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49) 형! 나 떠나야겠어. 나는 고향이 죽어라고 싫어. 고향은 선지피야

라라와복래 2012. 9. 4. 12:05

[고은과의 대화](49) 양 세기의 달빛

형! 나 떠나야겠어. 나는 고향이 죽어라고 싫어. 고향은 선지피야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얼마 전 올림픽에서 한·일전 축구를 보다가 마주친 문제가 있습니다. 극적인 승전보의 쾌감 속에 유독 강조되는 단어가 선수 전원에게 부여되는 ‘병역 면제’라는 것이었어요. 한국 선수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군 면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 참 당혹스러웠습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 스마트 기기들과 쏟아지는 금메달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이 여전히 ‘유보된 전쟁’ 속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1950년에 시작해서 아직도 끝나지 않는 긴 전쟁, 그 속수무책의 체제 갈등 안에 내화되어 있는 삶이 바로 우리들의 생애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피란 이야기까지 하셨어요.

고은 1951년 봄, 서울은 두 번째로 수복되었어. 6·25는 처음에는 남과 북의 전쟁이었으나 곧 북한과 한·미의 전쟁이자 끝내 맥아더와 중국 펑더화이(彭德懷)의 전쟁으로 되는 동안 두 번의 남하와 한 번의 북진이 있게 되었지. 서울은 한반도 남부의 산야를 대표한 폐허가 되었는데 이에 질세라 평양도 미 공군의 융단폭격으로 대동문 따위와 일제강점기 근대 건축물 몇 개만 남고 잿더미였어. 서울 명동에 억새 떼가 우거지고 취객들이 방뇨하기에 좋은 명아주 풀섶이 여기저기 생겨났지. 미국의 배려로 천주교 건물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남아서 그 뒤 송민도의 노래 ‘성당의 종소리’ 운운의 비감이 감돌았지.

김형수 땅 한 평에 1억원이 넘는다는 쇼핑천국 명동이 억세 떼와 명아주 풀섶으로 뒤덮여 있던 1950년대의 그곳이라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죽은 사람들에게’라는 시가 그래서 태어난 거죠?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 6·25 당시 10대 후반 갓 20대를 일러서 1950년대라 하지. 나도 이 세대에 자연 편성되기 마련인데 이 1950년대는 남북의 한 또래 절반 가까이가 남의 학도병, 북의 10대 인민군 따위의 전선과 후방에서 소모품으로 생명력이 중단되어 버리지. 바로 그런 한계 상황에서 살아남은 우리를 세상은 잡초의 생명력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더군. 반은 찬양이고 반은 조롱인지 몰라. 그러니까 산야가 초토이고 도시들이 폐허인 그 당신의 환경 감각은 바로 인간의 실존에도 이입되어 정신으로서의 폐허이거나 잡초로서의 삶이거나 한 셈이지.

 

김형수 실존을 가운데 두고 정치적 구도로 펼쳐지는 전쟁과 폐허를 내면화하는 자아가 ‘지금 이곳’의 실감일 수밖에 없던 1950년대와 상품 소비를 중심으로 구조화된 21세기적 실존, 저는 사실 어느 쪽이 더 절망스러운 것인지 모르겠어요. 절망도 주검도 질문도 가능하지 않는 투명한 폐허와 폐허의 실체를 감각으로 확인하던 시대 양쪽에 투영되는 상황들이 말입니다.

고은 나는 다섯 시간 넘게 선유도에서 4마력짜리 작은 통통배를 타고 다른 임시 승객 2~3인과 함께 군산항 째보선창에 내렸어. 몇 달 동안의 섬으로부터 육지의 낯선 자로 발 디딘 것이지. 항구 전체에는 원주민보다 피란민이나 신참 주거자들이 훨씬 더 눈에 띄는 분위기였어. 본래 원주민이란 현상이기보다 개념 아닌가. 식민지 시대에도 본디 살던 조선인은 산등성이 모듬살이로 쫓겨 가고 도시 복판이나 요지는 일본인의 거동이 대세였지. 원주민이란 극소수의 그늘진 오만으로 응결되는 것 말고는 지하화되지.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런 오만의 기회도 없이 모든 것을 강탈당하지만 말이네. 영화 <아프리카의 전설>인가를 보아도 현지 원주민은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의 철저한 소도구밖에 무엇이던가.

