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해방 당시 공동체 내부의 여러 가지 태도들을 어떻게 보셨어요? 더러는 안정을 원하고 더러는 개벽을 꿈꾸는, 그 수많은 인간군상이 민족에 대한 긍지, 무관심, 죄의식, 부정, 회한 등의 감정을 드러냈을 것 같습니다.
고은 해방 이전이 단순한 현실이었다면 해방 이후는 그 반대였지. 삼거리마다 시끌덤벙한 나날이었어. 가능성은 ‘너도 나도’라는 임의성도 내포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해방은 그동안 억압되고 명령에만 따르던 사람들에게 너도 나도 자기를 내세우는 심리적 무정부 상태를 내보이게 하고 말지. 일제 식민지사관은 이른바 반도사관으로서 대륙과 대양의 세력에 좌우되는 타율성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타파하려는 듯이 자기방출의 여러 가능성들이 치솟았어.
김형수 먼저 눈에 띈 건 문화폭발 현상이었습니까?
고은 해방 직후 가장 먼저 세상에 번져간 것이 정당이나 정치사회 단체의 간판들이었어. 8·15로부터 한 달이 겨우 넘었을까 말까 한 그해 9월 초순에 이렇다 할 사전준비도 없이 시작된 미군정 시대가 열리자마자 그 군정청에 등록된 정당만도 무려 250개가 넘게 되었지. 그 밖의 미등록 1인 간판 따위까지 망라하면 500개 이상이라고 해. 과연 정치의 다신론 시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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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쭉부터) 이승만, 여운형, 김구의 초상. 그림 | 임옥상 화백
김형수 정치폭발이 먼저였네요. 그렇더라도 시골 농사꾼의 삶이야 외형적 변화가 없었을 것 같아요. 들일이란 허리를 펼 새가 없는 것이라, 동네 어른들도 논두렁 밭이랑에 쉬어 울던 아침 새 저녁 새와 매한가지 아니었습니까?
고은 꼭 그렇지는 않았어. 두메마을 말단 부락인 내 고향마을의 아버지도 ‘대동진(大東震)’이라는 고대 후기 이래의 연고가 있는 고색창연한 이름을 내건 대동진당의 당원 행세를 하다가 지주인 재종조부 고한규의 권유로 생뚱맞은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에 새로 입당했고 이 사실로 6·25 3개월 동안의 인공시절 아버지가 내무서에 의해 한 달 반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지.
김형수 정치적 혼란에 연루되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왠지 일반적인 가계사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고은 어쩌다가 십리 길을 걸어서 군산 시가지에 가면 1층이나 2층 건물마다 정당사회 단체의 간판들이 상점 간판이 무색하도록 내걸려 있었어. 내가 다니던 미룡국민학교 앞에는 선술집과 술 도매가게 그리고 알사탕, 명태, 과자 따위와 잡기장과 질 나쁜 연필 등 문구 몇 종류를 파는 곳과 이발소가 초가지붕의 농가에 문짝을 달아낸 건물 대여섯 채가 있었어. 그 문구상과 이발소에도 군소 단체의 말단 지부라는 간판이 걸리고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여러 개의 현수막들을 매달아서 그것이 바람에 펄럭대고 있었어. 과연 해방의 계절은 정치가 폭발하고 정치단체가 난립하는 계절이었어. 저승귀신들까지도 명망가이고 애국자로 돌아온 것이 해방의 역설이기도 했지.
김형수 행길을 스쳐간 그림자들까지 일어서서 까치발을 딛는 형국이네요.
고은 1948년 3월의 한 신문회견에서 백범이 개탄한 바 “…그렇지 않아도 수백 정당이 난립하여 국정이 극도로 혼란한 가운데 나와 이 박사의 충돌이 표면화된다면…”에서도 당시의 현실이 드러나고 있지. 그 누구의 애국의 경륜이나 독립운동의 역량으로도 결코 수습될 수 없는 정치 카오스 속에서 한국 현대정치사는 자신의 패권을 시작한 것이지.
김형수 <해방 전후사>를 필독한 세대지만 이렇게 정치적으로 열린 시골 소재지 풍경, 그곳에서 ‘계란 줄이나 흥정하는’ 마을 유지들에 대한 실감은 처음입니다.
