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과 동양 철학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자 사람들은 처음에 사고 소식이 믿기지 않았다. 첨단 과학의 21세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사고의 원인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세월호 침몰과 동아시아의 문화, 특히 한국의 전통 문화를 연관 짓기 시작했다. 침몰이 시작된 뒤에도 승객들은 “가만히 있어라!”는 방송의 지시에 따른 채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방송의 내용에 따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탈출했더라면 희생자가 줄어들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문화에서 복종과 순종을 강조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늘었다는 설명이다.
동아시아의 문화 또는 한국의 전통 사상이 왜 복종의 윤리와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야기될까? 이것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누가 어디에서 그러한 미덕을 주장했을까? 사실이 아니라면 그 이야기는 단순히 근거 없는 주장일까 아니면 부분을 강조하는 일반화일까? 사람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근거로 우리나라 전통 문화가 복종의 윤리를 내면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세 가지 복종의 윤리를 지켜야지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도리가 없다. 따라서 결혼 전에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하고서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른다. 아버지는 자식의 하늘이고,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婦人有三從之義, 無專用之道. 故未嫁從父, 旣嫁從夫, 夫死從子. 故父者子之天也, 夫者妻之天也.) ―<의례> ‘상복전(喪服傳)’
“천자, 제후, 대부에게 각각 다투는 신하(爭臣)가 일곱 명, 다섯 명, 세 명이 있으면, 그들이 비록 무도하다고 하더라도 천하, 나라, 가문을 잃지 않는다. 선비에게 싸우는 벗(爭友)이 있으면 스스로 아름다운 이름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부모에게 싸우는 자식(爭子)이 있으면 부모가 불의한 일에 빠지지 않는다. 불의한 일을 한다면 자식과 신하는 부모와 군주에게 간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불의한 일이라면 간쟁해야지, 부모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면 어찌 효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故當不義則爭之, 從父之令, 又焉得爲孝乎?) ―<효경> ‘간쟁(諫爭)’
<의례>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따라야 하는 도의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전통 문화가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주체성보다 부모의 권위를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들여다보면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있다. 남성은 주체적 존재이고 여성은 예속적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비대칭적 관계가 일반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한다면,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이 동아시아만의 문화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사고는 특정한 역사 시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지적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효경>은 <의례>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한 사회의 보편적 도의, 의리, 정의와 관련해서 자식이 부모에게, 신하가 군주에게 결코 복종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불의가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렇게 보면 동아시아 문화는 남성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강조하지만 결코 무조건 복종, 절대적 맹종의 문화를 내면화시킨다고 할 수는 없다.
지적 도전은 학문의 기본
<효경>을 보면 군주와 아버지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신하나 자식과 마찬가지로 정의와 도의를 가리키는 의(義)를 존중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자연적 사회적 역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의(義)의 가치를 긍정하고 따라야 하며 누구도 그 규제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의(義)는 정치와 가정, 즉 실천의 장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의(義)를 규명하고 토론하는 학문의 장에서도 스승과 전통은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먼저 공자의 말을 들어보자.(‘위령공’) “인(仁)과 관련되면 스승이더라도 양보하지 않는다.”(當仁, 不讓於師.) <효경>에서는 ‘당불의(當不義)’라고 하고, <논어>에서는 ‘당인(當仁)’이라고 말한다. ‘당(當)’은 ‘무엇이 현안이 되다’, ‘무엇을 두고 논란을 벌이다’, ‘무엇을 지금 결정할 때이다’라는 뜻이고, ‘불의(不讓)’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 ‘인(仁)’은 사람이 해야 하는 덕목을 뜻한다. ‘의(義)’와 ‘불의(不讓)’ 또는 ‘인(仁)’과 ‘불인(不仁)’의 상황이 생기면 우리는 ‘지금’ 당장 어떤 조치와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음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제 목소리를 내지 않고 복종한다면 불의(不讓)를 막지 않아 결과적으로 방조한 것이 되고, 인(仁)을 따지지 않아 불인(不仁)한 짓을 할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논어>와 <효경>은 모두 기성의 권위에 대해 복종을 미덕으로 삼으라며 침묵의 카르텔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논어>에서는 “양보하지 말라!”고 하고, <효경>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굽히지 말고 싸우라!”고 말한다. 이것은 ‘내’가 “무엇이 불의(不讓)인지 아닌지?”와 “무엇이 인(仁)인지 불인(不仁)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라는 점을 명시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아무런 주견도 없이 남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고 기성의 권위에 주눅이 들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통과 스승의 지침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공자가 보통의 상황에 한해서 부모와 군주를 섬기고 선배를 모시며 이들에게 공손하고 공경의 자세를 취하는 복종의 태도를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인(當仁)”과 “당불의(當不義)”의 상황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맹자도 공자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맹자는 사상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각 학파의 이론이 논리적으로 초래하는 결과를 간파하고 내 마음에 깃든 도덕의 씨앗과 기상을 무한히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지언(知言)과 양호연지기(養浩然之氣)로 말하면서 “성인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를 것이다.”(聖人復起, 必從吾言矣. ‘공손추’ 상)라고 말했다. 또한 맹자는 묵적(墨翟)과 양주(楊朱)의 사상이 공자의 사상을 능가하는 시대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두 사람의 사상이 결국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사상적 무정부 상태를 낳을 것이라고 진단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성인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 말을 뒤집지 못할 것이다.”(聖人復起, 不易吾言. ‘등문공’ 하) ▶공자의 초상화
맹자는 자신의 시대적 과제가 공자의 사상을 부활시키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앵무새마냥 공자의 언어와 사상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는 공자가 말하지 않는 성선(性善)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권위마저 뛰어넘는 발언을 주저 없이 하고 있다. 맹자도 결국 공자가 말했던 “당인, 불양어사(當仁, 不讓於師.)”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사(師)만이 아니라 성인(聖人)마저 맞설 수 있다는 지적 도전의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지적 도전이 있기에 학문은 시대와 대결하면서도 동시에 시대를 이끄는 규범을 입안할 수 있는 것이다.
