개로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독자들의 난해하다는 항의로 중단한다. 이상은 이 무렵에 알게 된 구인회의 동인 박태원과 ‘짝패’가 된다. 이상이 운영한 다방 ‘제비’가 종로 청진동의 무과수 제과점 자리였고 박태원의 집은 한길 건너 청계천 위에 걸친 광교 다리 맞은편이었으니 나중에 낙지집이 번성했던 부근일 것이다. 박태원과 이상은 식민지의 룸펜 인텔리겐차로서 본능적으로 ‘왕따’를 자처한다. 식민지의 먹물 든 룸펜은 겉모양으로는 서구식 보헤미안처럼 보였을 것이다. 보헤미안 스스로 자처한 ‘왕따’는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야심을 갖지 않고 사실상 자기 행동에 대하 책임이나 변명이 면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 만이 말했던 불량학생의 ‘맨 뒷줄의 의자’이기도 하다. 제비다방이 그런 공간이었다.
그러나 ‘제비’는 빚 때문에 문을 닫았고 인사동에 낸 술집 ‘쓰루(鶴)’도 실패했으며 광교에다 내려던 다방 ‘69(식스나인)’은 허가 취소되었다.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박태원과 함께 맡아 한 호를 낸 뒤 그만두고 시와 소설을 틈틈이 발표했지만 ‘날개’ 이외에는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변동림이라는 신여성과 만나서 결혼을 한다. 보들레르의 창녀에의 동정이 역설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반항의 표현이었다면 당대 경성의 트렌드는 ‘자유연애’였다. 서울내기에 경성여고보(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온 변동림은 이상의 단골 커피점 ‘낙랑파라’에서 알게 되었고, 이상보다 네 살 위였지만 꼽추의 몸으로 학교를 늦게 다녀 친구가 된 화가 구본웅의 서모와는 이복지간이었다.
변동림은 모던 신여성답게 자유분방하여 몇몇과 애인관계가 있었고 이상도 소문을 들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당한 시민의 못 되는 선생님을 저는 따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변동림이 고백하자 이상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결혼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지 불과 넉 달 만에 이상은 일본 도쿄를 찾아 떠난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모던 도쿄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이비 서구 근대에 지나지 않는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시간을 다 써버린 것이다.
1937년 산책을 나갔던 이상은 불심검문에 걸려서 사상불온 혐의로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몇 달 만에 병보석으로 출감했지만,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향년 27세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한다. 급보를 듣고 달려간 변동림에 의하여 이상의 유해는 화장되어 경성으로 돌아오며, 한 달 전에 먼저 죽은 친구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어버렸다. 여담이지만 변동림은 화가 김환기와 재혼하고 파리 유학을 거쳐 필명 김향안으로 수필과 미술평론을 쓰면서 뉴욕에서 오래 살다가 죽는다.
나는 고등학생 때에 이상의 시와 소설들을 읽었다. 전쟁을 겪은 뒤에 조숙해서 그랬는지 나는 그의 ‘천재성’이나 ‘기행’이 치기만만해 보였다. 다만 그의 철없는 ‘자유’가 부러웠고 흉내 내고 싶기도 했다. 나는 소싯적부터 ‘입석부근’ 또는 ‘출옥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감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을 쑥스럽게 생각했고 ‘말’의 물질성을 발견했으므로 그런 것에 더 냉담하게 반응했다. 따라서 그의 단편소설 중에서 ‘날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청년 이상의 음울한 자의식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식민지 청년의 고독이 어둠 속의 도깨비불처럼 빛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단편소설뿐 아니라 그의 ‘쌩얼’이 드러나는 수필 한 편을 더 첨부하기로 한다. 보통은 ‘권태’를 그의 수필의 백미로 치는 모양이다. 서울내기였던 이상이 요양 차 갔던 시골 풍경에 대한 기억을 엉뚱하게도 동경 한복판에서 회상하는 글이다. 이를 평론가들은 동경에 대한 실망을 엎어치기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그건 현해탄 콤플렉스이며 오히려 보들레르의 ‘권태’ 이미지에 가담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나에게는 엎어치나 메어치나 같은 소리로 들린다. 낭만주의적 염세감의 근대적 형태인 ‘권태’는 삶의 단조로움에 대한 혐오감이며, 현세적 실존의 지겨움을 나타낸다. 근대의 심미주의자에게는 생활의 부르주아적 질서와 안전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이 죽기 직전에 쓴 수필 ‘동경’이라는 글을 뽑아내면서 나는 베를린 망명 시절을 떠올렸고, 그 뒤의 이상은 ‘훨씬 어른이 되었거나, 조선을 훨씬 빠삭하게 들여다보게 되었거나’일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작가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그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잠시 도피할 수도 있고 어떤 형식의 아류를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다만 기슭을 스치는 호숫가의 잔물결처럼 삶의 표피를 간지를 뿐이다.
[다음은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 전문입니다.]
[다음은 이상의 수필 ‘동경’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