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
현대인은 흔히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로 ‘자아(自我)’, ‘주체(主體)’를 즐겨 쓴다. 우리는 “자아를 찾는 여행에 나서서” 많은 체험을 한 끝에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한편 “저 사람이 자아가 없다.”는 말은 비난이 섞인 어감을 전달한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하므로” 남의 요구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을 보고 “주체성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근대 이전에 이미 ‘자아’와 ‘주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온전한 자아를 가진 완전한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유일신을 전제해보라. 사람은 신이 결정한 것을 따를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 자아가 있다고 해도 그 자아는 신을 따르는 존재일 뿐이다. 신과 맞서면 그것은 병든 자아이거나 악마의 조종에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예컨대 사람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의 상태에서 사고를 당하면 그 사람은 술에 휘둘리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사람들은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신과 전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의 명령이나 전통을 따라 행동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자아가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지금 내가 고통스럽더라도 노력하면 미래의 내가 보상받을 수 있다. 자아가 변하지 않으므로 “지금의 고통이 미래의 행복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의 현상도 가능하다. 지금 돈이 많다고 놀면 미래의 내가 고생하게 될 것이라며 계속 노력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돈을 계속 벌면 지금의 내가 가진 것보다 미래의 내가 가진 것이 많으리라고 본다. 이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자아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엄격하게 갈라놓고서 지금보다 더 많은 배타적 소유를 위해 움직이게 된다.
붓다는 사람이 자아의식을 가질수록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리라고 보았다. 따라서 원시불교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법무상(諸法無常),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것이 괴롭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설파했다.
이렇게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쉽게 타락과 무책임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내가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될 대로 되겠지!”라는 식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아’를 인정하는 주장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자아가 변하지 않고 늘 똑같다면 노예가 귀족이 될 수 없듯이 지금 내가 노력하더라도,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자아는 지금의 사회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논리가 될 수 있다.
오히려 무아(無我)는 변하지 않는 ‘나’만을 위한 탐욕의 사슬을 끊고 나와 남 사이에 다리를 놓게 한다. 원래부터 ‘소유하는 나’가 없으므로 무소유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내가 여러 조건의 결합에 의해 쉼 없이 바뀌므로 지금과 다른 나를 구성하는 작업에 적극적일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빚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실유불성(悉有佛性)
붓다는 영원한 자아가 없다고 했지만 사람은 언어와 생활을 통해서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면 누군가가 나에게 “그것이 네 것이오?”라고 묻고 나는 “내 것이오”라고 말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따르면 ‘내 것’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가 배타적으로 가진 소유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할 임시적인 ‘내’가 잠시 보관하는 물건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내 것’과 ‘네 것’이라는 언어를 끊임없이 사용하다 보면 은연 중 ‘소유하는 나’라는 관념을 갖게 되고 그런 사고에 익숙해지게 된다. ▶“모두가 깨달은 사람이 되게 돕겠다.”
초기 불교에서는 원래 없는 나를 자꾸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 습관을 문제로 삼았다. 언어와 생활 방식을 통해 자꾸 자아의식을 가지다 보니 자아를 배타적 소유 주체로 생각하게 된다. 이 때문에 물(物)을 나와 네가 함께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 가져야 하고 너와 함께 할 수 없게 된다. 이로써 나는 남과 함께 나누는 것이 남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되면서 서로 뺏고 빼앗는 약탈적 관계로 된다.
붓다는 이러한 사고 발생을 십이지 연기(十二支緣起)로 설명한다. 십이지 연기는 12개의 요소가 서로 맞물려서 윤회(輪回)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십이지 연기가 굳이 어디에서 시작된다고 지정할 수 없지만 통상적으로 무명(無明)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무명이란 무지를 뜻한다. 무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 소유의 자아에 갇혀서 세상의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예컨대 아이가 과자를 다 먹은 후 자고 일어나서 누가 자신의 과자를 다 먹었느냐며 난리법석을 떠는 일이 있다. 자기가 이미 다 먹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 아이가 정신을 차리면 ‘소동’은 저절로 정리가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보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오해하고 착각하여 고집을 피우면 피울수록 허상에 사로잡혀서 진상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팔정도(八正道)를 통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 욕망, 의지를 바로잡도록 하고 반야(prajna)의 지혜로 질긴 무명의 사슬을 끊고자 했다. 붓다가 살았을 때에는 붓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붓다가 입적한 뒤에 그동안 유예됐던 질문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라고 묻거나 아니면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깨달음의 가능성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원시불교에 있던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대승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 화두로 등장했다.