색은행괴(索隱行怪)와 척당불기(倜儻不羈)
학문과 삶의 자세와 관련해서 공자는 꽤 흥미로운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자세를 중용(中庸) 유형, 광자(狂者) 유형, 견자(狷者) 유형으로 구분했다.1) 광자(狂者)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고 앞으로 내달리는 특성을 드러낸다. 견자(狷者)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 정도로 신중하여 생각한 것을 다 말하지 못하는 특성을 드러낸다. 중용(中庸)은 광자(狂者)의 진취성과 견자(狷者)의 신중성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중도를 지키는 특성을 보인다.
공자의 세 유형을 오늘날의 말에 대응시켜보면 광자(狂者)는 진보, 견자(狷者)는 보수, 중용(中庸)은 중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광자(狂者)는 기존의 학술과 삶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아 나서서 설혹 그 대안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견자(狷者)는 기존의 학술과 삶에 대체적으로 만족하고 또 실천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지만 완전하게 실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중용(中庸)은 광자(狂者)와 견자(狷者)의 장점을 종합한 유형이지만 공자의 말대로 현실에서 찾기가 어렵다. 오늘날 사회적 의제가 찬반양론으로 급속하게 구분되면 중도의 입장이 설 수 있는 지대가 점점 좁아진다. 이렇게 보면 공자도 중도의 회색지대가 자리할 공간이 아주 작은, 극단의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논어>에서 분류했던 세 유형은 <중용>에 이르러 두 가지 유형으로 재분류되고 있다. <논어>의 가운데 길을 가리키는 중행(中行)이 <중용>에서 ‘중립(中立)’과 ‘중용(中庸)’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때 중립과 중행은 양극단의 중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상반되는 것을 한 곳으로 모으는 중심을 가리킨다. 중립과 중용은 광자(狂者)와 견자(狷者)의 중간이 아니라 광자(狂者)와 견자(狷者)를 통합하는 제삼의 중심이다.
따라서 중립(중용)이 아닌 것은 중립(중용)과 구별되는 하나의 유형이 아니라 허용될 수 없는 극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용>에서 중립(중용)이 아닌 것을 설명하기 위해 더 이상 광자(狂者)와 견자(狷者)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극단성, 위험성, 불온성을 강조하는 명칭이 새롭게 보태어졌다. 그것이 바로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주장을 찾아내고 납득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길을 버젓이 실행하는 색은행괴(索隱行怪)이다. 광자(狂者)는 진취적이지만 불온하지 않았는데, 색은행괴(索隱行怪)는 극단적이고 불온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더 이상 학문과 삶의 세계에서 발을 붙일 수 없는 이단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2)
진한(秦漢)은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극복하여 이전에 없었던 제국을 이루었다. 제국의 출현으로 인해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이 무제한으로 누렸던 자유가 점점 위축되어갔고, 제국은 학술을 후원하고 검열하는 유일한 중심 기관으로 자처하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진(秦)제국은 고전에 근거해서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이고자금(以古刺今)의 학술 행위를 금지했고, 한(漢)제국도 실현해야 할 국가의 상 또는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나서 그것과 맞지 않는 학술을 더 이상 지원의 대상에서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로써 학문이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학문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학자는 안정적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학자의 안정된 조건은 학문 권력을 형성하는 물적 기반이 되었다. 한(漢)제국의 학술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와 달리 학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분파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제 진정으로 학문에 뜻을 둔 학자는 안정된 조건이 보장되는 새장에 머물 것인지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한 새장 밖을 날아다닐 것인지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실로 대담하게 ‘논형(論衡)’의 기치를 내걸었다. 자기 시대에 생겨난 모든 학술과 담론을 저울에 올려놓고 그 값어치를 매기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대범하고 당당하여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척당불기(倜儻不羈)의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네 가슴의 소리에 귀를 기울어라
공자가 말한 학문 연구의 세 가지 유형이 <중용>에서 두 가지 유형으로 줄어들게 되면서 학문 연구의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왜냐하면 두 유형에서는 정학(正學)과 사학(邪學), 즉 정통과 이단의 구분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세 가지 유형에서 진취적인 광자(狂者)는 두 유형의 세상에서 숨 쉴 공간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아니 불안과 분열, 우울과 울분의 신경증이 더 늘어났다. 기성의 학술과 그 가치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불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불만을 가졌더라도 그 대안을 끝까지 모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광자(狂者)는 함께 할 수 없는 광인(狂人)이 되었다.