김형수 근거지가 깨어져 유민이 된 사람들과 오래된 공동체의 미덕을 피란민들에게 해체당하는 이들의 낯선 뒤섞임이 시작된 셈이군요.

고은 군산 뒷골목에는 평양냉면집이 많이 들어섰더군. 바라크 냉면집도 많았어. 그 이전에는 없던 음식점이었어. 중국 짜장면집 몇 군데와 좀 두툼한 비프스테이크를 과시하던 양식당 하나둘 말고는 거의 전부가 토종식당이기 마련인데 피란민이 평양과 해서 일대에서 떠나온 그네들 조상의 기일(忌日)과 자신들의 생일 그리고 그네들의 긍지이기도 한 냉면 요리를 가져왔어. 추운 날에도 쩔쩔 끓는 바라크 부뚜막 언저리에서 차디찬 이빨 시린 냉면을 후루룩 넘기는 그 인상적인 음식이 군산 일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지.

김형수 평양냉면의 군산 정착기라고 해야 될까요? 음식조차 풍습과 발생학적 계통을 잃고 마는 것이 전쟁인가 봅니다.

고은 나는 그 당시는 냉면에 다가가지 못했는데 20년 뒤쯤에나 그것이 입에 닿기 시작했어. 그런데 함흥냉면이란 매운 비빔요리도 썩 좋아하는데 리영희 형은 철저하게 평양냉면밖에는 이른바 함흥냉면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았지. 지금이야 냉면이 한반도 전역 넘어서 서구인들의 식생활에도 포함될 만하지만 그 커다란 놋대접 안에 풍성하게 담긴 냉면 사리의 국량은 북한 지역의 헌걸찬 기상을 엿보게 하지. 함석헌 옹은 두 그릇도 뚝딱하고 천관우도 두 그릇을 얼른 비우더군.

김형수 리영희, 함석헌, 천관우 선생 같은 지난 세기의 대가들이 냉면의 디테일 위에서 친근하게 되살아나네요.

고은 음식이란 인간에게 제1의 생존 조건이지. 한국인에게 제도적 ‘가족’이라는 명사보다 ‘식구’라는 본능적인 명사의 실감이 얼마나 지극한가. 먹어야 혼이 생기고 먹어야 역사가 생기고 먹은 이후에야 사랑이라는 것도 시작할 수 있지 않는가. 이런 내 소박한 유물론이야말로 내 유신론의 자궁이라네. 이런 점에서 나는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것을 식후경의 놀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네. 사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따위의 서구철학 주류의 이념이란 진작 해체되어 마땅한 것이지. 이 점에서 근대는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 아직 새로운 시대가 아니기도 해. 굶주림이란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모독 아닌가. 인류 전체와 자연 전체의 식욕 차별이야말로 영원한 유죄라 하겠네.

김형수 생산과 소비의 결핍이 문제가 아니라 과잉이 문제라는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자본시장의 막다른 골목에 이른 금세기의 딜레마가 여기에서 기인하니까요.

