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34) 분단에서 통일로 간 지역을 손꼽아 보곤 해, 이제 한반도 차례 아닐까

라라와복래 2012. 6. 12. 02:47

[고은과의 대화](34) 양 세기의 달빛

분단에서 통일로 간 지역을 손꼽아 보곤 해, 이제 한반도 차례 아닐까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1946년의 조선은 비애로 가득합니다. ‘어제’와 ‘내일’ 사이에 개울이 흐르고 ‘오늘’은 어지럽게 흩어진 돌들처럼 어떻게 디뎌도 연결이 되지 않는 그런 지점에서 소나기처럼 사나운 자연의 채찍이 쏟아져요. 그 상황의 콜레라는 해방된 산야를 더욱 측은하게 은유하는 것 같습니다.

고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결코 축복만은 아니야.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네. 예술을 자연의 모방으로 말하는 해묵은 모방론이 있지. 그런데 이에 앞서 사회라는 인간행위의 구조란 결코 자연에 대해 외따로 분리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자연이란 그 생태 안의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독립시키거나 말거나 그 따위 장난에 놀아날 까닭이 없지. 오직 인간만이 자연으로부터 독립된다는 오만을 근대 인간의 기본 속성으로 삼았어. 아니 문화라는 것을 자연만물의 상위 가치로 삼아온 것은 동양에서도 근대 이전부터이기도 해. 어릴 때 배운 서당의 기초교과서 동몽선습(童蒙先習)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 운운의 우위 선언부터 익히게 했으니까. 인간은 자연만물에의 착각에 잠겼는지 몰라.

김형수 1940년대 중반이면 유럽에서는 이미 근대 인문학의 위기론이 시끄럽던 시기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어제의 세계>를 써놓고 자살한 게 우리 해방 3년 전이니까요. 그때 그 시대가 그토록 높은 정신적인 절정에서 참혹한 도덕적 몰락을 자행했다고 절망합니다.

고은 츠바이크가 죽은 곳이 엉뚱한 아르헨티나였지.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온 사회가 원시공산사회에서 노예제사회를 거쳐 온 것은 인간 자신의 발상이기보다는 자연생태로서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나 힘의 위계질서 따위의 생물생태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하네. 자연의 양면성은 자연의 호혜관계인 반면 자연유지의 권력체계이기도 하니까. 생태 자체가 무엇은 무엇에 먹히고 그 무엇은 또 무엇에 먹히고의 거의 무한정의 먹이사슬로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 순환의 지배체계로 편성된 사실이야말로 인간사회에 행사되는 힘의 기원이기도 하겠지. 이 힘이 밖으로 넘치는 것이 악이지.

김형수 자연에게도 서사가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떤 역사시대의 혼란이 힘의 부족보다 과잉 쪽에서 생긴다는 게 조금 위안이 됩니다. 해방이 불구였음에도 나중에 산업화든 민주화든 광천수를 뿜잖습니까?

고은 해방시기의 정치현실은 해방이 하나의 해답이 아니라 문제라는 것, 그것도 난제라는 것을 처음부터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었지. 일제가 끝장남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제 강점체제 자체나 그동안 다져놓은 그 억압 구조의 타율이 해체되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혼란과 불안의 일상으로 대체되었어. 단순성이 복잡성으로 급반전한 것이지. 이런 식민지 기간의 안쪽에는 많은 손상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농경사회에 자생해온 미덕인 비정치적 공동체의 맥락이 삶의 일상적인 기반을 이루었는데 그것조차 소진되기 시작했어.

김형수 농경부락에 자생하는 비정치적 결속에 대한 애착이 뿌리 깊으십니다. 늘 이데올로기의 바깥에 계시니 선생님이 희망하는 사회적 조합이 어떤 건지 궁금할 때가 많았어요. 두레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은 그래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의 자연부락들은 근대 행정 개념보다 전근대 자치 개념에 익숙한 점이 있지 않은가. 굳이 고대 이상주의인 맹자의 정전설(井田說)로서의 공(公)을 에워싼 사(私)의 조화나 마을을 뜻하는 동(洞)자의 표의(表意)가 공동 우물 하나를 에워싼 오순도순의 취락을 나타내는 것도 그것이 국가라는 인간의 타율화에 토대를 두는 것과는 사뭇 다르지. 그게 흔들리는 것이 섬뜩했어.\

김형수 선생님이 바라는 세상의 원형을 ‘해방’이 와서 깨뜨린 듯한 느낌도 들어요.

