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아주 짧은 초상화] 서쪽 하늘 - 한승오/농부

라라와복래 2012. 9. 28. 15:40

 

[아주 짧은 초상화]

서쪽 하늘

한승오 | 농부

때 아닌 가을 태풍이 논밭과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다음날, 곱슬곱슬한 라면 파마머리를 하고 연분홍빛 바지에 하얀 블라우스를 곱게 받쳐 입은 천북댁이 굽은 허리를 대나무 지팡이에 의지하고 교회를 향한다. 그 뒤를 작년에 시집온 며느리가 노란 물방울무늬 치마에 하얀 셔츠를 입고 따른다. 멀리 고개 너머로 설핏 보이는 자그마한 교회 십자가가 아득히 새파란 가을 하늘 때문인지 더욱 붉다.

천북댁, 그녀는 천북의 조그만 포구 마을에서 이곳 장곡마을로 멀리 시집을 왔다. 당시 그녀의 친척은 이 마을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 집안을 아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천북의 갯가에서 왔다는 사실만이 그녀의 전부였다. 마을사람들은 시집온 첫날부터 그녀를 천북댁이라고 불렀다.

천북댁의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 술병을 끼고 살다가 마흔 살을 채 넘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천북댁에게 남긴 것은 술빚뿐이었다. 그때부터 천북댁은 두 딸과 아들을 혼자서 키웠다.

천북댁의 입에서 출가한 딸들 이야기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큰딸은 어느 집 후처로 들어가 수원에서 살고 있고, 작은딸은 이혼하고 나서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는 풍문이 마을에 잠깐 나돈 적은 있었다. 아들은 소아마비 때문에 왼쪽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논밭 한 뙈기 없던 천북댁은 남의 집 땅을 얻어 그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일궈낸 농사는 닷 마지기 논과 서너 마지기 밭으로 남았다.

 

사십 줄을 훌쩍 넘어서까지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던 아들 종수가 베트남 여자를 집에 데리고 들어온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국제결혼 브로커를 통한 결혼이었다. 그때 천북댁은 급히 집 앞 밭을 팔았다.

여자의 고향은 호찌민 시에서 남쪽으로 다섯 시간은 족히 가야 하는 바닷가 마을이라 했고, 이름은 탐티엣이라고 했다. 아들이 여자 이름을 몇 번씩이나 계속 불러주었지만 천북댁의 귀에는 탐이라는 소리만 들렸다. 천북댁은 그녀를 타미라고 불렀다. 타미는 얼굴이 작고 동그랬고 눈이 컸다. 몸집은 작고 말랐는데 손매는 야무져보였다. 이제 갓 스물의 나이. 장곡마을에 시집온 그때 천북댁의 나이와 똑같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천북댁의 머리를 맴돌았다.

지난 봄, 며느리 타미에게 태기가 보일 무렵이었다. 종수는 오랫동안 뜸을 들여온 듯, 아주 힘겹게 운을 뗐다.

“엄마 … 땅을 마저 팔면 안 될까?”

“종수야, 그게 무슨 말이니? 땅 없이 어떻게 살려고.”

“엄마도 늙어가고 … 내가 이 몸을 가지고 농사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도 없고. 딴 일을 찾아봐야 할 거 같아.”

“어떤 일?”

천북댁은 아들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초조와 기대에 흔들리고 있는 아들의 눈을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마침 영호 형이 식당을 같이 해보자고 그러네. 베트남 쌀국수집 같은 거 읍내에 차리면 잘될 거라고. 게다가 타미도 있으니까 제격일 거라고.”

영호는 어릴 때 거의 매일 종수의 책가방을 들어주던 동네 아이였다. 학교 가는 길에 종수가 힘들어하면 업어주기까지 했던 아이였다. 믿을 만한 아이였다.

하지만 땅을 돈으로 바꾸면 땅도 없어지고 결국 돈마저 없어진다는 것을 천북댁은 몸으로 안다. 그렇다고 자신의 손아귀 안에 무한정 쥐고 있을 수 없는 게 또한 땅이었다. 이번 일이 다리 저는 아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꿈이라는 것을 천북댁은 어미의 직감으로 알았다. 천북댁은 닷 마지기 논을 팔았다.

한 달 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영호가 없어졌다. 천북댁은 그 소식을 전한 마을 사람의 입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천북댁의 귓전에는 종수를 친동생처럼 아낀다던 영호의 말이 이명처럼 쟁쟁거렸다. 가냘프게 피어오르던 아들의 마지막 꿈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날부터 열흘 동안 술만 먹던 아들은 기어이 집을 떠났다.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영호를 봤다는 한마디 소문을 좇아서.

지금껏 아들의 소식은 감감하다. 제대로 밥이나 먹고 있는지, 아니 살아 있기나 한 건지조차 알 길이 없다. 먼 바다에 나간 뒤 영영 소식이 없는 아버지처럼, 아들 종수는 천북댁의 꿈속에서나 어렴풋이 어른거릴 뿐이다.

천북댁은 한없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간다. 갯비린내가 조금씩 바람에 실려 온다. 엷은 파도소리도 나직이 들려온다. 아주 먼 시절 그러나 손에 잡힐 듯 바로 눈앞에 있는 시절, 배를 타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붉게 노을 진 서쪽바다를 바라보았던 그 언덕에 닿는다. 먼 바다를 나가는 배 한 척이 보인다. 아버지가 서 있어야 할 뱃전에 종수의 뒷모습이 흔들거린다.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을 잠재우는 하얀 수평선이 무섭도록 깨끗하다.

교회 앞에서 걸음을 멈춘 천북댁이 뒤를 돌아보았다. 타미는 조금 젖혀진 허리에 한 손을 받친 거북한 자세로 천천히 고갯길을 오르고 있다.

“힘들지 않아?”

“괜찮아요, 엄마.”

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무수히 말했지만, 타미는 천북댁을 여전히 엄마라고 부른다. 천북댁은 타미의 배를 보았다. 아들의 자식을 품은 타미의 배는 한껏 불러 있다.

“타미야, 고향이 어느 쪽이야?”

“저~기”

천북댁은 타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을 보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서 한동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서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천북댁이 가만히 타미의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다. 어린 종수의 손처럼.

교회 종탑에서 묵직한 타종소리가 퍼진다. 댕~댕~댕~.

 

[경향신문 2012.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