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이런 시야가 어디 있느냐 - 정현종

라라와복래 2013. 5. 31. 08:53

 

이런 시야가 어디 있느냐

정현종

청계산 능선을 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홀연히

눈앞이 빛 천지다!

진달래꽃 때문이다.

천지에 웃음이 가득,

이런 빛 열반이 어디 있느냐.

이런 시야(視野)가 어디 있느냐.

(모든 종교들, 이념들, 철학들

그것들이 펼쳐 보인 시야는 어떤 것인가)

이런 시야라면

우리는 한없이 꽃 피리니,

웃는 공기 웃는 물 웃는 시방(十方)과 더불어

꽃빛 빛꽃 피리니.

출전: <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

 

세상을 알면 알수록 미소와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웃음판을 키우며 살고 싶었습니다. 웃음의 분무기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또 세상을 좀 더 가보니 웃음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도 가짜가 많고 분 바른 것이 많습니다. 제가 내미는 웃음에도 때로 맘에 없는 것이 섞이고 늘고 하더라니까요, 글쎄.

꽃은 웃음 감별사입니다. 꽃 앞에 선 이의 표정, 그것이 진짜 웃음입니다. 굳이 소리 내지 않아도 웃음입니다. 장강대해와도 같은, 우주 저편으로 연결된 웃음이니 섣부른 소리 따위 날 리 없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웃음이니 온몸이 절절한 미소입니다.

고농도 산소를 마시며 걷는 능선 길에서 문득 마주치는 한 무더기의 진달래 군락. 그 컬러풀! 두 팔을 활짝 펼쳐서 놀래주려는 동작으로, 숨었다가 나타난 옛 친구…….

종교니 이념이니 철학이니 하는 게 저 친구만 하겠습니까? 시방 세계를 웃게 하는 저 꽃만 하겠습니까?

문학집배원 장석남

 

정현종 1939년 서울 출생. 1964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과 시선집으로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이 있다.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낭송 정인겸 배우. 연극 <2009 유리동물원>, <맹목> 등에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