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our est un oiseau rebelle (사랑은 길들지 않는 새) -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
Metropolitan Opera 2009-2010
오페라 배역 중에는 ‘바지 역(trouser role)’이라는 것이 있다. 원래는 치마를 입고 무대에 서야 할 여성 가수가 바지를 입고 남성역을 노래한다는 뜻으로 바지 역이라 부른다. 이 바지 역에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과거에 거세된 카스트라토들이 불렀던 배역을 카스트라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메조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 경우다. 카스트라토를 위한 노래들은 음역대가 대체로 테너보다 높고 소프라노보다 낮기 때문에 메조소프라노 또는 카운터테너가 부르게 되는 것이다.
헨델의 <리날도>나 <줄리오 체사레>의 타이틀 롤을 생각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일반 남성 가수가 노래하기에 애매한 10대 소년 역이어서 처음부터 소프라노나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도록 작곡된 경우다. 대표적인 배역으로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미소년 케루비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타이틀 롤인 옥타비안을 들 수 있다.
바지 역의 가장 큰 문제는 무대 위의 여성 가수가 남장을 해도여간해서는 진짜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페라는 음악예술일 뿐 아니라 극예술이기 때문에, 가수가 자신의 배역처럼 비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완전한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행히 요즘은 기량이 훌륭한 카운터테너 가수가 많아 남성의 외모와 카스트라토 음역의 목소리로 수많은 바로크 오페라 레퍼토리들을 커버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 메조소프라노 가수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엘리나 가랑차의 바지 역만큼은 무대 위의 가수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자연스럽고 관객 몰입도가 높다.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티토 황제의 자비>에 출연한 가랑차의 세스토 역은 감탄 그 자체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탈리아어 버전인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키>(캐퓰렛 가와 몬태규 가)에서 로미오 역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했던 과거의 가랑차를 기억하는 팬도 많을 것이다.
2009년 <카풀레티와 몬테키>에서 로미오 역을 맡은 엘리나 가랑차
돼지치기 소녀, 메트 무대에 서다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 3국에 속하는 라트비아는 1990년까지 구소련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다가 1991년에 독립했다. 엘리나 가랑차는 아직 라트비아가 소련에 속해 있던 1976년 9월 16일, 수도 리가(Riga)에서 합창 지휘자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180cm에 가까운 큰 키에 패션모델 같은 스타일, 빼어난 외모와 화려한 금발을 보면 누구나 가랑차를 쉽게 ‘엄친딸’로 단정한다. 그러나 2013년 11월, 인생의 반환점을 채 돌기도 전인 37세에 자서전 <정말 중요한 건 신발이다(Wirklich wichtig sind die Schuhe)>를 출간하고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행한 가랑차의 인터뷰를 보면, 겉보기와는 달리 ‘처음부터 다 갖춘 인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시골과 도시, 두 세계를 오가며 자랐어요. 시골 농가의 할머니 댁에서 돼지 먹이고 소 젖 짜면서 살았고, 소와 돼지들을 청중으로 삼아 맘껏 노래를 불렀죠. 하지만 도시에 있는 부모님한테 오면 삶이 완전히 달랐어요." 가랑차 집안은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족하게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걸 배웠고, 사소한 문제에 까다롭게 굴거나 고민하지 않는 대범함을 갖출 수 있었다. “일하라, 그러면 대가를 얻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배웠죠.” 가랑차의 말이다.
진로를 결정할 시기가 오자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다니며 극장의 삶에 익숙했던 가랑차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연극배우의 길을 걸으려 했다. 뮤지컬에도 뜻이 있었다. 그러나 입학시험에 떨어졌다. 부모는 음악교사의 길을 가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지만 가랑차는 음악교육과 입시에도 낙방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예술경영 전공을 권했다. 결과는 역시 낙방의 고배였다. 미래를 위한 어떤 문도 열리지 않자 결국 어느 날 아침 부모가 말했다. “이젠 오페라 가수가 되는 길밖엔 없네.” 자존심 강한 10대 소녀에겐 참기 어려운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결국 가랑차의 운명은 오페라 가수였던 모양이다. 10대에 공기 나쁜 디스코텍과 담배를 지나치게 가까이해 목소리를 제대로 망칠 뻔했지만, 어머니의 잔소리로 회심했다고 한다. ‘노력 없이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라는 어머니의 철학은 곧 딸의 철학이 되었다. ◀엘리나 가랑차의 자서전, <정말 중요한 건 신발이다(Wirklich wichtig sind die Schuhe)>
리가에서 성악을 전공하면서 가랑차는 존 서덜랜드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오페라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1999년 가랑차는 마침 핀란드 ‘미리암 헬린 성악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이었던 서덜랜드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메조소프라노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꿈같은 성공이었다. 지휘자 리처드 보닝과 결혼해 수많은 공연을 남편과 함께 했던 서덜랜드처럼 가랑차도 현재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영국 지휘자 카렐 마크 시숑과 부부간이고, 그가 지휘하는 무대에 서기도 한다.
