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
_한승오
벼이삭 누렇게 출렁대는 가을.
저 너머 콩잎을 찾아 고라니가 논을 밟고 오간다.
어제 남긴 발자국 그 자리에 또 오늘의 발자국을 남기고.
어제와 똑같은 길을 맹목으로 고집하는 내일의 사람처럼.
발갛게 석양을 잠재운 지평선이 논 위에
가만히 내려앉은 저녁.
불쑥 고라니 한 마리가 논 속 평화로운
수평을 뚫고 용수철처럼 솟구친다.
길 잃고 허둥대는 발걸음이 벼를
짓밟고 혼란스럽게 산을 향해 달린다.
길 아닌 두려움에 선 인생처럼.
막 떠난 고라니의 자리.
벼 포기 얼기설기 깔아 만든 하룻밤 잠자리.
야생의 고린내가 훅 다가온다.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는 저 먼 냄새.
도무지 멀리할 수 없는 이 가까운 냄새.
삶의 도정에 남겨놓은 내 치부처럼.
호기심의 첫걸음이 내딛은 길을 따라
딱딱한 길로 굳어버린 습성.
노루목.
고라니는 이 길을 다시 오리라.
죽음마저 불사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인생의 노루목을 되새김질하는 나의 발걸음처럼.
출전: <삼킨 꿈>(강)
앞부분은 시각적이고 뒷부분은 후각적이다. 어쩜 이리 생생할까! <시튼 동물기>나 <파브르 곤충기>를 읽던 어린 시절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노루목’이 실린 책 <삼킨 꿈>은 전편이 시인의 심성, 시인의 정신, 시인의 발성으로 점철돼 있다. 정영목은 발문에 이리 적었다.
‘H는 경험이 쌀알처럼 딴딴하게 응결된 다음에야 일 년에 한 번 쌀 보내주듯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삼킨 꿈>은 ‘경험이 쌀알처럼 딴딴하게’ 익은 글들을 묶은 책이다. 뉘 한 톨 찾아보기 힘들게 정제되기까지 한 이 글들이 어떻게 시가 아니란 말인가? 책장에 딱 부러지게 ‘시집’이란 패찰을 달지 않은 것이 불만스럽고, 좀 뒤숭숭하기도 해서 하는 말이다.
고라니의 고린내! 재치 있기도 하지. ‘막 떠난 고라니의 자리’에서 훅 끼치는 ‘야생의 고린내’라니, 산뜻하기도 하지!
시인과 농부를 한목에 구현하고 있는 한승오의 앞서 낸 책들도 얼른 구해 읽고 싶다.
부기: 고라니가 노루였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기쁨으로 설레며 국어사전을 뒤져 확인해 봤다. 노루는 수컷에 뿔이 있고, 고라니는 노루와 비슷한데 암수 모두 뿔이 없단다. 고라니와 노루가 같은 동물이 아닌 것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그나저나 꼭 한쪽에만 뿔이 있어야 한다면, 고라니가 더 뿔 있을 것 같은 이름 아닌가? ‘노루’가 더 머리통이 매끈할 듯 들리지 않나?
문학집배원 황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