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난초 - 이병기

라라와복래 2013. 6. 25. 09:16

 

난초

이병기

1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冊)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출전: <난초>(미래사)

 

봄꽃으로는 아마도 마지막 차례로 개량종 철쭉이 그 화려한 빛깔을 뽐내다가 막 떨어졌습니다. 꽃 곁에 앉았습니다. 꽃 곁에 앉으면 잠시나마 이 ‘가죽 자루’도 식물성이 된 듯합니다. 꽃의 오고 감, 그 빛깔과 향기로 싣고 오고 싣고 간 뜻이 무엇인지…… 앉아 있어봅니다.

가람 선생. 뵌 적 없고 그 생가 한번 찾아가본 적 없으나 왠지 나의 할아버지나 되는 듯한 분. 그분의 덤덤하기 그지없는 일기장를 넘겨보면서 ‘그렇지, 그렇지, 그럴 뿐이지’ 하며 혼잣말을 했었지요. 대가란 과연 몇 겹은 벗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시끄럽디 시끄러운 세상입니다. 시시비비가 난무합니다. 세상 잠시 등 뒤에 두고 난을 곁에 두었습니다. 옛 책 뒤적이나 깜빡 잠들다 깨니 난이 피었습니다. 모르면 모를까 어찌 그 꽃을 두고 자리를 뜰 수 있을까요. 이 할아버지의 마음 심지에서부터 번져 나오는 기쁨이 보입니다. 책을 넘길 때마다 향기가 일어납니다. 문장들이 다 향기였을 겁니다. 여기 무슨 시비가 있겠습니까. 그저 참일 뿐입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이병기 1891년 전북 익산 출생. 주시경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수학하고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가람시조집>, <역대시조선>, <국문학전사>, <국문학개설>, <가람문선> 등을 간행하였다. 연희전문 강사, 서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8년 작고하였다.

낭송 홍서준 배우. 뮤지컬 '우리 동네', '위대한 캐츠비' 등에 출연.

음악 권재욱 / 애니메이션 정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