고은 내 고향이란 누구의 고향이나 다를 바 없는 이런 공동체와 개체의 음력적(陰曆的)인 세시풍속의 좌청룡 우백호의 평범한 비산비야였어. 이런 마을에 정치라는 것, 권력이라는 것이 해방의 제1명제로 들이닥쳐서 사람들이 온통 정치 지향으로 급조되고 말았지. 정치는 인간에게 특급 전염병이야.

김형수 그릇된 정의가 ‘동트지 않은 미래’를 앗아간 거예요. 해방의 실낙원이랄까.

고은 또한 정치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욕망의 분출이기도 하지. 정치 구호야말로 인간 언어에의 가학적 피학적 폭압이지.

김형수 그래서 분단의 발자국은 결국 어떤 소리로 오게 되는 겁니까?

고은 당장 북위 38도선이 그어져서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고 38선 자체가 남북의 소통을 차단하는 생활의 분단선이 되자 남과 북은 이전의 오랜 동질 정서도 곧장 지워지기 마련이었지. 백년가약도 등 돌리면 남남이지. 서울에서 평양의 조선민주당 조만식은 점점 추상화되고 북에서는 평양이 북조선 분국(分局)의 장소이던, 상부 당국인 조선로동당 진영이 나날이 희미 끄무레해지자 남로당 월북이 서둘러진 점도 없지 않아.

김형수 무척 스산했을 것 같습니다. 봄을 기다리는데 가을이 기울고 있었으니.

고은 이런 상황인데도 38선의 비공식 거래와 밀무역이 성행해서 남쪽의 경성고무공장 고무신이 북으로 가고 북의 명태가 남으로 넘겨져서 제사상에 명태가 놓이고 북어국의 입맛을 잃지 않았어.

김형수 보따리장수들에게는 38선이 없었네요.

고은 상거래라는 장삿속은 전쟁이건 적이건 38선이건 그 무슨 장벽이건 뚫고 마는 인간생태의 원초적인 역량(力量)이야. 미국 록펠러라는 장사꾼은 남북전쟁 때 적군에게 무기를 팔아먹고 부를 쌓은 이적 행위의 본보기로 된 재벌 아닌가. 그게 미국 현대사에서 대통령을 지금껏 입맛대로 내는 배후세력 록펠러 2세, 3세의 세습 아니었나. 닉슨, 키신저도 그들이 내세운 꼭두각시야. 어디 그뿐인가. 유럽의 근대에서 로드차일드 금융이야말로 오늘날의 유럽연합체제의 경제적 기원을 이루는 유럽국제유통의 원조라 할 만하지. 장사야말로 애비 원수와도 짝짓는 돈벌이를 바라 마지않지.

김형수 차라리 장사꾼들의 발바닥에 통일이 있었는데….

고은 아무튼 남북이 이런 지경으로 분단 고착이 되어 갈 때 북의 친일세력이나 인심 잃은 지주들이 대거 남하했고, 그 밖에도 며칠 동안 서울에 왔다 가는 일정으로 38선을 넘어와서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한반도 이산 인구가 늘어났어. 1970년대 이래의 이산가족 1000만이라는 것이 분단의 실상이기도 하지. 한반도에서의 고향타령은 저 20세기 벽두의 북방대륙에 흩어지는 한민족의 진한 향수 그대로 현대사의 유전자가 되고 말았지. 식민지 시대의 고향은 잃어버린 조국의 동의어이지. 두고 온 불귀(不歸)의 성지(聖地)이기도 했어. 조상의 무덤과 자신의 태(胎)를 묻은 그 출생지에의 귀소본능 말이네.

