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란 무엇인가? (1)
―신비주의 개념을 둘러싼 오해와 그 이유

미국의 작가 고어 비달(Gore Vidal, 1925-2012)은 소설 <율리아누스>에서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의 체험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날이 질 무렵 나는 다시 태어나 동굴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빛에 의해 사로잡혔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체험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나는 일자(一者)를 보았다. 나는 태양에 흡수되었으며, 내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빛이 돌았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나는 창조의 근저에 자리하는 단순함 그 자체를 보았다. 그것은 언어와 마음을 넘어선 곳에 언어와 마음을 넘어선 곳에 있기에 신의 도움 없이는 아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명료했던지 우리가 그것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의 부분으로 항상 거기에 존재하는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여태껏 알지 못했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 제국 율리아누스(재위 361-363) 황제를 새긴 주화. 밀라노 칙령(313)을 공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버지의 노선을 더욱 강화해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는 배척했는데, 그를 이은 율리아누스 황제는 방침을 바꾸어 기독교 우대 정책을 철폐하고 그리스-로마 종교의 부흥을 꾀하면서 모든 신앙의 존재를 다시 공인했다. 그의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정책 때문에 기독교 쪽에서는 그를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Aposta)’로 낙인찍었다. (주: 라라와복래)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이 묘사가 자신의 체험을 묘사한 것인지 혹은 상상력의 소산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내용은 종교사에서 낯설지 않다. 이 체험은 보다 정확하게는 ‘신비적 합일(mystical union)' 체험이라 불린다. 인간이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종교 전통에서 빠짐없이 발견된다. 우리는 이 주장을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라 일컫는다.
신비주의는 종교학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개념 중 하나이다. 동서양의 교류가 본격화된 이후 이 단어는 인간의 종교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될 것이라 각광받기도 했고, 이단 혹은 악마 숭배(satanism) 등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뉴에이지(New Age) 운동은 신비주의를 ‘종교를 넘어선 종교성’의 표현이라 칭송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적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이 개념에 서양 중심주의가 은닉돼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찬탄에서부터 경멸에 이르는 반응을 동시에 야기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신비주의 개념의 의미를 다루려는 두 편의 글 중 첫 번째인 이 글은 신비주의를 둘러싼 오해에 초점을 맞춘다.1) 오해의 대부분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므로, 그 과정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작업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개념에 대한 오해들
신비주의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우리나라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런 오해와 논란의 대부분은 개념 형성 과정에서 겪었던 역사적 경험의 일부 측면이 과도하게 부각된 탓이라 볼 수 있다. 더 진전된 논의를 위해 신비주의 개념을 둘러싼 오해와 그 이유를 살펴보자.
1. 신비주의는 비합리주의 혹은 반이성주의다?
실증주의적 세계관은 입증 가능성을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므로 형이상학적 차원에 대해 회의적이다.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종교적 주장은 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없으므로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궁극적 실재를 비롯해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합리성에 반한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신비주의가 물질이나 개인의 의식적 차원을 넘어선 영역을 강조하면서, 유물론적 세계관이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나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이런 오해는 더욱 증폭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인간의 합리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할 것을 강조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인간의 이성을 본격적으로 강조했던 피타고라스(BC 582?-497?), 플라톤(BC 427-347), 플로티노스(205-270) 등의 주장이 얼마나 신비주의적이었던가를 고려한다면, 신비주의를 그저 인간 이성에 반하는 것으로 보는 태도는 성급한 것이 아닐 수 없다.2) 오히려 신비주의는 인간의 합리적 사고 능력과 종교적 직관을 함께 강조했던 움직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로마 오스티엔세 박물관에 전시된 플로티노스 상. 로마 시대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이성적인 방식으로 신비주의 사상을 정리하려고 했다.
실제로 신비주의자들은 잘랄 웃딘 루미(1207-1273)와 같이 시적 감수성이 매우 풍부한 유형에서부터 플로티노스와 같은 철학적 유형에 이르는 대단히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또 여성 신비주의들이 보다 정서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체험을 전개하는 데 비해 남성 신비주의들은 이성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체험과 사상을 정리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를 곧바로 반(反)이성주의라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신비주의는 감정과 이성, 직관과 합리적 추론 같은 일견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양극의 통합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 신비주의가 유물론에 반대해 비가시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은 맞지만, 이런 입장을 곧바로 반이성주의라고 단정하는 것은 일부 측면을 과장하는 태도일 수 있다.