고은 내가 돌아온 고향은 이전의 단순한 취락사회가 아니라 새로 시작해야 할 혼합과 혼잡의 사회가 되어 있었어. 내가 살아야 할 ‘1950년대’의 한 명제이기도 한 바, 무엇이 없어지고 무엇이 태어나는 영(零)의 시대라는 의식에서 그 영이란 개념은 무엇과 무엇의 복합으로만 체험되는 모순이기도 하지. 요컨대 삶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질덤벙해졌어. 길도 제멋대로 생겨나 새끼 쳐 있더군. 공식보다 비공식이 훨씬 당당했어. 따라서 1만5000년 이상 다져온 농경사회의 순박한 얼굴에 경계색과 보호색이 알록달록 칠해지더군. 이미 좌우익의 학살에 직면한 극한상태에 이런 이질 현상이 더해졌을 때 그것은 고향의 의미에 담겨 있는 처녀지의 상실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김형수 전쟁의 폐허와 함께 시작된 본격적인 의미의 근대 패러다임 안에 ‘어질덤벙’한 탈근대의 혼돈이 잉태되고 있었군요. 자신이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근거로서의 ‘처녀지’도 불가능해졌고요.

고은 집에 온 나는 할아버지와 어머니, 아우에게 어떤 가책이 일어났어. 종족 보존이라는 어이없는 관념이 장남인 아버지와 장손인 나만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 떠나보낸 뒤 만약 다시 인공 시대가 와 잔존 식구가 참상을 당했다고 가정할 때 어떻게 우리가 종족의 한 종자로만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김형수 1980년 5·18 직후 저 역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통렬하게 겪었습니다. 자아를 확인하는 일이 통증 그 자체이거나 자기 부정의 죄책감으로 이어지던 시기를요. 문청 시기의 그 지독한 분노와 증오, 허무를 달랠 무렵 선생님의 시집 <피안감성>이나 <부할>은 하나의 신화나 출구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고은 나는 다시 떠날 공상에 버릇 들기 시작했어. 할아버지와 한 방에서 자기 싫어서 어디론가 피란 갔다 돌아온 마을 선배 김기호와 자주 함께 지냈어. 내가 선유도에서 거의 날마다 긴 파지 묶음에 무엇인가를 써내려갔던 그것을 보였더니 기호도 그동안 무엇인가를 써온 잡기장을 보여주었어. 그래서 우리 둘은 시의 동료가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으므로 그의 호는 효성(曉星)이고 나의 호는 호성(湖星)이 되어 ‘효성 형!’ 하고 부르면 그가 나를 ‘호성!’ 하고 화답했지. 어떤 간섭도 인정도 없이 둘은 감히 시인 노릇을 한 셈이었지.

김형수 전통과 금기 양쪽을 다 거부하던 문청의 딜레탕트가 ‘세계’ 밖으로 뛰쳐나가게 되었군요. 중심으로 끝없이 기어오르려는 근대의 집중이 아니라 한없이 밖의 새로운 영토로 역동하는 주변부의 갈망은 고스란히 저희 세대의 것이기도 합니다.

고은 물론 이런 놀이는 둘이 담배 잎새 말린 것을 종이에 말아 피우는 담배연기 속에서 특별한 비밀이었어. 어느 날 밤 나는 자다 깨어서 빈속에 담배연기를 깊숙이 채운 나머지 부르짖었어. ‘효성 형! 나 떠나야겠어. 나는 고향산천이 죽어라고 싫어! 고향은 선지피야! 고향은 무덤이야!’ 그러자 기호도 방바닥을 탁 치며 즉각 응수했어. ‘호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은태야, 나도 그렇다. 우선 군산 가자. 군산 월명동이나 금서동에 내가 집을 얻어 놓겠다.’ 둘은 솜이불을 걷어차고 얼싸안았지. 다행히 기호의 아우 기창은 깊이 잠이 들어 있었어. 기호네는 홀어머니와 누이가 학살당한 우익 유가족이고 마을의 선산 김씨 지주의 종손이었으나 그의 네 숙부들의 유산에 대한 긴장 때문에 실제로는 혈족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여서 그런 아픔과 외로움이 겹친 신세여서 나와의 친밀한 문학 취미에 더 빠졌을지 모르지. 하지만 나는 10리 밖의 군산이 목적지가 아니었어. 내 목적지는 추상이어서 하늘인지 구름인지 모르는 고향으로부터의 원거리 어느 곳이었지.