고은 8·15로부터 2주 뒤 공포된 미 군사령관 하지의 포고문 1호, 2호에는 ‘점령군’의 상륙에 따르는 질서, 특히 아직 한반도에 있는 일본인이나 상륙한 미군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엄중 처벌한다는 조항이 있고 ‘불행한 국민(조선인)’에게 ‘자비심 깊은 민주적인 미국’이 실시하는 군정에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굴욕적인 내용이 있었어. 이것이 이른바 ‘맥아더 일반명령 1호’의 한반도 분단 군정 실시의 군사적 표현이었어. 실제로 맥아더 포고 1호는 “…일본 천황의 명령에 의하고 또 그를 대표하여 일본제국 정부의 일본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오늘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고 강조하면서 점령군의 위엄을 과시하지. 군정 선포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것, 그 밖의 제반 포고·법령·규약·고시·지시·조례 등을 맥아더 본관 명의로 발표한다는 것 등 6조 항목을 적시하지. 바로 이어서 포고 2호는 위반자는 사형 등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고 3호는 화폐 문제를 다루었어.
김형수 해방이 ‘또 다른 점령’이 되는 게 안타깝습니다. 2차 대전은 세계사의 주역으로 미국과 소련을 띄우고, 우리나라도 그들의 직접적인 관여 속에서 20세기 활극의 앞마당이 됩니다.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은 어떤 모습이었어요?
고은 이 같은 미군 쪽의 공포 분위기와는 달리 38선 이북에 12만5000명의 병력이 주둔한 소련군의 포고문은 겉으로나마 한반도 주민에 격려 의지를 내보였어.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일본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기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조각들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그야말로 미사여구의 문학적인 포고문이었어. 그 끝에는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까지 달아놓았어.
김형수 문체가 상당히 유려합니다. 인민의 환대를 받기에 충분한 내용이었어요.
고은 하지만 남쪽의 미군 병사들에 의한 피해 상황 못지않게 소련군의 민간 가해 사건도 자주 일어났어. 우리 마을과 같은 두메까지 지프가 달려와서 마을 처녀들을 집단 강간하는 일이 일어나서 처녀들이 아궁이에 들어가 숨거나 안방 벽장에 숨거나 하고 얼굴에 숯검댕이를 칠하기도 했어. 그렇게 되자 쉰 살 할멈이 미군 졸병에게 봉변당하기도 했지. 소문으로는 북에서도 소련군이 밤마다 마을을 뒤져서 부녀자를 색출한다거나 흔하지 않은 팔목시계를 빼앗아서 팔뚝에 팔목시계를 20개나 줄줄이 차고 다니기도 했다더군.
김형수 그런 몹쓸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외국인을 혐오하도록 내몰았다고 봅니다.
고은 이런 군정시대와 함께 38선 이남은 미군정 한국인 고문단이 위촉되어 그 대부분은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로 메워졌지. 정당으로는 이 한민당과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뒤의 남로당), 신민당, 노동당, 사회노동당, 조선인민당(나중의 근로인민당), 그리고 한독당, 조선민족혁명당(나중의 인민공화당), 신한민족당과 조선혁명당, 민중당, 조선농민동맹, 조선민주당, 민복당, 인민정치당, 신민당, 대한의열당, 고려청년당, 조선청년당, 고려동지회, 조선여자국민당, 건국부녀동맹, 한국애국부인회, 대한민국국민당, 대한독립협회, 백협노동당, 조선건국협찬회, 대동회, 만민회 등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나열되었고 만개했지. 이런 판에 미국에서 뒤늦게 귀국조치가 내려진 이승만의 환국으로 독립촉성회가 발족되면서 이승만은 ‘나를 따르라’를 입에 달고 나섰어.
김형수 분수대의 물줄기 숫자만큼이나 헤아리기 어려워요.
고은 이런 정당 혼돈 상태를 몇 갈래로 분간할 경우 국내 우익 세력인 한민당과 박헌영 재건파의 공산당과 그 사이의 여운형 건준-인민공화국의 중도 세력에다 임정 진영의 환국에 의한 김구의 한독당으로 나눌 수 있어.
김형수 만주의 문재린 목사는 해방이 분단을 낳을 걸 염려하다 서울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일성 등이 모여 ‘동진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기로 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기독교 총회가 서울에서 열렸으므로 참석했다가 돌아가 용정 공산당에 체포됐어요. 이게 문익환 목사를 월남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데.
고은 환희와 감격이라는 민족감정의 폭발을 일으킨 해방 바로 다음 과정으로 ‘해방 즉 혼란’이라는 비극적 등식의 현대사 ‘혼란의 극’이 나타났어.