2. 신비주의는 초자연주의다?
신비주의는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 supernaturalism)와 곧잘 혼동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을 강조하는 신비주의가 불가피하게 인간의 초자연적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차원에 대한 믿음이 신비주의의 전모는 아니다. 오히려 신비주의는 비물질적 차원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여러 계기들뿐만 아니라,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 신과 인간, 자연과 초자연 등과 같은 일체의 이원적 분리를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시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원성이 소거되는 신비적 합일(合一) 체험을 그 핵심으로 제안한다.

그러므로 계시, 채널링(channeling, 변형된 의식 상태에서 신을 비롯한 비물질적 차원의 존재와 소통하는 현상), 접신(possession), 유체이탈, 임사체험, 샤머니즘, 초능력, 기적 등과 같은 현상이 신비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현상들이 신비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즉, 신비주의가 궁극적 합일 체험을 정점으로 삼아 인간의 여러 초자연적인 경험들을 망라할 수 있지만, 그 최종 목적으로 합일 체험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면 신비주의로 간주해선 곤란하다.3) 예를 들어, 신과 인간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거리를 설정하거나, 양자를 매개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샤머니즘을 곧바로 신비주의라 부르기는 어렵다(그러나 이렇게 부르는 태도를 막을 방법은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계시, 채널링, 임사체험 등의 경험들 역시 이원성의 완전한 소거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비주의라 보기 곤란하다. ▶엘 그레코, <성흔을 받은 성 프란체스코>, 16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75x57cm, 프랑스 포 미술관 소장. 성 프란체스코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입은 것과 동일한 성흔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신비주의 전통들이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체험 외에도 다양한 유형의 비일상적이며 초자연적인 체험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컨대, <요가 수트라(Yoga Sutra)>는 합일 체험을 포함한 여러 유형의 체험과 수행 과정에서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능력(sidhi)들을 꼼꼼하게 제시하는 대표적인 저작이다. 물론 힌두이즘과 달리 여타 전통들은 신비적 합일 체험을 제외한 여러 유형의 체험들에 무관심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할 것을 조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경험을 신비주의의 전부라고 간주하는 것은 신비주의들의 주장과도 상충한다. 즉, 이원성이 소거되는 신비적 합일 체험을 최종으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유형의 종교 체험과 합일 체험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신비주의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3. 신비주의는 이단 혹은 나쁜 종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비종교(mystery cult)'가 쇠퇴하면서 신비주의는 서구 종교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다. 특히 기독교가 지배적인 위치를 굳히면서 신비주의들은 이단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 마르게리트 포레트(Marguerite Porete, ?-1310),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 십자가의 요한(John of Cross, 1542-1591)을 비롯한 많은 신비주의들이 이단으로 비난받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 주된 이유는 인간이 현생에서 신과 합일해 신성을 체득할 수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기독교나 이슬람이 사후에 가는 천국을 구원의 내용으로 제시했다면, 신비주의는 합일 체험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내면의 천국을 종교 생활의 궁극적 목적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사후 구원을 약속하고 신과 인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을 설정하는 종교 전통에서,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강조한 신비주의들은 이단으로 간주되기 십상이었다. 신과 인간의 동일성(identity)을 역설한 마르게리트 프레트나 알 할라지(Al-Hallaj, 858-922)와 같은 신비주의들이 이단으로 심판받고 목숨을 일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프레트는 예수를 구원자가 아닌 우리가 따라야 할 모델로 여겼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구원자로서 예수가 지닌 신성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수피(sufi, 이슬람의 신비주의자)였던 알 할라지. “신과 나는 하나다.”라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한 죄로 처형되었다.
게다가 동서양의 교류가 본격화된 이후에는 유신론적 서구 종교가 동양 종교를 폄하하기 위해 신비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신의 은총 없이 자력만으로 궁극적 실재와 합일할 수 있다는 동양 종교의 가르침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현대에도 존재한다. 예컨대, 가톨릭에서는 중세 신비주의들을 영성의 원천으로 활발하게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4), 일부는 수행자의 노력만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동양 종교와 뉴 에이지를 여전히 비판하기도 한다5).
4. 신비주의 개념은 편견을 숨기고 있다?
