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사는 기쁨 - 황동규

라라와복래 2013. 7. 11. 14:28

사는 기쁨

황동규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가까이 두지 않고

70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크게 눈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

겨자씨 비유의 어머니 겨자도 찾아 심자.

나머지 반은 심지 않아도 제물에 이사 와 자리 잡는 풀과

민박 왔다 눌러앉는 이름 모를 꽃들에게 내주자.

개미와 메뚜기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들이 들르고

벌레들도 섞여 살겠지.

그래, 느낌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마당이 있고

귀 힘 아주 빠지기 전 오디오 볼륨 제대로 울려줄 집이 주어진다면!

오크통에 30년, 책장 구석에 30년, 세상 잊고 산 위스키 앞세워

와인과 막걸리와 칵테일을 모아 놓고 친구들을 불러

먼저 가버린 자들도 번호 살아 있으면 문자를 보내

파티를 열자. 바램은 아직 유효하다.

3

유효할까?

파티 다음 날, 종일 속도 마하0으로 움직이는 텅 빈 맛이

몸에 버틸 힘을 줄까?

가을 들어 처음으로 은행잎이 비행연습을 시작하는 저녁

동향한 창밖으로

건너편 언덕 아파트의 모든 창들이 일제히 황금향으로 피어난다.

대가(代價) 없이 자신을 태우는 황금의 절창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는

한 해 가운데 이 한때가 가장 마음에 든다.

‘가장’이라는 말에는 지금까지라는 뜻이 숨어 있고

다음은 텅 빔?

조금 전 건물 입구에서

시들고 있는 꽃에게 안부를 물었다.

코끝에 채 맴돌기도 전에 사라지는 향기로

꽃은 답했다. 텅 빔?

텅 빔이 가짐보다 바람의 근본일까… 아닐까?

햇빛 스러지며 한 자락씩 황금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창들이

차례로 물음을 던진다.

4

그간 군(郡)에서 주차장 집어넣고

매점과 화장실 내고 길 펴고 넓혀

오르내리는 맛을 한껏 줄인 몰운대,

발걸음 멈추게 하던 제비꽃 달개비들 사라지고

숨었다 들키던 은방울꽃 자취 감추고

미끄러워 마음 잡아주던 바윗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보면, 시야 가득 차오는 비닐하우스들

뜬구름조차 뜨지 않고…

아 몰운대에서 풀려난 몰운대!

그 언저리에 집 한 칸 마련해

강원도에서 차를 몰다 덜 살고 싶을 때면 슬그머니 들러

낮에는 대에 올라 다른 아무 데도 눈 주지 않고

밤에는 모깃불 피워놓고 모기 침 쿡쿡 맞으며

답답함에서 풀려나리라던 긴 긴 꿈에서

이젠 새삼 놓여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는가?

영영 놓여나지 못하게 되었는가?

5

바위틈에 발톱을 박고 서 있는 나무 다섯 그루

바로 뒤에 야트막한 초막

비어 있다.

그 뒤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말없이 넓게 펼쳐진 물

물 건너 그림자 하나 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산.

원나라 화가 예찬(倪瓚)의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는

은둔 신호만 켜지면 모든 것 놔두고 들어가

신선인 듯 가볍게 거닐고 싶었던 곳,

오늘 그의 그림 다시 들여다보니

사람들도 짐승들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멧새 하나 날지 않는다.

들어오려면 그림자도 놔두고 오라?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白酒) 한 병 차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을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도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어둡고 더 어두운

흔히 그렇지만 머리 아플 때 진통제를 삼키면

잠시 후 신경에 얇은 막이 덮이고

통증이 무뎌지고

마음의 자전(自轉)이 늦어진다.

모차르트는 그저 모차르트

만나는 사람은 그저 만나는 사람

긴한 감각들이 전정(剪定)당한다.

어쩌지, 산책길에 달려드는 벌들이

공손해진다.

뇌를 쿡쿡 찌르는 머리 그대로 쳐들고

바다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친구와 술잔을 나눈다.

우리 대화 저 앞에 해, 환한 구리거울 같다.

드디어 거울이 끓고 바다가 끓고

통증이 끓으며 잦아든다.

거울이 한 번 더 끓으며 바다를 물들이고 사라진다.

