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32) “4학년 고은, 네가 동맹휴학 선언문을 써서 조회시간에 읽어라”

라라와복래 2012. 6. 12. 01:09

[고은과의 대화](32) 양 세기의 달빛

“4학년 고은, 네가 동맹휴학 선언문을 써서 조회시간에 읽어라”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는 1905년에서 1945년을 ‘망국’, 1945년에서 1948년을 ‘열정’, 1948년에서 1953년을 ‘충돌’이라는 말로 다루고 있습니다. 미구에 닥쳐올 어처구니없는 감동의 회오리를 ‘열정’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내막을 알고보면 차라리 낯 뜨겁고 진부한 해방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데요.

고은 해방이 ‘해방의 임시’였다는 서글픈 현실은 그것이 어느 날 아무런 준비도 예감도 없이 온 갑작스러운 손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겠네. 그 정체를 파헤쳐볼수록 그것은 나 자신의 것으로 오지 않았고 나를 찾아온 것도 아니었는지 몰라. 그래서 ‘귀결’이 아니라 ‘충돌’이겠지.

김형수 고등학교 때 단체 관람한 영화 <007 시리즈>는 20세기가 스파이의 시대였음을 증빙했던가 봅니다. 음모적인 통치 기술에 의해 미래의 시간들이 한 발 앞서 조작되고 마는, 그런 것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나라’가 핫바지가 되는 현실은 통렬한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은 이미 전쟁 당사자의 무책임한 계획으로 된 분단에 대해서 정작 한반도의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 다만 해방 이전부터 일본의 패전을 내다보며 이에 대비한 건국동맹이라는 국내 지하조직을 편성한 여운형은 북간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 본토의 뜻있는 조선 지식인을 결속시키며 조선총독부 간부의 내밀한 정보 실토에 촉각을 집중하고 있었어. 그런 촉각 끝에 총독부 정무총감 엔토(遠藤)가 ‘장차 조선반도는 분단되고 미소 양국이 나누어 진주할 것이다, 한강을 경계로 경성(서울)은 소련군의 점령이 될 것이다’라고 귀띔했지. 미국 측의 응급처치 같은 이런 분할진주 계획안에 소련이 38선을 반대하면 36도 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가정도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그게 헛소리는 아니었어.

김형수 주권국가 하나가 지상에 들어선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복잡한 사태인지 다들 몰랐을 거예요. 해방을 자기 집에 내걸 국기가 바뀌는 것으로밖에 실감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고은 아무튼 세상의 속담대로 해방이 ‘도둑처럼 온 것’일 때 이에 대응할 한반도의 자체 능력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쉽사리 주어질 수 없었지. 이런 판인데도 1945년 여운형은 중국 연안 일정까지 단념하며 장차의 조선과도정부 구상을 하기 시작했어. 그해 5월 히틀러가 지하 벙커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동반자살하고 독일은 연합군의 점령체제로 들어갔어. 7월에는 바로 독일 포츠담에서 미·소·영·불의 정상선언으로 카이로 선언 이래 다시 조선독립이 슬쩍 언급되었지. 그 무렵 동북아시아에서는 8월 11일에 소련군이 이미 흑룡강을 건너 조선으로 내려오고 있었으니 일제는 소련의 불가침조약 폐기에 당황했지.

김형수 여운형의 행보는 상당히 감동적인 바가 없지 않습니다. 1921년 여운형이 소련 ‘극동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레닌과 담판한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몰라요.

고은 일제가 천황제 폐기만 하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애원하자 미국이 천황 보존을 승인한 사실도 여운형은 짐작할 정도였으므로 그는 조선독립선언문 제정까지도 측근에게 신속히 지시했어.

김형수 어떤 자료집에서 보니 그가 아령을 들고 체조하는 사진이 교과서에 실렸더라고요. 경망스럽지 않게 모던하달까, 문화적 세련미를 느꼈어요.

고은 그런 나날이었는데 조선총독부의 제안을 받은 여운형이 5개 조항을 제시한 것이지. 정치범 등의 즉시 석방과 3개월분 식량 확보, 자체의 치안유지 등에 간섭하지 말 것, 청년학생의 훈련과 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 일본 노무자는 조선 건설사업에 협조할 것 등을 요구함으로써 해방 시기의 사회 지속을 담보해냈어. 이광수의 말마따나 서북의 안창호는 대중의 심금을 울리고 기호(畿湖)의 여운형은 대중을 조직체로 만드는 힘이 있어서 둘의 합심은 이상적이었지.

김형수 일본 정경모 선생도 여운형에 대해서 아주 깊이 천착하시던데요.

고은 바로 이런 조직으로 하여금 일제 말의 건국동맹이 해방 직후의 신속한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했어. 8월 16일 자발적인 군중들이 휘문중학 마당을 채우고 여운형의 강연을 간청했지.