신비주의 개념이 편견을 숨기고 있다는 비판에는 여러 입장이 존재한다. 우선 이 개념이 서양에서 만들어진 탓에 동양 종교의 독특성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특히, 불교와 같은 무신론적 종교는 유일신을 궁극적 합일 대상으로 제시하는 서구 신비주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컨대 선불교가 서구에서 규정하는 신비주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단언이 대표적이다.6)
종교의 차이를 간과하지 말자는 점은 경청해야 하지만, 이런 입장이 동양 종교의 우월성 주장으로 확대되면 이 역시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유신론적 종교가 무신론적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견해도 편견이지만, 그렇다고 신비주의 개념이 무신론적 종교의 독특성과 우월성을 포착할 수 없다는 주장 역시 입중하기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다.
또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신비주의 개념에 서양 중심주의가 숨겨져 있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얀센(Jansen)은 신비주의 개념이 문화의 독특성을 간과하는 근대적 보편주의의 발상이라면서 동일성을 찾겠다는 시도가 서구적 기준을 보편으로 삼아 차이를 도외시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서구의 유신론을 표준으로 간주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물론 서구가 근대에 다른 문명권에게 가졌던 제국주의적 편견을 반성하자는 견해는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동서양 종교를 비교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거나 신비주의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 단어가 서양에서 유래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동서양 종교에는 이른바 ‘초월 체험’이 가능하다는 믿음에 기초해 그 체험을 목표로 삼는 흐름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다, 이에 주목하자는 태도가 곧바로 차이를 간과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은닉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서양 종교의 독특성을 무시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간과하기 힘든 유사성을 포착하려는 시도 자체를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 더구나 동서양의 교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해진 현대에 종교 간 비교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이 개념이 서구 종교의 우월성을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 내에서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종교성을 옹호하려는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개념을 비서구 문명에 대한 서양적 편견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태도에는 무리가 있다.
5. 신비주의는 비밀주의다?
그리스의 신비종교와 이후 대부분의 신비주의 전통은 구체적인 수행법을 포함해 체험으로 얻게 되는 통찰을 누설하지 말 것을 엄격하게 요구했다. 그런데 비밀 엄수의 의무는 신비적 통찰을 과장하거나 신비화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앎이 체험자를 포함하여 주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를 조심하라는 의미가 컸다.
종교사에서 흔히 목격되듯 비범한 종교 체험은 체험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윤리적ㆍ지적 성숙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신비주의를 접할 때 생기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엄격한 비밀주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신비종교 전통이 입문자를 엄격한 기준에 입각해 뽑았던 점이나 유대교의 카발라(Kabbalah) 전통이 입문자를 불혹을 넘긴 기혼 남성에 국한시켰다는 사실은 신비주의 전통의 신중함을 잘 보여준다.

영화 <다빈치 코드>의 티저 광고. 영화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광고가 나가면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비밀주의’를 강조하는 이러한 광고 기법은 신비주의에 대한 오해로 이어졌다.
그러나 비밀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의 신중함은 우리나라에서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즉, 개념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이나 종교적 차원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신비주의가 곧바로 비밀을 강조하는 비밀주의로만 받아들여진 것이다. 연예인들의 대중매체 기피나 광고 기법의 하나인 티저(teaser) 광고를 신비주의로 통칭하는 것이 그러한 오해의 단적인 사례이다. 이런 경향은 매스컴의 오용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는데, 이는 학계의 이해와 대중적 쓰임새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이런 식의 오용이 생산적인 논의 자체를 아예 막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석
1) 두 편의 글은 필자의 논문에 기초했다.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 개념에 대한 오해와 유용성을 중심으로>, 인문논총, 71집
2) Bernard McGinn(1991), "The Foundation of Mysticism : Origins to the Fifth Century"
3) 독일어는 영매, 유체이탈, 점성술, 마술, 종교적 열광, 신유 등은 Mystimus,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Mystizist라고 하며, 순수한 종교 체험을 지향하는 신비주의는 Mystik,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은 Mystiker로 구분한다. 오강남 외(2011),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북성재, p.69
4) Thomas Merton(1951), "The Ascent to Truth"
5) 박문수 외(1998), <한구의 종교문화와 뉴 에이지 운동>, 바오로 딸
6) 변상섭 외(2000), <선, 신비주의인가, 철학인가>, 컬처라인
글 성해영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종교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플로티노스의 종교 체험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종교 심리학과 신비주의의 비교 연구다. 특히 개인의 종교 체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공저)가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종교학 201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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