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중에서

라라와복래 2013. 7. 30. 21:17

 

1968년 6월. 김수영 선생의 영구가 수많은 조객이 함께한 세종로 예총회관 광장 장례식 뒤에 도봉산 기슭으로 떠났습니다. 그 뜻밖의 새 무덤은 무덤이기보다 차라리 이승에 사는 형제자매의 주거지에 속해 있는 가족의 한 정경이 되었습니다.” ―고은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중에서

여름이 되자 수영은 심한 암치질을 앓았다. 너무나 통증이 심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수영을 종로5가에 있던 ‘강 항문과’에 데려갔다. 의사는 내게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위에 올라타라고 했다. 그리고는 퉁퉁 부은 항문에 메스를 들이대자 고름이 쏟아졌다. 피와 고름이 섞인 양동이가 몇 번이나 오르내렸을 것이다. 의사는 수영의 항문에 페니실린이 잔뜩 묻은 거즈를 한 움큼 구겨 넣었다.

나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수영을 간호했다. 가끔씩 병원비를 조달하기 위해 집에 있던 비단을 훔쳐와 동대문시장에 가서 팔았다. 세 번째 비단을 훔치던 날,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아버지와 마주치고 말았다. 시 나부랭이나 쓰는 작자를 도둑질까지 해가며 만난다면서 아버지는 내 방문에 대못을 박았다.

이후 수영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졌다. 몰래 집을 빠져나와 그를 찾아갔더니 수영은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된다며, 이만큼 했으면 되었다며 나를 돌려보내는 거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울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이지만 아버지가 수영을 찾아가 딸의 행복을 위해 교제를 중지해달라고 설득했던 것이다. 진심이 아닌 말들로 이별을 선언한 후에도 수영은 당시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충무로4가 쪽의 설렁탕집 ‘유명옥’ 다락방에서 내가 다시 찾아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고 했다.

(중략)

나는 그 길로 수영이 치질을 앓으며 지냈던 그의 방으로 함께 돌아갔다. 시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친정어머니를 찾아갔다. 일숫돈을 얻어 금가락지도 해주셨다. 돈암동 근처에 살림방을 얻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사랑 앞에서 결혼식 같은 제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문학은 어차피 각질화된 제도에 저항하는 양식이 아니던가.

출전: <김수영의 연인>(실천문학사)

 

한 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도 보통의 몸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아파하고 고민하는 것들을 예외 없이 겪었다는 것. 그게 이 책, 특히 이 부분에서 찬란하게 드러납니다. 치질을 치료하는 과정이나 연인에게 이별을 통고해 놓고도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 일숫돈으로 쌍가락지를 사서 살림 시작하는 장면들이 가슴 아프기도 하고 웃음도 나오고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는 거는 다들 비슷하죠. 미스코리아도 똥은 싸야 하고 격투기 선수 추성훈은 귀신을 무서워하고 오바마 미대통령도 담배 피우다가 들켜 마누라에게 왕왕 혼쭐이 난다고 하잖아요. 이런 모습은 김수영 시인과 그의 아내 김현경 선생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입니다.

문학집배원 한창훈

 

작가·낭독 김현경 김수영 시인의 아내 그리고 첫 독자. 192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수학. 의상실 경영. 미술 컬렉터로도 활동. 현재 김수영문학관 설립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