김형수 한국정치사에서 손꼽을 대표적 웅변가라고 들었습니다.

고은 거기서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고 부르짖었어. 그 자리에서 ‘건국치안대’를 즉각 편성하고 풍문여학교에 본부를 두었는데 우선 청년학생 2000여 명으로 서울의 치안 확보를 맡게 했고 각 기관뿐만 아니라 식수(食水)의 수원지까지 보호할 인력을 배치했어. 철도와 전기시설의 기능도 관리하고 지방치안대도 착착 조직한 것이지. 건준 본부는 계동 가옥에 두었어. 8월 하순에 건준 지부가 전국에 145개가 넘었지.

김형수 그런 걸 보면 해방을 맞을 준비가 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고은 이런 해방시기 첫 단계가 바로 자발적 정치 가능성이 현실성을 갖게 되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은 한민족의 오랜 농경사회 유전자인 공동체 본능의 꽃이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는 바로 이 정치 이전이나 정치 이후의 이 두레살림에 언제나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 아닌가. 이 같은 한국의 자치 역량은 우리 정치사의 난장판 밑에 묻혀 있어.

김형수 굳이 6월항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2002년 월드컵 때, 2008년 촛불집회 때, 또 태안반도 기름 유출 때 저는 그런 걸 반복해서 느꼈습니다.

고은 건준의 자세는 식민지 시기 흩어진 각 세력까지도 다 불러들이는 합작의 정치 형태였지. 해방 이후 최초로 시도되는 좌우를 초월한 대동단결의 꿈이었어. 저 1930년대 신간회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일시 동거 이래 그 당시의 일제 탄압이라는 공동의 대상이 없어진 공동(空洞)에서 다시 한번 그 동거를 재현하려던 셈이었어. 아마도 이것이 한국 현대사 정치풍토에서 중도 및 중도세력의 가장 기억할 만한 안타까운 실패 사례인지 몰라.

김형수 해방의 모호함이 이 땅을 들뜨게 한 만큼이나 혼란을 준 결과였을 겁니다. 다들 그 정치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들어가 이데올로기의 부속품이 되었어요.

고은 여운형이 식민지 시기의 기득권 쪽인 송진우를 해방 직전 만나려고 애쓴 일이나 해방 후 건준체제 후기 내내 재건파 좌익세력의 실질에 끌려 다니다가 허울만 뒤집어쓴 일은 바로 한국의 반공체제에서 중도란 우익으로부터 회색으로 배척당하고 이에 못지않게 좌익에는 반동으로 낙인찍힌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 한국에서의 중도는 개량주의의 변종이기 십상이었어. 그 이래 한국의 중도는 중도우파니 중도좌파니 하는 이름으로 입에 오르내리지만 어느 것 하나 정치현실의 실체로 작동하는 경우는 볼 수 없었지.

김형수 결국은 분단 문제로 귀착되네요. 집단 내부의 안정 세력과 혁신 세력이 국토를 반분하여 꽝꽝한 체제를 구축해버렸으니, 남쪽의 좌파가 무슨 좌파이고 북쪽의 우파가 어떻게 우파이겠습니까?

고은 나는 10대 초반의 두메마을의 세월에서도 이 같은 정치의 말단 분위기가 여름날의 폭염처럼 달구어지는 것을 경험했어.

김형수 말씀을 들을수록 선생님은 뒤를 보지 않는 어린 나그네, 혹은 갈 길이 멀어서 과거에 매달릴 틈이 없는 반(反)기억의 존재 같은 이미지가 달라집니다.

고은 나에게는 유년의 초라한 자화상이 있네. 바슐라르가 그렇게도 보배롭게 예찬한 유년의 기억을 기억의 핵(核)으로 말하고 유년의 기억 없는 삶이란 죽음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저 명말의 이탁오가 외친 절대 동심론들이 열거될 때 나는 한층 더 초라한 신세가 된다네. 그렇다 해서 이런 유년성의 결핍을 소년기 청소년기의 푸짐한 기억의 물량이 보상해준 것도 아니었어. 다만 내 고향의 자연부락에서는 100호쯤의 마을사람들이 이렇다 할 갈등 없이 오순도순 살아가며 무사고적인 일상의 단순함에 익숙했어.

김형수 이미 <만인보>를 쓰신, 하고 많은 옛 시간을 내면에 두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바슐라르적 유년 예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고은 사실 한반도 농경부락의 기본 공동체는 저 BC 500년 전쯤의 고대 이집트 나일 강 기슭의 ‘노메스’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노메스’는 법의 공동체였으나 한국의 두레는 ‘법 없이 사는 공동체’였던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김형수 그 두레의식이 한국 농민의 정신적, 심리적 힘의 원천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이번에 얻었습니다. 선생님! 해방의 일기 같은 에피소드를 듣고 싶습니다.