<열반경>에서 “모든 중생은 하나같이 모두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말했다. 불성은 산스크리트어 ‘Buddha-dhatu’를 옮긴 말이다. dhatu는 요소, 성분을 가리키므로 불성은 모든 사람이 붓다가 될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당시 불성과 같은 맥락으로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말도 널리 쓰였다. 여래장은 tathagatagarbha를 옮긴 말로 tathagata는 여래를, garbha는 태(胎)를 가리킨다.1) 즉 여래(부처)가 태 안에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를 통해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이나 여래장에 눈 뜨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모든 존재의 성불(成佛)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이 점은 대승불교가 중국과 한국 등으로 전래된 뒤에 맹자의 성선(性善)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개인 구제와 사회 구원
이론적으로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모든 존재가 불성 또는 여래장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현실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깨달음의 선후도 있고 무명(無明)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오히려 계율과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의 음역)가 성불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가 생겨났다. 잇찬티카는 원래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지만, 교리로 선근(善根)을 단절한 자, 신심(信心)을 갖고 있지 않은 자, 대승(大乘)의 법을 비방하는 자를 말한다. 결국 일천제는 현실적으로 성불하기 어려운 조건을 가진 사람이다. 다소 주장의 차이가 있지만 <열반경>에서 일천제도 불성을 가진 것으로 긍정하고 있다.2) 이로써 모든 존재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붓다의 나라에서 성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천제의 성불과 맹자의 성선은 완전히 같다고 볼 수 있을까? 다른 점이 있다. 성선은 성선을 현실화시키는 능력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하고, 이 구분을 바탕으로 군자의 소인에 대한 계몽을 인정한다. 아울러 맹자는 끝까지 계몽되지 않는 ‘망인(妄人)’을 인정하고 그이를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포기한다.3) 우리는 맹자의 고뇌에 찬 포기를 쉽게 뭐라고 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모든 사람이 성선(불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천제보다 더한 존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앞뒤가 꽉 막혀서 도대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존재가 있다.

경상남도 고성 옥천사의 지장보살도(1744).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맹자처럼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계몽하거나 최종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천제나 일천제보다 더한 존재를 끌어안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
하나는 깨달음을 이룬 붓다나 보살에 대한 원력(願力)이다. 정토종(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을 외우면, 즉 염불하면 성불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초월적 존재의 특별한 힘에 기대서 문제를 해결하는 일종의 타력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대자대비(大慈大悲)에 바탕을 둔 서원(誓願)이다. 서원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지장삼부경에 잘 나타난다.4)
특히 <지장보살본원경(地裝菩薩本願經)>에 보면 지장보살은 현세의 악행으로 지옥에 떨어진 사람까지 구원하려고 한다. “중생을 모두 구제하고 비로소 깨달음을 이루겠다.”(衆生度盡, 方證菩提.) “지옥이 텅텅 비기 전에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地獄未空, 誓不成佛.) “내가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으로 들어가겠는가?”
대승불교는 계몽이 아니라 자비와 서원으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원하겠다는 결의를 드러내고 있다. 과거나 현재에도 불교에서는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정의’의 눈으로 보면 불의와 타협으로 볼 수 있겠지만 자비의 눈으로 보면 관용이야말로 최후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불교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모든 존재를 ‘불국토(佛國土)’로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자비는 동아시아에서 철저한 응징과 엄혹한 처벌의 문화가 아니라 부드러운 융통과 상황에 따른 조화의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 일조한 것이다.
