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아주 짧은 초상화] 최소한의 나를 지켜냈을 뿐입니다 - 한승오 | 농부ㆍ작가

라라와복래 2013. 11. 14. 20:55

[아주 짧은 초상화]

최소한의 나를 지켜냈을 뿐입니다

한승오 | 농부ㆍ작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에서 하얀 편지봉투를 꺼내 병원 원장의 책상 위에 올렸다. 의자에 앉은 원장은 겉면에 검은색 글씨로 사직서라고 쓰인 봉투를 힐끗 보더니, 박 간호사,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야. 이런 결과를 바란 건 아닌데…, 라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조금 숙인 뒤 원장실을 나왔다. 사직서를 쓰던 어젯밤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다. 혼자서 고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나이 오십이 넘은 여자가 지금껏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다는 게 과연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일까? 나를 받아줄 다른 직장이 있을까? 남편과 일찍 사별한 후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살아온 생인데 무엇을 지키고자 사표를 내는 것일까? 직장을 내던지고 지킬 만한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느 질문 하나 분명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내 몸과 마음이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더 추락한다면 스스로를 추스를 자신이 더 이상 없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내가 일하는 내포영상의학과의원에 그녀가 첫 출근을 한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당시 거의 보름 동안 임상병리사 자리가 비어 있었던 터라 원장은 다급하게 사람을 구했다. 건강검진 대상자들이나 다른 병원 의뢰 환자들의 혈액, 소변 검사와 방사선 및 초음파검사를 주로 하는 병원의 성격상 임상병리사 자리는 하루도 비워둘 수 없는 자리였다. 시골 읍내의 작은 병원으로서는 이 사람 저 사람 가릴 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원장과의 면접이 끝난 바로 다음 날 그녀는 병원에 출근했다. 그날 아침, 원장은 정 간호사와 차 방사선사 그리고 나를 진료접수대 앞에 한 줄로 세워 놓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그녀를 소개했다. 그녀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하얀색 가운을 입었고 가운의 왼쪽 가슴 주머니에는 ‘임상병리사 김희옥’이라는 푸른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고 하얀 가운 밑으로 살짝 드러난 짙은 남색 스커트 아래로 뻗은 그녀의 다리는 굵었고 귀밑으로 일자로 삭둑 자른 단발머리에 얼굴은 두툼하고 넓적했고 눈매는 가늘게 찢어졌고 키는 작았다. 인사가 끝난 후 원장이 그녀와 나를 원장실로 따로 불렀다.

원장은 책상 앞 의자에 앉은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보며 밝은 웃음을 짓고 두 손을 비비면서, 이쪽은 우리 병원 고참 간호사인 박 간호사예요. 병원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에요. 김 실장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박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라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옆을 돌려 그녀와 눈인사를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는데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본 뒤 시선을 획 돌리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잠시 후 그녀는 원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박 간호사는 아마도 간호조무사겠지요. 직원들 신분은 정확하게 알려주셔야지요, 라고 말했고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녀의 돌발적인 말에 당황했는지, 원장은 나를 슬쩍 쳐다보며 몇 번 눈을 껌뻑이더니, 그래도 호칭만은 서로를 존중해야지요, 라고 말한 뒤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박 간호사가 김 실장한테 이것저것 잘 알려드리세요. 물론 김 실장은 다 잘하실 테지만 … 그럼 두 분 서로 잘 협조하세요, 라고 말을 끝맺자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녀를 뒤따라 원장실을 나갔다.

문을 열고 임상병리실로 들어선 그녀는 뒤따라오는 나를 향해 갑자기 몸을 돌리며, 왜 따라 들어와요? 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고 나는 순간 멈칫하면서, 전임 임상병리사가 했던 일이나 병원 일들을 알려드리려고 …, 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필요 없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가서 일 봐요, 라고 빠르게 말했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몸을 돌려 임상병리실을 나가는데 그녀는 나의 등에 대고 혼잣말처럼, 간호조무사 주제에 뭘 안다고 …, 라고 웅얼웅얼 덧붙였고 나가던 발걸음을 멈춘 내가 몸을 돌리자 그녀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라고 쏘아붙였다. 그래, 그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은 간호조무사 일을 해오면서 무수히 들어온 익숙한 말이었고 매번 들을 때마다 기분이 처참해지는 말이었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참아내는 말이었다. 그렇듯 나는 또 참았다.