'Parto, parto' -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에서 세스토의 아리아
Festival de Ópera de A Coruña 2012
1999년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의 세 번째 시녀’ 역으로 독일 마이닝엔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가랑차는 200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티토 황제의 자비>의 바지 역인 안니오로 출연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2007년에는 <코지 판 투테>의 도라벨라 역으로 런던 로열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고, 2008년 <세비야의 이발사>의 로지나 역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섰다. 이때부터 메트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은 가랑차는 2009년에는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와 비제의 <카르멘>의 타이틀 롤로 메트 팬들을 매료시켰고, 이 두 프로덕션은 영상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 오페라 애호가들을 사로잡았다.
가랑차의 이 대표적 두 배역은 사실 완전히 상반된 성격의 배역이다. 차분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지닌 가랑차에게는 카르멘보다는 신데렐라 역이 훨씬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모차르트와 로시니 전문 가수로 세상에 알려진 가랑차 스스로는 로시니 배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같은 배역의 전문 가수들인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나 조이스 디도나토에 비해 콜로라투라 테크닉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가랑차가 주역을 맡은 메트 오페라의 <카르멘> 영상이 세계를 매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역대 최고의 카르멘이라고 부르기는 내키지 않는다. 아그네스 발차나 마리아 유잉에 비하면 내면의 강렬함도 냉정함도 충분치 않아서다. 연기에서 느껴지는 기품과 유머 감각은 또 바지 역의 대명사 안네 소피 폰 오터보다 조금 부족한 듯하다.
엘리나 가랑차가 부르는 성가(聖歌)
00:57 Adam, Cantique de Noël - 06:36 Gounod, O Divine Redeemer! - 13:45 Gomez, Ave Maria - 18:07 Händel, Hallelujah chorus from “Messiah” - 22:27 Bizet, Agnus Dei - 26:50 Mascagni, Ave Maria from “Cavalleria Rusticana” - 30:52 Mascagni, - Regina coeli, from “Cavalleria Rusticana” - 37:26 Ruperto Chapí, Carcelaras from “Las Hijas del Zebedeo”
케루비노에서 샤를로테 역까지 방대한 스펙트럼
그런데도 엘리나 가랑차가 현역 최고의 메조소프라노 가수들 가운데서도 세계 오페라극장 섭외 1순위에 올라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레퍼토리의 방대한 스펙트럼 덕분이다. 위에 언급한 배역 외에도 가랑차는 <베르테르>의 샤를로테 역, <티토 황제의 자비>의 세스토 역, <리골레토>의 마달레나 역, <안나 볼레나>의 조반나(제인) 역,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롤라 역, <박쥐>의 오를로프스키 역을 불렀고, 이제 <아이다>의 암네리스 역, <돈 카를로>의 에볼리 역을 준비하고 있다. 가벼운 리릭 메조 배역을 모두 부르지만, 깊이 있고 드라마틱한 역할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틱 배역을 노래하면 목소리가 오래 못 가요. 50대 중반이 끝일 거예요.” 스스로 이렇게 말하면서도 가랑차는 계속 드라마틱 메조 쪽으로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싶어 한다. 이 모든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메조소프라노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가랑차는 교회음악 분야에서도 안정적이고 호소력 있는 가창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2010년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로 드레스덴 젬퍼오퍼에서 공연한 베토벤의 <장엄 미사> 독창자로도 주목을 받았지만, 2013년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공연한 베르디 <레퀴엠>에서는 독창자로 함께 무대에 섰던 요나스 카우프만보다 더 큰 호평을 받았다. 가족과 함께 빈에 거주하며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구사하는 가랑차는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데 파야, 슈트라우스, 베르크 가곡의 해석자로도 늘 청중 곁에 있다.
