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경향신문 2009년 11월 30일자 23(문화)면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월요 文化人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소설 ‘만다라’ 작가 김성동
“역사와 접신한 듯… 그 속에 푹 빠져 삽니다”
비사란야(非寺蘭若ㆍ절 아닌 절)가 쓰여 있는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선 소설가 김성동씨
경기도 양평의 한 산골. 택시 한 대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길을 따라 산을 올라갔다. 법화사라는 절 앞에 섰다. 길의 끝이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눈앞에는 4차로는 됨직한 길이 휑한 노면을 드러낸 채 고갯마루까지 펼쳐졌다. 눈앞의 살풍경에 당혹해하고 있을 때 백발 남성이 나타났다. 소설가 김성동씨(62). 그는 ‘무섭고 슬픈 이야기’라고 했다.
“이 산속에 온 것은 8년 전이여. 근데 3년 전, 어떤 소리 때문에 참선을 계속할 수 없어 나와 봤지요. 굴착기였어요. 땅을 찢어발기는 소리로 길을 넓히고 있더군요. 근처에 무슨 커다란 공장이나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윽한 산길을 왜 넓힌답니까. 이런 산은 차 다니는 길이 뚫리는 순간 절단나는겨.”
길은 ‘우벚고개’를 넘어 원주 방면으로 이어진다. 당시 각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벌였던 개발사업들 중의 하나다. 1907년 2차 의병전쟁 때 의병들이 숨어들었던 유서 깊은 이 고개는 그렇게 속절없이 깎여나갔다.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그 길옆에 선생의 집이 위태위태하게 서 있다. ‘비사란야’(非寺蘭若ㆍ절 아닌 절)라는 팻말이 붙은 이 집에서 그는 88세 노모와 살고 있었다. 온 방 안이 책들로 가득했다. ‘조선말 큰사전’에서부터, 조선왕조실록 전집, <흠정만주원류고>와 같은 고대 사서들, 그리고 각종 잡지들….
소설 <만다라>의 작가로 해외에도 소개되고 있는 그는 요즘 역사에 관심이 많다.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에서부터 고려사, 고대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료를 찾아 글을 쓰고 있다.
조선공산당 운동 그린 ‘현대사아리랑’ 원고지 2600장 신들린 듯 한 달 만에 써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톺아본 <현대사아리랑>(근간)은 그가 평생 하고 싶었던 작업이다. 2600장 원고를 한 달 만에 쓰느라 오른쪽 손목뼈가 다 휘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하지 않는 그는 지금도 원고지에 세로쓰기를 고집한다.
“ ‘현대사아리랑’을 쓰는 동안 마치 접신(接神)한 것 같았어요. 이 시기는 바로 비명(非命)에 가신 내 아버지의 시대이기 때문이죠.”
독립운동을 했던 그의 선친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다 대전형무소에 갇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이승만 정부가 사상범을 대거 처단하는 와중에 숨졌다. 당시 대덕 인근에서 6000~8000명이 수일에 걸쳐 처형돼 아직도 아버지 시신의 위치와 제삿날을 모른다. 네 살배기 김성동은 할아버지 무릎에서 한문을 배우며 자랐다. 조부는 “이 세상 근심은 책을 읽는 데서 시작되니 글 읽기를 그치면 근심이 없다(讀書之有患之始 絶學無憂)”고 하면서도 글을 가르쳤다.
“10살 전에 배운 것은 커서도 잊혀지지 않는 법이죠. 그 덕에 쓴 <김성동 천자문>으로 이 집도 샀고요.”
아버지의 전력은 그의 일생을 규정했다. 연좌제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요즘도 이사할 때마다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사복 입은 사람들”이 와서 그의 동향을 훔쳐보고 가는데, 예전엔 오죽했을까. 고교 중퇴 후 출가한 것이나, 산중에 묻혀 글을 쓰는 것이나 그의 삶은 어쩌면 선대로부터 넘겨받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비범한 죽음은 아버지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조 마지막 과거에 진사 급제한 증조부 김창규는 한일합방 때 곡기를 끊고 생을 마쳤다. 중시조인 선원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 당시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폭했다.
“왜 사람들은 죽이고 죽임을 당하느냐, 어릴 때부터 품었던 화두입니다. 결국 출가까지 했고, 지금은 역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한민족의 영역 한반도로 가두려는 사학자들 탓에 우리 의식 오그라들어”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민족의 영역을 한반도에 가두려는 강단 사학자들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직접 사료를 뒤적여 탈고한 글이 <화교가 되어버린 대륙 백제 사람들>(근간)이다.
“반도에서 백제가 망한 뒤에도 백제는 대륙에서 존속했습니다. 원 제국에 대해 계속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대륙 백제를 상정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해요. 대륙 백제인들은 산둥반도에서 해상무역을 했는데, 명 주원장이 들어서며 폈던 해금(海禁) 정책에 맞서 왜구가 됐습니다. 왜구 가운데 일본인은 30% 정도이고, 대륙 백제 후예가 70%였어요. 이들이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주원장에게 덤볐던 거죠.”
대륙 백제인들 대부분은 동남아로 내려가 지금의 화교가 됐고, 일부가 한반도와 일본으로 갔는데 그중 한반도로 온 이들은 최영 장군 휘하에서 명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력 발휘도 하지 못하고 좌절했다.
“사학자들은 우리 강역이 몇 천 년 전부터 반도 안에만 있다고 써왔고, 사람들의 의식마저 그렇게 오그라들었어요.”
그는 이번 책이 강단 사학자들에게 무시당할 것을 안다. 하지만 알고도 쓰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 작가이다.
“가짜 중학교(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고교를 중퇴한” 그에게 이른바 ‘증’(證)이 없다. 출가했을 때에도 승적을 만들지 않았다. “중질 하는데 무슨 증이 필요하냐”는 생각이었다. 조계종은 그의 등단작이자 후에 <만다라>의 원형이 된 단편 <목탁조>가 불교를 비방했다며 만들지도 않은 그의 승적을 1975년 박탈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놓고 싶지 않은 증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증’이다. 그는 허리가 잘린 이 산 생활을 접고 조만간 강화도로 옮길 생각이다. “선조의 이름을 딴 그곳(선원면)에 가서 문화유산해설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허허로운 웃음이 지금도 귓전을 울린다.
[글ㆍ사진 손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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