김형수 근거지의 혈연적 중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지상 위의 특정한 거처로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먼 곳’의 지향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어린 나그네>나 <화엄경>의 그 막막한 여정이 떠오릅니다.

고은 ‘아, 잠 안 오는 밤 뱃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겠어’라는 내 기대는 그 기대 밖의 다른 곳이었지. 나는 1950년 겨울 학살과 보복학살의 현장에서, 한 고을도 아닌 한 면의 몇 개 부락만으로도 피살자가 일백수십 명에 이르는 현장에서 이미 인간성이라든가 핏줄이나 고향 따위의 전래 가치들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고 여기게 되었어. 그러므로 1951년 1·4후퇴에 앞서서 두 번의 가출이 있었는데 그 가출은 아직 50km 바깥으로는 진출하지 못하고 그때마다 아버지의 집념에 의해서 다시 붙들려 집으로 오곤 했지. 집의 끝 방에 나를 가두어 두고 문에 널짝을 대고 못 박았는데 끼니때마다 어머니가 퇴창 구멍 달린 것을 열고 밥과 반찬을 넣어 주는 집안 감옥살이를 했어. 아버지의 화가 풀리고 삼촌이나 기호의 중재로 10일이 지나서야 문이 열리기도 했어. 그런데 1년 뒤의 세 번째 가출이 제대로 된 출가가 된 셈인데 그 사이 또 여러 고비가 이어졌어.

김형수 어떻게 해도 해명이 안 되는 폭력의 무자비함과 무의미 앞에서 오직 길 떠남만이 길이 되는 역설을 근친의 혐오 안에 놓여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염려만으로 가로막을 수는 없었겠지요. 다만 선생님의 가출과 출가라는 말씀에서 느껴지는 탈출과 모험의 긴장이 요즘 세대들에겐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로벌한 환경이라고 하지만 아예 ‘먼 곳’이라는 바깥이 사라져 버린 세기를 살아가는 것이 21세기의 청춘들 같아요.

고은 마침 중공군이 서울지역 전선에서 밀려나 오늘날의 휴전선 언저리에서 국군과 유엔군에 대치되고 있을 때 군산항에는 미 육군 제21항만사령부가 들어서고 군산 공군기지의 K-8기지와 군산항 전체가 미군 관할 구역이 되었는데 거기에 먼 일가붙이인 고려대 영문과 출신인 고예환이 운수과 전속 통역이었고 그 사람의 소개로 나는 그 운수과 항만 체커가 될 수 있었어. 아버지가 아들을 가출 방지책으로 고향에 붙들어두는 일터인 셈이지.

김형수 첫 일터부터 미군이라는 이방인들과 만난 거네요.

고은 미군 항만 수송기지로 쉴 새 없이 일본 상선이나 이탈리아, 그리스 상선과 미 군함의 기항(寄港)으로 무기와 자동차 등 군수물자가 부두 다섯 개를 통해서 내려졌어. 일본 상선은 6000t급의 석탄 배이거나 미 군용트럭, 지프 그리고 탱크 등을 실어 날랐어. 그리고 미 해군함정 LST는 병력과 중화학무기도 실어 날랐지. 1만t급 이상의 배는 항구 밖에 정박시켜 수송선으로 화물을 날랐지. 주야반의 조선인 하역작업 노동자들은 미국 당국과 계약을 마친 제1운수를 통해 투입되고 있어서 낮의 점심때와 밤 자정의 야식 때 말고는 영내 철조망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어. 미 헌병대의 순찰은 삼엄했지. 철조망을 넘어서 영내 물품을 훔쳐 나르던 사람이 총살당한 적도 있었어.

김형수 선생님의 개인적 체험 안에 들어서는 근대의 풍경이 무척 놀랍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근대적 동경이 하루에 한두 번 신작로의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던 버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황지우 시인의 글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는데, 선생님의 근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수물자의 막대한 위용 속에서 출발된 셈이니 20년의 편차를 두고 선후가 뒤바뀐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전투기, 탱크, 6000t급의 수송선, 군용트럭과 지프, LST 함정 등 압도적인 근대 기제들을 10대 후반에 경험하셨네요. 그것도 미군들과 같은 공간에서 말입니다.