술 한 번 마실 때마다

뇌세포가 몇 마지기씩 죽는다고 하지만

뇌세포 다 살려갖고 죽어야 맛인가! 세포들아,

터진 솔기와 실밥을 감추지 못하는 뇌세포들아,

세포 수 가난한 나를 용서 말아라.

용서받는 것은 어둡고, 안 받는 것은 더 어둡다.

술상 옆, 개울에도 못 끼는 실 도랑물

어둠 속에 바다를 열고 들어간다.

출전: <사는 기쁨>(문학과지성 시인선 422)

 

시인 황동규는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영국 에든버러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어떤 개인 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꽃의 고요> 등의 시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ㆍ이산문학상ㆍ대산문학상ㆍ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15번째 시집 <사는 기쁨> 낸 황동규 시인

시와 몸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른 걸까. 황동규 시인은 “내가 시를 쓰고 시가 나를 쓴다. 시가 나를 고쳐준다. 시와 내가 주고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삶의 가을에 와 있다는 그의 시에서는 새순이 움트는 듯한 봄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등단 55년을 맞은 황동규(75) 시인의 열다섯 번째 시집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은 그렇게 역설적이었다.

“가을을 받아들이면 봄이나 여름 같은 거예요.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면 봄처럼 느껴지는 거죠. 늙는 것은 즐겁지 않지만 고통을 잊으려 하는 것이죠.”

지금 내 삶의 좌표를 그린다면 고교 수학시간에 익힌/곡사 포탄 낙하지점 상공의 포물선 기울기일 것이다./망막이 뿌예지는 막막한 하강… ―‘혼’

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낙하 중이다. 그런데 불안함도 초조함도 없다. 오히려 너그럽고, 담담하다. 오랜 벗과의 이별도 헛웃음으로 ‘쿨’하게 받아넘긴다.

잘 가거라./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허허. ―‘이별 없는 시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월의 무게가 커지는 것과 같다. 노화한 육체와 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노시인도 마찬가지다. 감기에 걸려서 혹은 족저근막염 때문에 산책을 못 나가는 일도 있고, 침침해지는 눈과 약해지는 청력, 기억력의 감퇴로 불편함을 겪기도 일쑤다. 그런데도 괜찮다 여긴다. 달관의 경지마저 느껴진다.

몸이여, 그대 처분에 나를 맡겨야 하지 않겠나./주어진 시력 계속 쓰다가 어느 순간/눈 없어 더 환하다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잘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만큼/보는 맛 조금씩 더 돋구며 살다/소리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귀,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가/음(音)의 옷깃을 잡아채려다 놓치기도 하는/상처 입은 뇌를 가지고 가련다./흠집 없이 곱게 간수한/그런 명품 혼을 모시고 산 적 없으니. ―‘이 저녁에’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는 삶에 대한 예찬이다. 북한강가에서 만난, 팔 위에 새를 얹은 채 춤을 추는 어느 사내의 몸짓에서 삶의 진수를 깨닫고 삶이 별거냐, 춤을 일궈내면 된다고 말한다. 각자 주어진 기능을 다 하면 좋은 삶이라고 했다.

물리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 시인은 장기 기증을 권유하는 전화 통화를 마치고서는 이렇게 썼다.

 

아직 상상력 난폭하게 굴리는 고물차 다된 뇌나 건질 만할까./간 심장 신장 같은 건 너무 오래 술에 절어, 이식해 본들…/뇌도 가끔 메모리 장치가 먹통 되곤 하지만/(중략)/이 세상에서 나갈 때/아직 술맛과 시(詩)맛이 남아 있는 곳에 혀나 간 신장 같은 걸/슬쩍 두고 내리지 뭐./땅기는 등어리는 등에 붙이고 나가더라도. ―‘장기 기증’

시인은 삶에 대한 무한 애정을 표출한다. “삶은 권리와 의무라고 하기보다 큰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견디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어떤 삶도, 삶이 최소한 자살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기억력도 줄고 몸의 기능도 하나씩 허약해지지만 상상력은 줄지 않았어요. 이번 시집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전력투구했는데, 시집 원고를 넘긴 뒤 다시 새로운 스타일의 시가 나오더군요. 호흡도 짧아지고 길이도 짧아지고, 샤프한 시가 쓰여 시집 한 권쯤은 더 낼 수 있겠어요.”

[중앙일보 하현옥 기자 2013.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