2009년 <카르멘>에서 엘리나 가랑차(카르멘 역)와 로베르토 알라냐(돈 호세 역).
안나 네트렙코와 오페라 및 갈라 콘서트로 한 무대에 많이 서다 보니 가랑차는 종종 언론에서 ‘네트렙코의 라이벌’로 불리기도 하지만, 가랑차 자신은 “안나와는 음역도 다르고 겹치는 배역도 없는데 라이벌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라고 일축한다. 가랑차가 로미오 역, 네트렙코가 줄리엣 역을 맡았던 벨리니의 <카풀레티와 몬테키> 공연 때는 여성 가수끼리의 열정적인 침대 장면이 아무래도 불편했다고 그녀는 털어놓는다. <티토 황제의 자비>에서 안니오 역을 맡아 연인 세르빌리아 역을 맡은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의 입술에 키스할 때 객석 맨 앞줄에 앉은 점잖은 관객들이 일제히 “으윽~” 하고 불편한 탄성을 올려 당황했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준다.
Flower Duet (꽃의 이중창) - 들리브의 오페라 <라크메>에서
Elīna Garanča, mezzo-soprano
Anna Netrebko, soprano
‘천일의 앤’ 스토리를 오페라로 만든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를 2011년 빈 국립오페라가 공연했을 때 가랑차는 헨리 8세의 총애를 (안나 네트렙코가 맡은) 앤에게서 빼앗는 시녀 제인 시모어 역을 맡았다. 이 공연을 본 비평가 위르겐 케스팅은 “그녀의 찬란하고 밝은 메조 음색은 풍성하고 전달력이 뛰어나 오케스트라 총주를 선명하게 뚫고 나온다.”라고 호평했지만, 헨리 8세에게 양심의 가책을 토로하는 대화 부분에서는 목소리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을 맡는 테너들보다 벨리니 작품에서 남장한 가랑차가 훨씬 로미오의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 바지 역을 가급적이면 부르지 않겠다고 한다. 10대 소년 역을 노래할 나이는 지났다는 뜻이다. “여성 가수가 출산하고 나면 대개 목소리가 깊고 둥글어지고 더 풍요로워지죠. 그래서 앞으로는 바지 역보다 드라마틱 메조의 여성 배역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제 네 살이 된 첫 딸에 이어 2014년 초에 둘째 딸을 출산한 가랑차는 “아기가 젖 뗄 때까지는 무조건 무대를 잊고 아기와 함께 지내는” 철저한 모유 수유 신봉자다. 할머니 댁에서 소 젖 짜던 시절에 배운 느긋함일까? “성공에 목마른 20대 젊은 가수들은 대개 무대 공포증이 있어요.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거죠. 저도 예전엔 그랬어요. 하지만 이젠 달라요. 여러 계기를 통해 성장하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지금 벌써 꼭대기에 와 있다면 5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남은 15년 이상의 세월을 대체 뭐하고 살겠어요?” 에코 클래식 ‘올해의 가수’로 뽑히고 ‘캄머젱어린(오스트리아 최고 예술가)’ 타이틀을 받은 지금도 여전히 가랑차는 자신이 꼭대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탄탄한 발성, 밝은 고음과 깊고 그윽한 저음을 갖춘 가랑차의 지속적인 발전과 배역 변신이 기대된다.
Elīna Garanča Amsterdam Gala Concert 2010
Mariss Jansons, conductor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추천음반
1. 벨리니 <카풀레티와 몬테키(I Capuleti e i Montecchi>>, 파비오 루이지 지휘, CD 2009
2. 로시니 <라 체네렌톨라(La Cenerentola)>, 마우리치오 베니니 지휘, DVD 2010
3. 비제 <카르멘(Carmen)>, 야니크 네제세겡 지휘, DVD 2010
4. 도니체티 <안나 볼레나(Anna Bolena)>, 에벨리노 피도 지휘, DVD 2011
5. 베르디 <레퀴엠(Requiem)>, 바렌보임 지휘, DVD 2013
글 이용숙 (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을 수학하였고,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