고은 그 당시 나는 주간 근무로 정박 중인 외국 선박에 올라가 물량을 파악하거나 화차에 실릴 때 일일보고서를 기록하거나 했어. 자주 운수과 주임인 미군 대위와 그 밑의 선임하사와 함께 현장점검도 했어. 중학교 4학년 영어교과서의 영어로 그 품격 없는 군대영어의 현장을 견뎌낸 것이지. 사령부 영내에는 천막극장도 있어서 거기서 빅터 머추어와 수전 헤이워드의 <삼손과 데릴라>도 보았지. 또 사령부 장교 휴게실에서 생전 처음으로 커피를 1ℓ나 마시고 실신해서 영내 야전 병원에 응급 수송되어 눕혀진 적도 있었다네.

김형수 통역, 영어, <삼손과 데릴라>, 커피, 선생님의 전쟁에 대한 기억 못지않게 이질적인 문화적 체험이 10대 후반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입산’ 이전에 근대전의 첨단을 일상으로 겪게 된 선생님에게 ‘먼 곳’이란 과연 존재하는 실물감의 세계를 넘어서는 문제였을 것 같습니다.

고은 주야간 근무를 하는 동안 그동안 가능한 한 출생지로부터 멀리 떠나려던 그 이향(離鄕)의 욕구가 억눌린 나머지인지 불면증이 생겨났지. 한밤중 오직 100촉짜리 백열등의 가로등만이 여기저기 비치는 부두 일대와 부두 아래의 밀물 일대의 비정한 공간 안에서 자주 죽음의 이미지가 엄습했네. 아니 내가 어렵게 잠이 들었을 때의 꿈속에서도 나는 죽어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 더구나 고향에서의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아온 김봉태나 누구나 이미 피살자로 죽었는데도 그들이 나를 찾아오는 꿈이 몇 차례 되풀이되기도 했어.

김형수 세상이 참혹하게 느껴집니다. 샤먼의 영매처럼 접신된 상태가 지속되면서 거듭 죽음을 체감하신 거네요. 근대적 자아니 주체니 하는 말이나 개념 따위로는 도무지 수렴될 수 없는 중층적인 ‘생’의 감각 속에서 죽은 자들과의 만남을 반복하신 겁니다.

고은 1951년 여름이면 전쟁 1주년이 되는 시기였어. 이때 유엔군 사령관 리치웨이는 이 전쟁이 단지 종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중공군 펑더화이나 린뱌오(林彪)도 그들의 총력전이던 1차, 2차 층계공격의 인산인해적 병력 손실로도 유엔군을 퇴각시킬 수 없는 현상을 숙지함으로써 그해 7월 개성에서의 정전회담을 열었어. 북쪽의 장소 변경으로 가을에 들어서서 판문점 회담으로 본격화되는데 이 정전회담 자체가 한층 더 치열한 전투 배가를 독려하는 회담이었지. 한국전쟁의 절정은 바로 이 정전회담 기간에 만들어지지. 크게 보아 인류사로서의 전쟁사는 필경 기원전 3만5000년인데 전쟁 행위란 인간성의 길고 긴 표현인가 보네. 크레마뇽인의 전쟁 중독이 한반도에서의 열전에도 이어진 것 아닌가.

김형수 학살과 보복학살이 반복되는 전쟁 속에서 인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면 이런 절망을 안고 생을 지속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참으로 긴 악몽일 것 같습니다. 발칸 반도나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지구촌의 수많은 분쟁지역에서 계속되는 살육이 우리의 ‘1950년대’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판문점, 유엔군, 정전회담 등의 용어들이 진행 중인 의미로 작동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전쟁의 기억은 결코 낡은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출처 : 경향신문 2012.08.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41852355&code=210100&s_code=af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