김형수 분단이란 한 생명의 정서적 거처를 ‘강제적으로 단절시키면서 꼼짝없이 연결시키는’ 정치적 사태를 일컫는다고 정의하고 싶어요. 그것이 이익이냐 손해냐를 묻기 전에 민초의 존재 기반을 와해하는 강압장치를 용인할지 말지부터 따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최근 뉴스를 보면서도 저는 소위 ‘종북주의’도 한심하지만 통일 감정을 마치 옛날에 끝난 신파극처럼 취급하는 발언들이 훨씬 미워요.

고은 이 같은 고향 극복의 난제는 기어이 특히 박정희 유신체제 이래 지역감정의 극한에까지 닿아 있게 되고 오늘날의 남과 북이라는 현실로서의 분단에 내면의 분단인 동과 서라는 정치문화의 간극을 고착화하고 있지 않은가. 백약(百藥)이 무효인 민족사의 중병이야. 농경사회의 토지 집착에 의한 지역주의를 선사 유목사회의 유동적인 본능을 일깨워 타파할 필요가 있어. 과연 우리 역사를 소급하면 고구려·백제계의 북방과 신라의 동남방이 있고, 끝내 그것이 근세사의 안보지형에서 서북 소외와 조선후기 영남 성리학의 주리론 세력에 의한 기호학의 대항문화에까지 가로지르는 지경 아닌가.

김형수 한국인의 고향 감정에 은폐된 정치 귀신을 어떻게 퇴치해야 될까요? 애향을 애족, 애국으로 묶어버린 교과서들도 공범입니다. 문학적으로 사투리적 체질을 지키는 자로서 개체가 공동체에 쏟는 연민을 오염시키는 통치력들과 적대하지 않을 수 없어요.

고은 고향이란 있어야 하는 고향과 없어져야 하는 고향이라는 쌍둥이 머리를 가지고 있어. 나는 한동안 고향을 민족의 하위 개념으로 깔아둔 적도 있었네. 이것의 민족적 극복과 조정을 바탕으로 한반도 다연방(多聯邦) 통일과 국가원수 윤번 추대제를 지금껏 주장하고 있네. 작은 나라 스위스나 좀 큰 나라 말레이시아가 이미 다연방 아닌가. 아니 미합중국도 주 헌법, 주 실정법이 별도로 있는 연방 체제 아닌가.

김형수 매우 구체적이세요. 통일 염원도 하도 남발되어 쉰밥처럼 되었는데…. 어떤 일이건 식상한 냄새를 풍기는 건 젊은이들을 내쫓는 것 같아요. 분단의 깊은 침묵 속에서 숱한 세월에 고통을 묻은 영혼들의 속삭임이 귀에 닿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요.

고은 사실인즉 분단에서 통일로 간 지역이 20세기의 독일과 베트남, 예멘이 있겠지만 고대 세계사에서 통일 사례는 역사 발전의 차원에서 하나둘이 아닌 것을 나는 손꼽아보는 버릇이 있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라면 기원전 3200년경 고대 이집트의 멤피스 시대, 피라미드 시대야말로 분단의 상(上)나일 강과 하(下)나일 강 유역을 통일했지. 그 뒤 중왕조(中王朝) 시대 제2왕조도 이집트 대통일을 만들어냈고 기원전 560년 같은 혈족인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이 통일되는 카루스 1세 시대가 있지. 이에 앞서 고대 팔레스타인 일대의 북의 이스라엘과 남의 유대가 구약세계의 남북통일을 이루어냄으로써 북의 아브라함 자손의 역사와 남의 전쟁신 야훼의 신앙이 하나가 되지. 어디 이뿐인가. 고대 중국의 진나라 통일도 오늘날의 차이나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저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의 폴리스로 나누어진 그리스를 하나로 뭉개버린 20대의 알렉산드로스 시대와 기원전 350년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고대 브라만과 남쪽 드라비다 토착신의 합체인 오늘날의 인도 힌두이즘에 이르기까지 통일사업은 언제나 분열과 분단의 소승과 그 이기주의 골짜기를 뛰어넘는 역사의 큰 족적이었지. 이제 한반도 차례 아닌가.

