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노루목 - 한승오

라라와복래 2012. 9. 25. 12:02

 

노루목

_한승오

벼이삭 누렇게 출렁대는 가을.

저 너머 콩잎을 찾아 고라니가 논을 밟고 오간다.

어제 남긴 발자국 그 자리에 또 오늘의 발자국을 남기고.

어제와 똑같은 길을 맹목으로 고집하는 내일의 사람처럼.

발갛게 석양을 잠재운 지평선이 논 위에

가만히 내려앉은 저녁.

불쑥 고라니 한 마리가 논 속 평화로운

수평을 뚫고 용수철처럼 솟구친다.

길 잃고 허둥대는 발걸음이 벼를

짓밟고 혼란스럽게 산을 향해 달린다.

길 아닌 두려움에 선 인생처럼. 

막 떠난 고라니의 자리.

벼 포기 얼기설기 깔아 만든 하룻밤 잠자리.

야생의 고린내가 훅 다가온다.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는 저 먼 냄새.

도무지 멀리할 수 없는 이 가까운 냄새.

삶의 도정에 남겨놓은 내 치부처럼.

호기심의 첫걸음이 내딛은 길을 따라

딱딱한 길로 굳어버린 습성.

노루목.

고라니는 이 길을 다시 오리라.

죽음마저 불사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인생의 노루목을 되새김질하는 나의 발걸음처럼.

출전: <삼킨 꿈>(강)

 

앞부분은 시각적이고 뒷부분은 후각적이다. 어쩜 이리 생생할까! <시튼 동물기>나 <파브르 곤충기>를 읽던 어린 시절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노루목’이 실린 책 <삼킨 꿈>은 전편이 시인의 심성, 시인의 정신, 시인의 발성으로 점철돼 있다. 정영목은 발문에 이리 적었다.

‘H는 경험이 쌀알처럼 딴딴하게 응결된 다음에야 일 년에 한 번 쌀 보내주듯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삼킨 꿈>은 ‘경험이 쌀알처럼 딴딴하게’ 익은 글들을 묶은 책이다. 뉘 한 톨 찾아보기 힘들게 정제되기까지 한 이 글들이 어떻게 시가 아니란 말인가? 책장에 딱 부러지게 ‘시집’이란 패찰을 달지 않은 것이 불만스럽고, 좀 뒤숭숭하기도 해서 하는 말이다.

고라니의 고린내! 재치 있기도 하지. ‘막 떠난 고라니의 자리’에서 훅 끼치는 ‘야생의 고린내’라니, 산뜻하기도 하지!

시인과 농부를 한목에 구현하고 있는 한승오의 앞서 낸 책들도 얼른 구해 읽고 싶다.

부기: 고라니가 노루였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기쁨으로 설레며 국어사전을 뒤져 확인해 봤다. 노루는 수컷에 뿔이 있고, 고라니는 노루와 비슷한데 암수 모두 뿔이 없단다. 고라니와 노루가 같은 동물이 아닌 것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그나저나 꼭 한쪽에만 뿔이 있어야 한다면, 고라니가 더 뿔 있을 것 같은 이름 아닌가? ‘노루’가 더 머리통이 매끈할 듯 들리지 않나?

문학집배원 황인숙

 

한승오 1960년 부산 출생. 산문집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 <몸살>, 산문시집(혹은 시적 산문집) <삼킨 꿈>이 있음. 현재 시골에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음.

낭송_ 박웅선  배우. 연극 <오셀로>, 영화 <한반도> 등에 출연.

캐리커처_ 박종신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음악_ Digital Juice BackTra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