고은 해방의 8월은 마침 여름방학 기간이었어. 9월은 2학기의 시작이었어. 4월에 1학기가 시작돼서 7월 초 여름방학을 맞이하는데 해방 직전까지 방학에도 전시동원으로 학교에서 하는 방공연습이나 실습과 작업에 빠질 수 없었지. 해방 뒤 9월 2학기부터는 일본어 수업이 폐지되고 처음으로 국문(한글)의 수업이 임시 교과과정으로 진행되었어. 나는 그해 국민학교 3학년이었어. 담임선생 모리 히데코는 교장 아베 가족과 함께 군산항 부두의 건물에 수용되어 귀국 송환선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지. 교장이 학교를 떠나는 날에야 처음으로 그 교장의 얼굴에 웃음이 있는 것을 보았어. 언제나 엄격한 표정이었는데 떠날 때 보인 그 쓸쓸한 웃음과 가볍게 손을 흔들던 모습이 구슬펐어.

김형수 확실히 문학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은 아주 큰 강줄기 아닙니까? 긴 것은 잘라서 퍼올리고 깊은 것은 떠서 퍼올려야 보이는데, 어느 지점에선가 인간의 것이 아닌 하늘의 밑바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일제가 떠난다는 것은 소년에게 짝사랑할 형상을 제공한 여선생도, 아껴주고 기대해주었으나 불화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숙명을 확인시킨 교장선생의 뒷모습도 다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고은 담임선생은 시내 자택에서 4km의 신작로를 통근했었는데 8월 20일경에는 아예 학교에 오지 않았지. 3학년 담임은 우선 조선인 교사가 충원되지 않은 상태로 두 학년을 맡기도 하고 세 학년을 맡기도 했어. 조선인 담임 김지훈 선생은 해방 직후 첫 수업시간에 “국문 아는 사람 손 들어!” 하고 큰 소리로 물었지. 생도 80명의 교실에서 아무도 손 드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쭈뼛거리다가 손을 들었어.

김형수 한국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요?

고은 나는 불려나가 교단 위의 칠판에 백묵으로 ‘미룡국민학교 3학년’이라고 쓰고 ‘해방’이라고 쓰고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라고 한글로 썼지. 그러자 조선인 담임선생은 “내일부터 너는 3학년이 아니라 4학년으로 월반한다”고 말했어. 동급생들이 우우우 하고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어.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의 고동이 쿵쾅거리며 고개를 떨구었어. 마침 담임선생이 교장 대리직이었으므로 내 즉석 월반이 가능했어. 다음날부터 나는 4학년 교실로 가서 나에게 배정된 책상에 책보를 끌러놓고 걸상에 앉았어. 그동안의 상급생이 동급생이 되었고 3학년 동급생은 하급생이 되었지. 그래서 나를 자주 때리던 동급생 왈패가 복도에서 만나면 고개를 돌려 나를 피했어.

김형수 중요한 사건 같습니다. 열두 살 소년에게 금지된 모국어가 숨어 있었다는 것은 어디엔가 그것이 서식할 문화적 근거지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고은 그런데 해방 후 첫 교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그는 그동안 다른 지역 국민학교에서 유난히 일제에 충성심을 바친 교사로 알려졌어. 매일 아침 방안의 명치 천황폐하, 대정 천황폐하, 소화 천황폐하 부부의 사진들을 우러러보며 인사를 드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신궁(神宮)에 반드시 참배한 사람이었어. 어디 그뿐인가. 지원병과 징병 독려 그리고 요카렌(豫科練)과 가미가제(神風)에 조선 청년들과 소년들이 나가서 천황폐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이었어. 그 당시는 해방의 열기에 의해서 도시의 중학생들도 자신들의 의식이 뭉쳐지며 동맹휴학이나 시위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분위기가 시골구석의 국민학교 아동들에게도 번졌던지 4·5·6학년생들이 서로 뜻을 모아 학교 수업을 거부하는 동맹휴학을 결의했어. ‘친일파 교장 물러가라’가 목표였어. 그런데 이제 막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한 내 얘기가 퍼져나갔던지 그 동맹휴학을 꾸민 6학년 학생 몇이 나한테 와서 “네가 동맹휴학선언문을 써서 조회시간에 읽어라”고 요청하는 것이었어.

김형수 한 편의 영화 같아요. 봄이 오니 새싹들이 들판을 호령하는 걸 보여주는….