 

그림 임옥상 화백

김형수 그렇게 많은 사례를 기억에 담은 사실 자체부터 경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은 한반도가 고조선의 애매한 일원체제 이래 언제나 나누어지는 상태였고, 고대 후기 통일도 끝내 남북조 시대라는 분단체제였고, 고려의 민족국가라는 것도 북방의 불안 앞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한 것에 지나지 않지. 조선 세종조에 이르러서야 북방 6진 개척으로 고대의 대륙성을 상실한 대신 반도의 자아세계를 확정한 것 아닌가. 근대 지리부도에서의 한반도가 그때 보장되었어.

김형수 아까 개체들의 근거지 갈망이 ‘현대사의 유전자’가 되었다 하셨죠? 그래서 바깥출입을 일절 삼갈 때조차 ‘겨레말 남북공동편찬사업’ 같은 일에는 발품을 아끼지 않으신 걸 알고 있습니다. 그 일관된 감수성, 공동체의 온전성을 희구하는 대지적, 통합적 정신이 실로 존경스럽습니다. 면전에서 송구하지만 한 번은 밝히고 싶었어요.

고은 해방공간에서 해방의 의미는 분단의 의미가 아닌 경우에만 허용되는데도 우리는 분단을 해방이라는 의미로 호도하는 부당성에서 내 소년시대가 있었네 그려.

김형수 덕분에 우리의 연대기 중에서 가장 난처한 ‘환희 속의 절망’, 냉전의 헤게모니를 쥔 미국, 소련이 행한 ‘이성적 만행’의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고은 사실상 1945년 여름으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면서 그토록 한마음으로 불러댄 해방만세, 독립만세의 열화(熱火)는 꺼져가고 수많은 노선들이 그 군소 상태의 와중에서 서너 개의 노선으로 가닥이 잡히지. 끝내는 미·소의 냉전체제 최전방으로서의 두 노선만이 한반도의 정치현실로 고착되지. 이런 판에서 김구의 38선을 베개로 삼고 쓰러진다는 통일의 비원은 현실의 길에서는 멀어져가는 메아리였지.

김형수 ‘성묘’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금방 올 것 같은 통일은 오지 않고, 아버지가 살아생전 남북으로 떠돌며 외치던 “소금이여. 소금 사려” 소리만 멀어져가던 풍경을 노래한 시요.

고은 1947년이면 38선에서의 무기충돌로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남의 단독정권, 북의 단독정권이 서버렸고 그때까지 하나의 민족을 표상할 태극기는 남쪽만의 것이 되고 북쪽은 재빨리 사회주의 국가들의 깃발을 참고삼아 별이 박힌 인공기를 제작해서 심지어는 남쪽의 국민학교 게양대에도 휘날리게 하는 지하조직까지 있게 되었어. 일제가 대륙 경영의 야망으로 조선인 노동집약의 수력발전소를 만들었는데 미국의 후버댐 공사에 비견되는 그 수풍(水豊)댐 전기를 남쪽으로 보내주다가 단전해버렸어. 그 때문에 해방시기 남쪽의 산업, 특히 공업시설에 타격을 주었고 도시 주민생활에도 막대한 손실을 주었어.

김형수 단전의 파장이 서남해안 두메에도 미쳤습니까?

고은 물론 내 고향이야 전봇대 하나 들어서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어. 군산의 외가에나 가야 두 방의 벽에 구멍을 내어 두 방이 함께 쓰던 알전등을 보거나 전선으로 이어진 라디오에서 이승만의 연설 중계를 들을 수 있었지만 내 고향의 밤은 그야말로 순수한 태고의 먹밤 그대로였어.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자연과 문화탐방으로 평양에서 첫날밤을 보낼 때 그 불빛 없는 먹밤을 통해서 남쪽의 네온사인과 십자가의 야경이 아닌 어둠의 원색을 만날 수 있었지.

김형수 먹빛 어둠이 천하를 한덩어리로 만들던, 그래서 밤마다 새 울음소리가 통으로 울리던 변방에서 어떤 꿈을 꾸었는지요?