이론(교리)에서 일상으로
지금까지 불교에서 사람이 어떻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푸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물음은 다른 종교와 사상에서도 똑같이 제기되는 주제이다. 유교라면 사람이 어떻게 성선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기독교라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계시와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라는 기도를 할 것이다.
불교의 특색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룬 뒤에 있다. 출가승이든 재가 신자든 꾸준히 정진하여 ‘깨달은 자’가 되었다고 하자. 깨달음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수많은 시간의 축적으로 이루어진 결실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번뇌가 깨달음을 통해 물러났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깨닫기 전에도 밥 먹고 똥 누고 잠을 잤다. 깨닫고 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똥을 누지 않아도 되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시간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깨달은 자도 결국 일상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종류가 다르지만 오랜 준비 끝에 시험을 치르거나 프로젝트를 끝낸 다음 날과 그 전날을 비교해보라. 그 전날까지 잠도 못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비상의 시간을 보냈지만 ‘오늘’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깨달은 이후의 삶을 적절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자칫 더 깊은 허무로 빠질 수가 있다. 선불교는 다른 어떤 종파보다 “깨달은 이후 일상적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탐구했다. <선문염송(禪門拈頌)> 제367칙에 나오는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와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의 이야기를 들어보자.5)
위산은 여름 안거[夏安居]가 끝난 뒤에 자신을 찾은 앙산에게 안부를 물었다.
위산: 이번 여름에 무슨 일을 했는가?
앙산: 손바닥만 한 땅을 갈아서 한 광주리의 수수를 뿌렸습니다.
위산: 그대는 이번 여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군.
앙산이 스승 위산에게 안부를 물었다.
앙산: 이번 여름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위산: 낮에 한 끼 먹고 새벽에 죽 한 그릇 먹었네. [낮엔 밥을 먹고 밤엔 잠을 잤네.]
앙산: 스님도 이번 여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셨군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처음엔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깨달은 이전과 이후에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람이 달라져서 생각과 언행이 바뀌게 된다. 하지만 깨달은 이후에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세 끼 먹던 밥을 한 끼만 먹는 것도 아니고, 날씨가 더우면 예전처럼 부채질을 하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시공간에 몸담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물론 일상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마저 똑같다고 할 수 없다. 이전에는 청소를 더럽고 힘들게 여겨 빨리 끝내려고 했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흥겹게 할 수 있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차별상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일상의 중단이었지만 깨달은 이후에 다시 일상으로 다시 들어서야 한다. 여전히 계율을 지키고 서적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깨달음은 일상과 교리가 만나는 사건, 달리 말해서 일상에다 교리를 집어넣는 행위이다. 그렇게 깨달은 이후에 교리가 ‘나’의 몸으로 들어와서 육화(肉化)되는 것이다.
선불교는 교리를 일상으로 녹이는 혁명을 이루어냈다. 이것이 내세의 구원을 말하는 종교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불국토는 초월적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인 것이다. 선불교의 획기적인 전환은 현세의 질서를 말하는 유교와 상통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불교와 유교는 겹치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동아시아 문화의 옷을 다채롭게 짰던 것이다.
주석
1) 이홍만, ‘불성사상에 나타난 悉有佛性과 一闡提의 의미’, [정신개벽] 제10집, 1999 참조.
2) 善男子, 我又復說犯四重禁一闡提人謗方等經作五逆罪, 皆有佛性. 如是衆生, 無善法, 佛性是善.
3) ‘이루’하 18 有人於此, 其待我以橫逆. 則君子必自反也, 我必不仁也, 必無禮也, 此物奚宜至哉? 其自反而仁矣, 自反而有禮矣, 其橫逆由是也. 君子必自反也, 我必不忠. 自反而忠矣, 其橫逆由是也. 君子曰: 此亦妄人也已矣. 如此則與禽獸奚擇哉? 於禽獸又何難焉?
4) 한태식(보광), ‘지장사상에 관한 연구’, [정토학연구] 제15집, 2011 참조.
5) 판본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글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