 

어느 날 점심시간, 주문한 식당 음식이 병원에 도착한 지 십여 분이 지난 때였다. 뒤늦게 식탁에 자리한 그녀가 된장찌개를 한 술 뜨다 말고 숟가락을 탁 하는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찌개가 벌써 다 식었잖아! 밥이 왔으면 제때 알려줘야지. 나만 따돌리는 거야!, 라고 큰소리로 말하자 정 간호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라고 대답했고 차 방사선사는 먹던 밥을 남긴 채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녀는 정 간호사를 매섭게 노려보며, 정 간호사, 여기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야, 응? 라고 높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는데 정 간호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녀와 내 눈치만 살피자 그녀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큰 소리 나게 몇 번 치면서, 높은 사람이 자리에 와서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야? 간호사라 불러주니 이건 위아래도 몰라보고 …, 라고 몰아붙였고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먹던 밥을 계속 먹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분을 삭이지 못한 목소리로, 박 간호사는 지금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 남편 잡아먹은 과부는 다르긴 다르군. 위아래 없는 싸가지하고는 …, 라고 말했고 내가 손에 든 수저를 가만히 내려놓고 두 손으로 음식이 놓인 쟁반을 움켜쥐자 그녀는 도발적이고 거친 목소리로, 왜? 뒤집어엎게? 그래 한번 엎어봐. 남편 잡아먹듯 나도 잡아먹어 보라고! 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내가 과부이기에 무수히 들어왔던 어처구니없는 말들 중의 하나였고 매번 들을 때마다 남편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말이었고 그러다가도 결국은 참아내는 말이었다. 그렇듯 나는 또 참았다.

 

또 다른 어느 날,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아들의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2시20분에 병원으로 돌아왔다. 진료접수대의 내 자리에는 김 실장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면서 고개를 조금 숙이며, 미안해요. 아들 학교에 잠깐 다녀오느라고 조금 늦었어요, 라고 조심스럽게 말했고 그녀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조금? 여기 기다리고 있는 환자분들 봐. 환자 접수는 도대체 누구 일이지? 라고 말했고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해요. 아들 담임선생님과 이야기가 길어져서요, 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어미의 그 자식이겠지. 자식놈이 또 사고를 쳤나 보지. 저번에 보니까 그렇게 생겨먹었더라고, 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가슴이 빠르고 세차게 두근거렸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차갑고 빈정대는 말투로, 과부가 키우는 자식이 그렇지 뭐. 별수 있겠어? 지 어미 안 잡아먹으면 다행이지,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서 그녀를 노려보며 격앙된 목소리로, 야! 니가 뭔데 내 자식을 욕해. 얻다 대고 함부로 욕질이야, 응? 니 앞가림이나 제대로 해, 이 쌍년아! 라고 소리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고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때 방사선실 문이 빼꼼히 열렸고 뒤이어 원장실 문도 빼꼼히 열렸다.

다음 날 아침, 원장이 나를 원장실로 불렀다. 내가 책상 앞 의자에 앉자마자 원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박 간호사가 좀 참아. 김 실장이 문제가 많다는 걸 잘 알지만 어떻게 하겠어? 제 발로 나갈 사람도 아니고 무작정 쫓아낼 수도 없고. 만약에 김 실장이 불쑥 그만두기라도 한다면 어디서 임상병리사를 다시 구하겠어? 난처한 내 입장을 좀 생각해보라고, 라고 말했는데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만 바라보았다. 원장은 답답했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난 병원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이 나이에 내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병원을 하겠어? 좀 서로 좋게좋게 지내자고, 라고 덧붙였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원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저는 최소한의 나를 지켜냈을 뿐이에요, 라고 조용히 말했다. 원장은 조금 높고 딱딱한 목소리로, 여하튼 박 간호사가 참으라고. 그렇게 못 하겠다면 난 어쩔 수 없어, 라고 말했고 나는 원장의 최종 통보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장실을 나왔다. [경향신문 201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