고은 고대인들이 신을 어둠 속의 소리로 만날 법한 그런 밤이었지.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새로 생긴 사범학교를 목표로 삼고 입시공부를 했어. 여학생 셋과 남학생 다섯이었어. 내 최초의 꿈은 국민학교 교사였어.

김형수 토착사회에 외계의 빛은 모두 선생들이 묻혀 나르니. 교사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나 봐요. 지난번에도 그분들에 대한 선망을 느꼈어요.

고은 해방 뒤의 한국인 선생은 최칠봉, 소병채, 고재영 들인데 그분들은 아직껏 내 가슴에 담겨 있는 선생님들이지. 최칠봉은 서울사대 출신 부부교사이고 시집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 여교사 소병채는 풍금에 맞춰 ‘보리수’를 잘 불렀어. 꾀꼬리였어. 그리고 고재영은 아버지 고중돈과 함께 교육자 가족인데 나를 무척 사랑했어.

김형수 아아, 그 끝이 궁금합니다. 선생님의 이력에는 중학 졸업이 없으신데요?

고은 그런데 사범학교 시험에서 학력 성적은 합격이었는데 친일파 교장 축출 동맹휴학 앞잡이라는 불량아동으로 도 교육위원회에 찍혀 있어서 품행 불합격이었어. 그때 나는 여학생 조부희를 사모했는데 그네보다 내 점수가 낮게 되기를 바라면서 곱셈에서의 0을 1 이상으로 일부러 오산(誤算)을 했어. 이를테면 3×0은 마땅히 0인데도 3이라는 엉터리 답을 써냈어. 나보다 성적이 좀 뒤지는 그녀를 배려한 것이지. 이를테면 저 7세기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의 기수법인 0의 성질을 고의로 마다한 셈이네.

김형수 그 틈에서도 내밀한 숨소리가 밀려오네요. 슬프고 아름다워요.

고은 아버지는 막 시작한 사범학교 합격과 발표 게시판에서 내 수험번호와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자 고개를 떨군 나를 데리고 시내 중국집으로 가서 짜장면을 사주었어. 미룡국민학교 수험생들은 여학생 조부희 이외에는 다 불합격이었는데 그들도 교장 축출 동맹휴학이 그 이유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네.

김형수 에구, 정말 이 땅에서 숨 쉬는 건 삶이 아니라 난(亂)이었어요. 옛 추억이 온통 난중일기 아닙니까?

고은 일제시기 조선8도에 한 개씩 개교한 사범학교는 식민지교육 전시교육의 철저한 시범으로 장차 식민지인을 일본화하는 데 기여할 기간인력을 배출했어. 사범학교는 수업료도 받지 않았지. 그런 대상의 하나가 대구사범의 박정희이기도 했던 것이지. 바로 이런 전례가 해방 후의 사범학교에도 그대로 통용됨으로써 나는 불량학생으로 처음부터 낙인찍힌 셈이었어.

김형수 외삼촌의 자전거 뒷자리 시절에 루소의 책이 눈에 띌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생애가 온통 근대교육의 가치관과 충돌되었어요.

고은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내 편이었어. 짜장면을 사주고 나서 책도 한 권 사주었지. 마분지로 된 종합상식 책이었지. 집에 가서 혼자 한밤중의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어.

 

성묘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소금장수이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일제시대 소금장수로

이 땅을 짚신으로 지까다비로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묘향산 압록강을 생각해도

지금은 그때가 아닙니다.

(중략)

아버지 남북통일이 혹시 일 년 뒤에라도 이루어진다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두루두루 다니는 청청한 일곱이레

일고수 되십시오.

불초 제가 아버지의 옛 가락 받들어

한세상 휘몰아가는 설움 흥으로 노래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셔요.

소금이여 소금이여 소금 사려

그 소리, 멀어져가는 식민지시대 두메마을 그 소리 어디 계셔요.

 

  출처 : 경향신문 2012.05.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111834385&code=210100&s_code=af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