김형수 정치적 분출이 혼란을 야기하지만 저는 반드시 잘못이기만 할까 싶어요.
고은 그것은 해방을 ‘원초적 해방’으로 정의할 때의 긍정적인 해석이기도 하겠지.
김형수 하나의 공동체가 정체성을 확립하느라 다양한 언어를 분출하는 건 마땅히 겪어야 할 과정이 아닐까 해요. 논에서 개구리 떼가 울 때 초저녁에는 각자 떠들지만 밤이 깊으면 일제히 합창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생독립국에서 근대정치가 그렇게 싹트지 않을까요?
고은 그 당시의 3개 정치노선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였어. 이것들은 하나의 정치적 완결을 불가능하게 하기에만 적합한 완강한 정치 행태였지. 김병익의 지적에 따르면 해방 뒤 돌아온 미국 유럽계는 해외 문물에 의해 지적으로 세련된 반면 국내 동향의 실질에는 어두웠고, 중국 오지에서 노심초사한 임정과 광복군 계열은 민족의 독립과 조국애의 뜨거움에 견주어 김규식과 조소앙들의 정치 지성에도 불구하고 퍽이나 재래적인 낙후성을 드러냈으며, 국내 지하공산당과 러·만의 좌익 계열은 매우 육탄적이며 교조적 이데올로기이기 십상이었지. 여기에다 국내 애국자들의 자기 한계나 친일 세력의 노회한 수구의식들이 하나의 난장판에서 서로 외쳐대는 배타주의 노선을 겨루고 있었어. 여기에 미국이라는 해양세력과 소련이라는 대륙세력의 필연적인 대결의 현장이 된 한반도는 크게는 남과 북으로 집약되는 적대 체제로 빠르게 굳어져 갔지.
김형수 당시 하지 장군의 고문이 보냈다는 보고서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남한은 불꽃만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과 같다고 묘사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즉각적인 독립과 일제의 청산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단히 실망해 있습니다.” 이때 김구 선생은 두루마기 차림이었죠? 좀 상징적인 용모 같습니다.
고은 같은 두루마기도 이(李)의 두루마기와 김(金)의 그것이 달랐지. 사실, 미군정에 의해 임정의 김구 일행은 그들이 사수해온 망명정부 명분의 포기라는 어처구니없는 무장해제로 개별 귀국한 이래 국내 한민당과 이승만의 친미노선 앞에서 현실을 제대로 설정할 여지가 없었어. 어느 철학자가 말하기를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를 여인에 비유하며 철학이 너무 진지한 나머지 그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게 되거나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나머지 그 여인의 마음이 떠나버림으로써 실패자가 되었다고 했어.
김형수 역사를 여인에 비유하니 당시 민족사의 허리, 그 시해된 관능을 상상하게 됩니다.
고은 여기서 진리라는 것을 역사로 대치해보자면 해방 이후의 정치 경륜이나 노선이 한반도 역대의 운명이라는 그 역사에 지나치게 천착함으로써 도리어 역사의 방향에 어긋나는 경우를 드러냈지. 사실인즉 한말의 위기의식이 낳은 역사의식은 조급한 속내를 감추고 있어. 태평성대에야 역사의식이 희박한 것이 자연스럽고 또 태평성대가 아니라도 사회 상층의 정치곡예와는 상관없는 백성 일반의 정치적 소외와 무관심은 무척이나 하세월로 길고 길었지. 그러다가 한말에 이르러 위기의식이 일어남으로써 그것이 구성원 전반의 역사의식으로 나아가 단군도 살아나고 고구려도 살아난 것이지.
김형수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어떻게 해야 광활해지는지 모르겠어요.
고은 박은식 신채호 그리고 대종교 문화세력들의 민족혼 장려나 온건한 국내 국학파적 민족정신을 실천적으로 종합한 김구 같은 분의 가식 없는 민족주의가 표방하는 ‘역사의 길’은 어쩌면 ‘현실의 길’에 대한 결핍인지 모르지. 역사라는 여인이 현실 유지의 능력이 없는 것을 보고 떠나버린 것인지 몰라.