대표적인 광인으로 시문서화(詩文書畵)에 일가를 이루었던 명(明)나라의 문인 서위(徐渭, 1521-1593)를 들 수 있다. 그는 정치적 위기 상황에 처하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치광이인 척하며 자해를 했다. 또 자신의 아내를 때려죽여 사형을 선고받고 7년의 수형 생활을 하다가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명나라의 문인이자 시문서화에 능했던 서위의 초상화.
그러나 명(明)나라에 이르면 학인들은 더 이상 광기로 무장하거나 신경증을 예술로 승화시키기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탁오(李卓吾, 1527-1602)는 사회의 학습과 요구에 이미 길들여진 진심(眞心) 대신에 어떤 상황에서 최초로 드는 생각이라 할 수 있는 일념에 주목했다. 그는 최초의 일념을 동심(童心)이라 불렀다. 그는 동심(童心)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사람의 길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명(明)나라(1368-1644) 후기에 이르면 학인들은 전통, 권위, 성인, 선험, 도덕을 총괄하는 이성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냥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터져 나오는) 소리, 울림, 감동의 진실한 감정을 살려내려고 했다. 그것이 활동 영역에 따라 동심이 되기도 하고 성령(性靈)이 되기도 하고 직정(直情)이 되기도 했다.3)
원굉도(袁宏道, 1568-1610)는 ‘서소수시(叙小修詩)’에서 자신의 동생 원중도(袁中道)의 작품세계를 비평하고 있다.4)
“오직 성령을 펼쳐내지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 자신의 속마음에서 흘러나온 게 아니면 붓을 놀리지 않겠다. … 모방하지 않고 사람의 성정에 맡겨서 펼쳐 나가므로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의 기쁨이나 성냄, 슬픔이나 즐거움 그리고 기호나 정욕과 거리감 없이 이어지니 참으로 기뻐할 만하다. … 대체로 진실한 감정이 담긴 말은 저절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니 참다운 시라 할 수 있고 전해질 만하다. 어떤 사람은 이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며 문제로 여긴다. 이는 감정이 경물에 따라 바뀌고 문자가 감정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소통하지 못할까 걱정이지 노골적이라고 염려하겠는가?”(大都獨抒性靈, 不拘格套, 非從自己胸臆流出, 不肯下筆. … 任性發展, 尙能通于人之喜怒哀樂, 嗜好情欲, 是可喜也. … 大槪情至之語, 自能感人, 是謂眞詩, 可傳也. 而或者猶以太露病之, 曾不知情隨境變, 字逐情生. 但恐不達, 何露之有?)
시는 기존의 형식에 맞춰 글자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시를 쓸 때 형식과 운율 그리고 조어의 규칙을 고려하다 보면 제 아무리 신공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그대로 담아낼 수가 없다. 형식에 들어맞으면 맞을수록 마음의 진실로 감정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연애편지를 쓸 때 미사여구에 기댈수록 문장은 아름다워지지만 나의 마음과 상관이 없어진다. 원굉도는 시어가 형식과 내용(메시지)에 얽매여서 감정(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복권은 현대 철학에서 이성에 억눌린 감정 살리기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5)
주석
1) ‘자로’ 21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2) 신정근,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사계절, 2010, 65~84, 254쪽. 이단 규제, 탄압 예기
3) 강명관은 일찍부터 박지원의 작품 세계가 이탁오 등의 양명좌파, 원굉도의 성령설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세세하게 논증했다. 강명관, <안쪽과 바깥쪽>, 소명출판, 2007 참조. 박지원과 교유했던 박제가는 호기상신(好奇尙新)의 인물로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도 직정(直情)을 찾아냈고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고자 했던 것이다.
4) 원굉도, 심경호 옮김, <원중랑집> 2, 소명출판, 2004.
5) 동양철학은 다양한 굽이와 세세한 가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않고 “동양은 정체를 벗어나지 못한 인류의 유아기 상태에 있었다”라고 그 문화와 철학을 평가절하한다면 이는 진실의 외면이자 진리의 왜곡일 뿐이다.
글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