고은 나는 얼떨떨했어. 또 두려웠어. 그런데 그 두려움이 반사적으로 어떤 용기로 돌변했는지 상급생들의 진지한 눈빛에 동의하고 말았어. 다음날 조회시간을 앞두고 전교생이 정렬한 마당에서 신임 교장과 각 학년 담임선생들이 나온 직후 6학년 학생의 구령에 의해서 “기오쓰케(차렷)”으로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 내가 교장선생이나 올라가는 연단에 주저 없이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했어. 부들부들 떨었으나 웬일로 목소리는 뱃구레 밑바닥에서 솟아나왔고 교사 몇이 나를 끌어내리려 했는데 상급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막아주었어. “친일파 교장은 우리들의 교장이 아니다!” “친일파 교장은 사죄하고 물러가라!” “친일파 교장은 조선 땅에서 살지 말고 일본 땅으로 건너가라!” “해방만세!” “독립만세!”를 외치고 외쳐댔어.

김형수 왜 엉뚱하게 그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1801년 탐험가 훔볼트가 남미의 오리노코 강 발원지를 찾다가 이웃 부족을 전멸시키고 앵무새 몇 마리를 잡은 카리브 족 인디언들을 만났는데, 앵무새들이 이미 전멸한 부족 언어의 낱말 몇 개를 흉내 내어 훔볼트가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사라진 언어의 유해나마 가까스로 건진 거예요.

고은 아 훔볼트는 근대 유럽의 소우주이지. 훔볼트 얘기는 따로 하세나. 그날 교장은 사색이 되어 교무실 쪽으로 걸어가고 교사들도 하나둘 마당을 떠났어. 학생 전원은 마당을 몇 바퀴 돌고 나서 “해산! 연락이 있을 때까지 집에서 국문 공부 자습하며 학교에 나오지 말라!” 하는 상급생의 지시에 따라 교실로 가 책보를 싸 어깨에 메거나 허리에 차고 집으로 갔어. 결국 교장은 아예 교사직을 그만두었지. 그 뒤의 소문으로는 사업으로 부자가 되었다며 ‘개도 먹지 않는 선생의 똥’이라는 속담대로 아이들 가르치다가 속이 타는 그런 교육자를 그만두고 돈을 벌게 해준 국민학교 스트라이크를 고맙게 여긴다 했어.

김형수 아, 흥미진진한 인물이 벌써 몇 사람째 등장하는지.

고은 나는 내 뜻이 아니건 내 뜻이건 이런 해방시기 최초의 앞장서기로 삶의 문신이 새겨진 셈인지 몰라. 이 일로 뒷날 사범학교 입학시험에서 학습 성적은 우수한 편인데 품성평가에서는 도 교육위원회 리스트에 동맹휴학 및 시위 앞잡이라는 불량 생도로 기재된 신분이라 당연히 낙제 대상자가 되었어. 그래서 국민학교 교사의 꿈을 온데간데없이 단념하고 다음해 일반 중학교에 입학한 것이지.

김형수 정신이 번쩍 듭니다. 현실을 따를 소설이 없어요.

고은 다행히 아버지는 동맹휴학 선두에 나선 내 무모하다 싶은 행동을 한 번도 꾸짖지 않았어. 어머니만이 “내가 마당에 닭을 길렀는데 독수리를 닭으로 알았던가 보아. 잡상 맞어라, 잡상 맞어라” 하고 내 밥그릇에 고봉밥을 퍼주며 혀를 끌끌 찼지. 술꾼 할아버지는 술 마시고 나서 “우리 손자놈이 애국자다. 애국자여!” 하고 내 의기소침을 다독였어.

김형수 선생님의 시 ‘연기 한 가닥’을 듣고 싶습니다. 서해 연안 끝 쪽에 솟아오른 그 연기 한 가닥.

 

연기 한 가닥

논에 둔 북더기나 검불 그냥 삭는 게 좋은데

부쩍 늙으신 아버지는 마른 팽쑥 논두렁 건너가서

큰일이나 난 듯이 그것에 성냥 그으신다

마침 찬서리 느지막하게 녹는 참이라

연기 한번 고구려고구려 힘차게 솟아오른다

다섯 바람 열 비 내리는 하늘이야

또 하늘대로 아무 일 없듯 새파랗게 젊기만 하다

보아라 하늘과 땅 사이만한 것 어디 있느냐

연기 한 가닥 뻗어올라 나라 하나 세운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곧 세상을 떠나실 것만 같다

더 탈 것 없으니 연기 차차 기운 잃어버린다

할아버지를 아버지가 이으셨으니 아버지 내가 이어야지

오천 년 내내 농사짓는 일 대대로 이어와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허리 굽혀 모심는 날

그날 밤에는 온통 개구리 울음소리로 마을이 떠나가리라

 

  출처 : 경향신문 2012.04.2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4271951145&code=210100&s_code=af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