김형수 퍼뜩 떠오른 건데 선생님께서 ‘대륙’이라는 장시를 쓰신 게 1977년이어요. 당시에는 고대사적 상상력이 작동되던 환경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체험적 밀도가 엷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모국어 공동체에 발생된 어떤 결여를 자꾸 들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고은 사실 이런 민족이나 역사에의 곧은 심성은 미국 체류의 서재필이나 이승만에게는 진부한 촌락의 심성으로 보였을 것이네. 1945년 10월 귀국한 이승만과 1947년 귀국했다가 귀국 부적합에 직면한 뒤 바로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의 담화에는 민족 운운이 전혀 없었지. 이승만은 건국 기초의 요소로 민주주의 원리만이 강조되고 있어. 민족주의라는 것에 전혀 취미가 없었지. 김구의 ‘민족국가’라는 지향이 주는 감동과는 전혀 다른 쪽의 현실주의인 것 아닌가.
김형수 제가 꼽고 싶은 기념비적 논술의 하나가 김대중 대통령의 ‘문화란 운명인가’입니다. 교과서에 실리면 좋겠어요. 싱가포르의 총리 이광요가 아시아의 문화전통을 강조하면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한 글인데 문화는 변화하는 것, 그것이 결코 집단의 운명일 수 없다고 설파하면서 아시아의 고대사에 민주주의적 철학과 전통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밝힘으로써 오히려 주변부의 토착적 세계관을 인류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재구성하는 탁견을 보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언어 즉 세계관의 문제가 일종의 천연자원과 같은 것으로서 생태학적 밑천으로 보입니다. 민족이란 그런 보편성의 터전으로 존재할 때 의미가 커져요.
고은 그런가. 이승만의 일시 방미 중 단정(單政)을 슬쩍 말하고 국내 활동 중 정읍 집회에서 그것을 공공연히 다지는 것과 김구의 단정 불가라는 분단의 배격이야말로 역사와 현실이라는 심한 불화를 드러내지. 이런 해방시기 3년은 결국 정당 난립과 각축의 연장선상에서 찬탁, 반탁(反託)의 격동과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로 이어지는 암살과 테러로 세상은 흉흉한 날들이었어. 결코 옛날을 바라볼 수 없었어. 여기에다 좌익의 도전으로 인한 지하화와 야산대 등의 유격대 출몰은 남한 산악지대를 ‘낮은 대한민국, 밤은 인민공화국’으로 연출하는 불안이 만연했어.
김형수 그것이 결국 전쟁으로 가는 뼈아픈 여정이었습니다.
고은 이런 판인데 해방 다음해의 콜레라야말로 그동안의 모듬모듬이라는 자연부락, 오순도순이라는 농경사회의 두레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현실을 드러내고 말았지. 저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버린 흑사병보다야 훨씬 덜한 것이지만 호열자라는 낯선 수인성 전염병은 정치문제 식량문제와 함께 전국적인 공황 상태를 일으켰어. 우리 마을에서도 하루에 한 사람 이상 죽어나갔는데 환자 발생의 집을 고립시키고 그 집에서 쓸 식수도 마을 머슴이 우물에서 길어다가 집 앞에 놓아주었고 그 집에서는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올 수 없게 금줄을 쳤지. 그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서로 적대되어 말도 나누지 않는 지경이 되었어. 오랜 공동체는 실상 거품이고 그 밑창의 사나운 눈길의 원시 이기주의가 앙상하게 드러났지.
김형수 문제의 전염병이 여기서 등장하네요. 언젠가 선생님이 문명의 야만스러움을 목격했던…, 아니 이건 중요하니 미학을 말씀하실 때 다시 듣고 싶습니다.
고은 이와 함께 마을마다 좌익과 우익으로 양분됨으로써 하루아침에 백년원수의 사이로 악화되어 품앗이나 왕래가 끊어졌어. 살의가 번뜩였지. 인류학자들은 원시인종으로서 인류가 식인원인(食人猿人)이었다는 사실이나 걸핏하면 인간이 인간을 죽임으로써 몽둥이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두고 위로를 삼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 마을에서의 인간의 비인간화는 급성 이데올로기와 돌발의 전염병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실종되었어. 8·15의 ‘동포여!’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아가리를 벌린 사나운 승냥이로 부끄러운 호칭이 되었어. 동네 사람이 무섭게 되면 그 동네는 이미 동네가 아니지.
김형수 해방전후사는 우리가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그것들이 이후의 운명에 어떻게 동참하는지 끝없이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2012년의 뉴스를 보다가도 그 시절의 생채기 때문에 숨통이 막히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쉽게 할 말은 아니지만 분단 스트레스는 정말 신물이 나요. 이런 걸 고민하지 않고 정치를 하겠다고 뛰어드는 사람들도 얼마나 얄미운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